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약에 김장이 없었더라면
하루 한 상 – 일곱 번째 상 : 김장하는 날 먹는 보쌈
설렁탕이나 국밥집에서 가장 중요한 반찬은 김치다. 밥과 국이 있는 곳에 김치가 없다면 삼위일체가 완성되지 못한 기분이다. 본격적인 추위가 오기 전 겨우내 먹을 김치를 마련하는 일. 얼마 전 엄마를 도와 ‘김장’을 했다. 그리고 이날 보쌈이 빠지면 안 된다! 그래서 일곱 번째 상은 김장하는 날 먹는 보쌈.
오래된 월동준비
우리는 언제부터 ‘김장’이란 걸 하게 되었을까. 『밥상을 차리다 : 한반도 음식 문화사』 라는 책에 나오는 김치와 김장 이야기를 정리해 보자면 이렇다. ‘농사를 짓고 곡식으로 밥을 지어먹으면서 채소 반찬이 중요해졌을 것이다. 채소가 없는 겨울을 나기 위해 저장이 잘 되는 방법을 고안했을 것이다. 말리는 것은 편했지만 아삭함을 원했다. 그래서 소금이나 장에 담가 먹었다.’ 그러다 17세기에 고추가 들어오고 100년 뒤쯤 고춧가루, 젓갈 등을 넣은 양념 김치가 생겼단다. 19세기에 결구가 되는 배추가 널리 키워지면서 오늘날의 포기김치가 생겨났다고. 거기에 품앗이 문화까지 곁들여져 오늘날의 ‘김장’이 탄생한 것으로 추측한다. 오래된 월동준비. 다람쥐에게 도토리가 있다면 우리에겐 김장이 있다.
다산 정약용의 둘째 아들, 정학유가 쓴 ‘농가월령가’ 10월 편엔 김장 노래가 있다.
“무 배추 캐어 들여 김장을 하오리라. 앞 냇물에 정히 씻어 짜고 싱겁고를 알맞게 하소. 고추, 마늘, 생강, 파에 젓국지 장아찌라. 독 곁에 중두리요 바탕이 항아리라. 양지에 임시로 집을 짓고 빞에 싸 깊이 묻고. 박과 무 잘 묻어 얼지 않게 간수하소.”
우리는 아빠의 텃밭에서 무 배추를 캐어 들이고 수돗가에서 씻고 절였다. 이렇게 김장 1단계 준비 완료.
아빠의 텃밭. 1년 내내 잘 먹었는데 심지어 김장까지 담글 수 있었다.
내가 김치인지 김치가 나인지
2인 가족인 우리는 김치를 친정에서 가져다 먹는다. 우리가 직접 담그는 것보다 엄마네랑 같이 담가서 나눠 먹는 것이 여러모로 효율적이다. 심지어 김치냉장고도 없고 냉장고도 작다. 저장까지 엄마에게 부탁. 그래서 우리가 가서 힘을 쓰자 했다. 남편은 휴가를 냈다. 새벽같이 일어나 보쌈용 고기 두덩이와 같이 나눠 먹을 케이크, 그리고 갓 내린 커피를 들고 갔다. 우리 둘의 노동력도 함께.
아침을 먹고 커피 타임이 끝나자마자 본격 김장 2단계 버무리기에 들어갔다. 채칼을 이용해 만든 무채에 갓, 파 등 채소와 마늘, 생강 간 것과 액젓, 생새우, 찹쌀, 고춧가루 등등을 넣고 마구 비비다 소금으로 간을 맞추며 속을 만들었다. 큰 고무대야에서 남편은 팔을 휘적휘적이며 속을 비볐다. 역부족이다 싶어 나도 함께 도왔다. 하다 보니 땀이 송골송골. 팔, 어깨가 뻐근했다. 만든 속을 약 60포기의 배추에 착착 바르고 나니 온몸은 고춧가루 투성이였다. 내가 김치인지 김치가 나인지 구별할 수 없는 형국이었다. 하.. 장자의 호접몽을 여기서 몸소 느낄 줄이야. 역시 몸으로 배워야 깊이 안다.
