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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혜의 꽤 괜찮은 책] 내 마음의 목소리 『일기시대』

<월간 채널예스> 2021년 9월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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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기를 쓰지 않은 날은 묘한 죄책감과 불편함을 느끼며 잠이 들고, 다음날 아침이면 머릿속으로 굳게 다짐하곤 한다. (2021.09.08)


‘일기’만 없더라도 아들과 나 사이는 한결 평화로워질 것이다. 과장이 아니라 일기로 인해 하루에도 여러번 다투고 때로는 고성까지 오가기 때문이다. 올해 9살인 첫째는 일기쓰기를 싫어한다. 그날 무슨 일이 있었는지 기억하는 것도 힘들고 맞춤법도 어렵고 글씨 쓸 때 손도 아프다나 뭐라나. 일기가 없는 세상에서 살고 싶단다. 하기야 그 나이대에 글쓰기를 좋아하는 아이는 거의 없을 테지만. 그럼에도 학교에서는 일기를 써오라고 숙제를 내주고, 9살짜리에게 알아서 하길 기대하긴 어려우니 엄마인 나로서는 닦달을 할 수밖에.

불과 며칠 전에도 아이가 쓰라는 일기는 쓰지 않고 계속 딴짓을 하기에 야단을 쳤고, 아이는 여느 때와 마찬가지로 반항(?)을 했다.

“아, 쓰기 싫은데! 너무 힘들단 말이야! 일기를 대체 왜 써야 하냐고!”

“숙제 안 할 거야? 그냥 무슨 일을 했고 무슨 생각을 했는지만 적으면 되잖아. 그게 뭐가 어려워. 그리고 엄마가 말했지. 쓰다 보면 생각하는 힘도 길러지고 상처 받거나 속상한 마음도 풀 수 있다고.”

그렇게 아이를 타이르다 말고 문득 뜨끔하고 말았다. 실은 아이뿐만 아니라 나 역시 일기를 쓴다. 규칙적인 운동이나 독서처럼 일기쓰기는 오래전부터 스스로 정한 규칙 중의 하나다. 물론 예상 가능하다시피 스스로와의 약속이 성실하게 지켜지는 경우는 별로 없다. 심지어 가장 최근에 쓴 일기는 한달도 더 전의 것이었으니. 아이에게 일기를 쓰라며 설교를 늘어놓았지만 실은 나부터가 한참동안 일기를 쓰지 않고 있었던 것이다.

나는 왜 한 달이나 일기를 쓰지 않았을까? 우습지만 아이와 같은 대답을 할 수밖에 없을 듯하다. 힘들어서. 일기를 쓰지 않은 날은 묘한 죄책감과 불편함을 느끼며 잠이 들고, 다음날 아침이면 머릿속으로 굳게 다짐하곤 한다. ‘오늘은 꼭 일기 써야지!’ 하지만 정신없이 하루를 보내다 일기를 쓸 타이밍에 이르면 나도 모르게 ‘에라 모르겠다. 오늘까지만 그냥 넘어가자’와 같은 생각을 하다 잠이 들어 버리곤 했다.

아이에게는 간단한 듯 말했지만 사실 일기 쓰기만큼 귀찮고 힘든 행위도 없다. 비유하자면 음식을 잔뜩 먹은 뒤 체중계 위에 올라가는 것과 비슷하다고나 할까. 많이 먹으면 체중이 늘어나 있을 수밖에 없으므로 자연히 체중계를 외면하고 싶어지는데, 일기 쓰기 역시 마찬가지다. 하루종일 내가 했던 행동이나 생각을 글을 통해 다시금 곱씹는 것이 피로한 한편으로 두려운 것이다.

그렇다면 그토록 힘들고 어려운 일기를 나는 왜 구태여 쓰려는 것일까? 아이와 다르게 누가 숙제로 내주는 것도 아닌데. 그것은 당연하게도 일기를 쓰는 것이 궁극적으로 나 자신에게 필요하다고 여기기 때문이다. 규칙적으로 체중을 재면서 건강한 몸을 유지하고, 이를 닦거나 몸을 씻음으로써 신체를 청결하게 가꾸는 것처럼, 일기를 쓰는 것은 내 마음을 돌아보고 살피는데 도움이 된다. 그래서인지 일기를 꾸준히 쓰지 않으면 왠지 ‘나’에게서 점점 멀어지는 듯한 기분이 든다.

