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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한승혜의 꽤 괜찮은 책] 덕질의 기쁨 - 『아무튼, 장국영』
<월간 채널예스> 2021년 6월호
어쩌면 사람에게는 살아가는 동안 사랑하거나 심취할 대상이 반드시 필요한 것 같기도 하다. (2021.06.01)
‘덕질’. 네이버 국어사전에 따르면 ‘덕질’이란 자신이 좋아하는 것에 심취하여 관련된 물건을 모으거나 찾아보는 행위를 이르는 말이라고 한다. 무언가에 열중하여 마니아 이상의 열정과 흥미를 가지고 있는 사람을 뜻하는 신조어 ‘덕후’의 파생어가 어느새 국어사전에 등재될 정도로 널리 퍼진 것이다. 그만큼 ‘덕질’에 빠진 사람들이 많은 모양이다.
고백하자면 나의 경우 덕질 자체를 잘 이해하지 못하는 편이었다. 특히나 그 대상이 예술이나 학문과 같은 특정한 분야가 아닌, 아이돌이나 배우 등의 ‘사람’인 경우에 더욱 그러했다. 물론 나에게도 유명인을 좋아하게 되었던 경험이 당연히 있다. 지금도 특별히 선호하는 가수나 배우가 존재하며, 좋아하는 작가가 신작이라도 냈다 하면 묻지도 따지지도 않고 구매하기도 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덕질’이라 칭할 만큼 열렬히 빠져들거나 몰두한 적은 거의 없었던 듯 하다.
덕질의 대상은 내 손이 닿지 않는 저 먼 곳에 있는 이들인 경우가 많았고, 그러므로 아무리 열중해서 좋아해봤자 괴로움만 커진다는 생각을 하곤 했다. 상대가 나의 존재를 알아주는 것도 아니고, 나의 감정에 응답해주는 것도 아닌데. 그래서 남들은 대체 무슨 에너지로 저렇게 멀리 있는 사람을 저토록 좋아할 수 있는지 늘 궁금했다. 떡이나 밥이 나오는 것도 아닌데 말이다. 덕질 자체에 대한 비판이 아니라 아무런 이득이 없는 행위를 하는 이유에 대한 일종의 의문이었달까. 어려서부터 깍쟁이였던 나는 아마 무언가를 좋아할 때조차 ‘실용성’을 따졌었나보다.
하지만 그런 나조차 요즘 들어 덕질의 효용을 조금씩 느껴가는 중이다. 친구 한 명은 최근 BTS 덕분에 삶이 너무나 행복해졌다고 이야기한다. BTS와 관련된 생각을 할 때는 다른 모든 것을 잊을 수 있다고, 퇴근 후 업데이트 된 영상을 보기 위해 매일 힘을 내서 일을 할 정도라고 말한다. 비슷한 이야기를 다른 지인에게서도 들었다. 지인의 어머니는 작년부터 임영웅에게 빠졌는데, 그러면서 생기와 의욕이 넘치는 상태로 돌변하셨다고 한다. 임영웅과 관련된 활동을 더 열심히 하기 위해 요즘은 식사도 잘하시고 운동도 열심히 하신다고. 또한 임영웅의 팬으로서 누가 되지 않기 위해 언행이나 몸가짐도 이전보다 더 신경쓰게 되었다고. 엄마를 행복하게 해주고 여러모로 활력을 불어넣어준 임영웅이 너무나 고맙다고 지인은 말했다. 이쯤 되면 덕질이 삶에 확실히 도움이 되기는 되는 모양이다.
