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스트릿 우먼 파이터에 가해지는 케이팝의 중력
스트릿 우먼 파이터와 케이팝
케이팝의 빛나는 한 시절을 만든, 그 빛으로 자신을 더 빛나게 만든 댄서들이 춤을 춘다. (2021.09.08)
케이팝은 재능 있는 한 사람의 힘만으로는 완성되기 어려운 장르다. 사람들이 흔히 이야기하는 ‘완성도 높은 케이팝’을 위해서는 음악, 비주얼, 춤, 의상, 그리고 헤어와 메이크업에 이르기까지 셀 수 없는 분야의 셀 수 없는 재능들이 일사불란하게 움직여야만 한다. 최근 국경과 인종을 넘어 폭넓게 사랑받는 케이팝 인기의 중심에 ‘퍼포먼스’가 자리하면서, ‘춤’은 케이팝을 사랑하는 이들의 전폭적인 관심과 지지 속에서 무엇보다 쉽고 빠르게 전달되는 몸의 언어가 되었다. 재미있는 건 유명 해외 팝스타와 호흡을 맞춘 ‘세계적인 안무가’의 안무를 사 온 것이 화제가 되던 과거와 달리, 이제는 케이팝을 함께 만들어 가고 있는 국내 댄서 겸 안무가들이 새로운 스타로 떠오르는 시대가 되었다는 점이다. 신곡 뮤직비디오 아래 ‘안무가가 누구냐’는 댓글이 무수히 달리고, 수천만 명이 구독하는 유튜브 댄스 스튜디오 채널에는 다양한 창작 퍼포먼스와 함께 케이팝 안무 영상이 동시에 업로드된다.
대한민국 최고의 스트릿 댄스 크루를 찾겠다는 선언 아래 시작된 엠넷의 새로운 서바이벌 프로그램 ‘스트릿 우먼 파이터’(스우파) 역시 그런 케이팝의 커다란 우산 아래 놓여 있다. 케이팝 퍼포먼스를 좋아하는 이들에게 ‘스우파’는 그 자체로 작은 연말 시상식을 오리지널 버전으로 관람하는 기분이다. YGX 크루의 리더 리정은 마마무 휘인의 ‘EASY’를 시작으로 TWICE, ITZY, 선미, (여자)아이들 등 최근 좋은 반응을 얻고 있는 여성 그룹 대부분의 안무를 담당하며 인기를 모은 댄서다. 크루원들 역시 스스로 말하듯 ‘지금 케이팝을 이끌어가는 안무가’들로 구성되어 있다. 라치카 크루는 ‘벌써 12시’, ‘Roller Coaster’ 등 가수 청하를 대표하는 다수의 안무를 만들었고, 웨이비 크루의 노제는 엑소 카이 솔로 무대를 통해 실력과 외모의 뛰어난 조화로 많은 주목을 받았다. 댄서가 아닌 가수로 케이팝과의 연결고리를 만드는 인물도 있다. 그룹 아이즈원 메인 댄서 출신 채연은 원트 크루의 멤버로 서바이벌에 직접 몸을 던졌다.
미우나 고우나 밀접한 공생관계를 이루고 있는 케이팝과 댄서들은 그러나, ‘스트릿 우먼 파이터’를 통해 묘한 긴장감도 동시에 드러낸다. 댄서들을 소개하며 나열되는 다양한 케이팝 안무 이력은 그들의 실력이 이뤄낸 성과로 높이 평가받는 동시에 결정적인 순간에는 걸림돌 취급을 받는다. 춤과 표정 연출이 ‘아이돌 같다’는 말은 결코 칭찬이 아니며, ‘아이돌 안무 많이 했잖아’라는 말 역시 마찬가지다. 이렇듯 미묘한 불편함이 가장 잘 나타나는 건 역시 아이돌 그룹 출신 채연을 시발점으로 만들어지는 각종 서사다. 채연은 여러 크루에게 연이어 약자로 지목되면서 거듭 배틀에 참여한 뒤 멘탈이 무너지는 모습을 보여줬고, 특정 댄서는 개인 SNS를 통해 그런 그의 성장 서사를 만들기 위해 자신이 희생양이 되었다는 불만을 표출하기도 했다. 프로그램적으로도 부담스러운 연출이지만, 춤과 케이팝을 좋아해 ‘스우파’를 시청하는 시청자에게는 분명 보기 편치만은 않은 광경이다.
케이팝과 댄서 사이 멈추지 않는 신경전 속에서도 ‘스트릿 우먼 파이터’에 눈길을 줄 수밖에 없는 건 오직 하나, 프로그램에 출연한 출연진들이 잘해도 너무 잘하는 사람들이기 때문이다. 앞서 말했듯, 케이팝은 셀 수 없는 분야의 셀 수 없는 재능이 모여 하나의 목표를 향해 달려가는 장르다. 로마에 와 로마법을 따라야 하고 대세를 거스를 수 없기에 최소 케이팝 안에서는 정해진 틀에 맞춰 자신의 역량을 뽐내던 ‘진짜’들이 자신들의 ‘진짜’를 보여주는 한판 대결의 장을 어떻게 외면할 수 있을까. 심지어 케이팝은, 채연을 비롯해 프로그램의 심사위원으로 참여하고 있는 보아, NCT 태용 같은 케이팝의 중심에 선 인물을 대상으로 삼더라도 명확히 정의 내리기 어려운 개념이다. 케이팝이라는 배지는 자랑스러운가? 아니면 부끄러운가? 케이팝의 가치를 둘러싼 논쟁과 대립은 분명 앞으로도 셀 수 없이 반복될 것이다. 다만 유일하게 믿을 수 있는 건 바로 지금, 그렇게 대립하며 전진해 완성된 우리 눈앞의 퍼포먼스다. 이것만은 진짜다. 불필요한 일장 연설이나 무례함을 강요하는 룰 대신 시원하게 펼쳐지는 ‘진짜’들의 무대를 더 많이 보고 싶다. 그 뒤로 댄서들의 영혼의 앤섬이 깔리든 케이팝 4대 천황의 노래가 깔리든 무슨 상관인가. 케이팝의 빛나는 한 시절을 만든, 그 빛으로 자신을 더 빛나게 만든 댄서들이 춤을 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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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중음악평론가. 한국대중음악상 선정위원. 케이팝부터 인디까지 다양한 음악에 대해 쓰고 이야기한다. <시사IN>, <씨네2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