나는 평소 사람이 행복하기 위해서 다른 무엇보다 자기 자신과 잘 지내야 한다고 생각하는 편이다. 말과 다르게 이는 결코 쉽지 않은데, 왜냐하면 사람들이 스스로를 사랑하는 것을 당연하다고 여기면서도 거기에 생각만큼 큰 관심과 노력을 기울이지 않기 때문이다. 실은 자기 자신과 친해지는 것은 다른 누군가와 친해지는 방법과 크게 다르지 않다. 누군가와 가까워지려면 그의 이야기를 귀기울여 듣고 마음을 헤아리는 과정이 필요한데, 이는 자기 자신에 대해서도 마찬가지다. 그리고 이때 일기쓰기가 도움이 된다.




문보영 시인 역시 나와 비슷한 생각을 하는 듯하다. 몇 년 전부터 한 달에 두 번씩 구독자들에게 일기를 부쳐주는 구독 서비스를 운영하는 그는 그간 보낸 일기를 모아 펴낸 책 『일기시대』에서 일기쓰기에 관해 이렇게 말한다. “일기는 내가 무슨 소리를 지껄이는지 가장 치열하게 듣는 행위인데, 내가 내 목소리를 듣기 위해서는 엄청난 청력이 필요하다. 고요한 공간에서 집중해서 들어야 한다” 일기를 쓰는 것이 나에게만 혹은 아이에게만 힘든 것이 아니라는 사실을 다시 한 번 확인한 한편, 이번에야말로 한 달 넘게 방치한 일기장에 다시금 무언가 써내려갈 필요가 있다는 생각을 하게 된 계기였다. 그런 면에서 내용 자체로도 재미있지만 다른 무엇보다 일기를 쓰고 싶도록 만들어주는 것을 『일기시대』의 큰 장점으로 꼽고 싶다.

어떤 사람들에게는 남의 일기를 돈을 주고 읽는다는 사실 자체가 신기할 수도 있겠다. 아는 사람의 비밀이 담긴 일기라면 조금 재미있을지 모르지만, 잘 알지도 못하는 사람의 일기 따위 읽어서 무엇 하느냐고. 하지만 그러한 편견과 다르게 잘 쓰여진 일기는 누가 썼든 그 자체로 재미있다. 이때 잘 쓰여졌다는 것은 얼마나 솔직하고 진실되었는가를 의미한다. 아무리 가까운 사이라도 저 깊은 곳의 내밀한 이야기까지는 하기도 듣기도 힘들고, 심지어 나 자신조차 내 마음을 모르는 경우가 많은데, 타인의 것일망정 가슴 깊숙한 곳에 가라앉은 이야기를 건져 올린 기록들은 그 자체로 일종의 자극이자 위안이 되기 때문이다.

『일기시대』 역시 마찬가지로, 이 안에는 흔히들 이야기하는 굉장한 모험담이나 남다른 경험담이 들어 있지는 않다. 대신 평이한 일상을 살아가는 누군가의 치열한 생각이 끊임없이 펼쳐진다. 얼핏 다른 사람들이 보기에 다람쥐 쳇바퀴와 같은 나날을 살아가는 저자는 그 쳇바퀴 같은 일상 속에서 그간 겪은 일들, 만난 사람들, 들은 말들, 읽은 책들, 그것을 통해 느낀 것들을 가감없이 풀어내며 그 과정에서 자신을 돌아보고 보살피려 애쓴다. 그러한 과정 속에서 조금씩 단단해지면서 궁극적으로는 스스로를 용서하고 받아들이는 길에 한 걸음 가까워진다. 그 모습을 바라보고 있자면 자연스레 내 마음의 목소리에도 귀를 기울이고 싶어지는 것이다.



일기시대
일기시대
문보영 저
민음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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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한승혜(작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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