오유정의 『아무튼, 장국영』 또한 이와 같은 덕질의 본격적인 기쁨을 담아낸 책이다. 그저 누군가를 덕질하는 것으로 끝나는 것이 아니라, 덕질로 인해 삶이 얼마나 풍요로워질 수 있는지, 덕질로 인해 삶이 얼마나 달라질 수 있는지를 생생하게 증언한다. 어린시절 우연히 TV에서 방영되던 <천녀유혼>을 보고 장국영에 매료된 저자는 비디오가게에서 <영웅본색2>를 빌려본 뒤 본격적으로 장국영의 팬이 되고, 이후 그를 더 잘 알기 위해 그의 모든 작품과 노래를 섭렵하고, 나아가서는 그의 언어로 그와 직접 대화하고 싶다는 열망을 담아 중국어에 관심을 갖게 된다.
여기에서 한 걸음 더 나아가서, 먼 훗날 그가 한국에 방문했을 때 그의 통역사가 되고 싶다는 목표 아래 본격적인 중국어 공부를 시작하며, 훗날 그의 향취를 느끼고 싶다는 바램으로 중국에 유학을 가고, 나중에는 그에 대한 논문을 쓰기까지 이른다. 그 결과 현재는 대학에서 중국어를 연구하며 학생들을 가르치는 사람이 되었는데, 이쯤 되면 덕질로 인해 인생이 달라졌다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장국영이 아니었더라면 중국어를 공부하는 일도 없었을 것이고, 그랬더라면 중국어 교수가 되는 일도 없었을 테니 말이다.
나 역시 어려서 홍콩영화를 많이 보고 자랐다. 내가 초등학생이던 무렵 홍콩영화는 황금기를 거치고 있었는데, 그래서인지 방학을 앞두고 학교에서 아이들이 돌아가며 빌려와 다 같이 시청하던 비디오 중에는 유독 홍콩영화가 많았다. 책에 소개된 장국영의 출연작이나 그와 관련된 일화를 읽으며 마치 어린시절 친구와 추억을 나누는 듯한 친근함을 느꼈던 까닭은 그 때문인지도 모르겠다. 더불어 그러한 영화나 노래를 통하여 장국영에 점점 더 심취하게 되는 부분에서는 어린시절 H.O.T나 젝스키스 등에 열광하던 내 친구들과 그 시절 나의 모습이 겹쳐지며 향수에 젖어들기도 했다.
그러면서 떠올랐다. 어린시절 누군가로 인해 설레서 잠 못들던 순간과, 그 사람을 기쁘게 해주겠다는 열망 아래 밤새워 무언가를 만들던 기억과, 그저 함께 있는 것만으로도 행복함을 느꼈던 시간들이. 앞서 덕질은 해본 적이 없다고 말했지만, 그 대상이 누구나 알 법한 유명인이 아니었을 뿐 누군가를 좋아하게 되면서 느끼는 감정은 크게 다르지 않았던 것 같다. ‘사랑’을 하는 순간의 행복함. 조금씩 결은 다르지만 덕질이나 사랑이나 우정이나, 무언가에 관심을 갖고 좋아하게 된다는 측면에서는 같은 색깔의 감정들이었다.
어쩌면 사람에게는 살아가는 동안 사랑하거나 심취할 대상이 반드시 필요한 것 같기도 하다. 삶은 너무나 고독하고 두려운데, 이때 내가 가는 길을 밝혀줄 등불과 같은 존재가 필요한 것이다. 딱히 직접적인 교류가 없더라도, 어떤 명확한 관계를 맺지 않더라도, 그저 거기 있다는 것을 인지하고 바라보며 안심할 수 있는 그런 존재. 비록 가까워질 수는 없더라도 있는 힘껏 사랑하고 동경하고 좋아할 수 있는 존재. 그런 차원에서 사람들이 여러모로 고려사항이 많은 현실의 관계와는 별도로, 애정을 마음껏 퍼부을 수 있는 덕질에서 큰 기쁨을 느끼는 것은 어쩌면 당연한 현상일지도 모르겠다. 아무런 기대 없이 그저 순수하게 좋아하기만 할 때 느껴지는 기쁨이 분명 존재하는 것이다. 그러한 기쁨을 통해 살아갈 용기를 얻을 수도 있는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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