오른쪽으로 비비고 왼쪽으로 비비고 마구 비빈 김장 속
배추에 속을 바르는 남편님의 빠른 손놀림
보쌈이 있어 다행이야
그렇게 오전에 마무리된 김장. 그 사이 엄마는 수육을 삶으셨다. 잠깐 바깥바람을 쐬고 김치와의 물아일체에서 가까스로 빠져나왔다. 그리고 마주한 보쌈 한 상. 아빠가 사오신 지역 막걸리도 있다. 이 힘든 노동에 요 맛있는 보상이 없었다면 얼마나 서글펐을까. 한 쌈 싸서 입에 넣으니 돼지의 풍미가 근육통을 위로한다. 그리고 막걸리 한 모금. 아 이제 됐다. 보쌈이 있어서 ‘정말 다행이다’라는 생각이 든다. 그렇게 두둑이 먹고 집에 왔다. 저녁으론 가볍게 고구마와 단호박을 쪘는데.. 뭔가 허전하다 싶다. 그제야 남편이 묻는다. “왜 새 김치 안 가져왔어요?” 나에게 김장 김치는 익혀 먹는 것이라 딱히 가져와야겠다는 생각이 들지 않았다. 그리고 보쌈을 먹고 나니 만족감이 가득했던지라 그때는 느끼지 못 했다. 하지만 남편님은 새 김치를 좋아하신단다. 그리고 계속 되뇌었다. “새 김치.. 새 김치..” (남편의 말: 상경 후 십 년 만에 맛보는 새 김장김치가 밤새 아른거렸습니다.)
김장 속, 배추, 수육으로 보쌈 한 상. 막걸리로 화룡점정
그리고 다음 날 나만 심한 몸살과 코감기가 흠뻑 들었다. 할 때는 힘들지만 만약에 김장이 없었더라면 이런 보쌈 맛을 느낄 수는 없었을거다. 그리고 겨울에 만들어 먹는 만두, 동치미 국수, 김치볶음밥, 김치찌개도 이렇게 맛있었을까 싶다. 더불어 올해엔 이 고된 노동을 매년 하신, 이제는 차츰 나이듬이 느껴지는 부모님을 조금이나마 도와드릴 수 있어서 뿌듯했다. “감사합니다.”
(부록) 남편의 상
안녕하세요. 보쌈 고기 전문 공급업자 남편입니다. 장모님이 김장을 크게 하신다는 말에 싱싱한 김장김치와 어울릴 보쌈 고기 선정에 열을 올렸습니다. 제주도에 계신 어머님께 직접 흑돼지 목살을 부탁드렸습니다. 김장날 당당히 흑돼지를 들고 처가에 가며 열심히 삶겠다는 각오를 다졌습니다. 하지만 정작 보쌈은 장모님이 삶으시고 전 팔이 빠져라 김장 속을 버무리고 배추에 양념을 바르는 일에 전격 투입되었습니다. 제가 신주단지처럼 모시는 보쌈 15분의 법칙(강불 15분 중불 15분 약불 15분)도 무참히 무너졌습니다. 장모님은 돼지고기에 큰 애착이 없으셨기 때문입니다. 제주산 흑돼지와 육지산 백돼지가 마구 섞여 끓여졌을 뿐입니다. 그래도 막걸리에 보쌈이 어디가겠습니까.
우리 장모님이 취향의 이유로 돼지를 싫어하신다면, 어떤 곳에서는 종교나 문화적인 이유로 돼지를 멀리한다고 합니다. 그 중 대표적인 곳이 이슬람 문화권입니다. 최근 벌어진 IS테러 때문에 이슬람에 대해 잘못된 편견이 자리잡을까 우려하는 목소리들도 나오고 있는데요. 저도 좀 더 알아보고 싶은 마음에 『처음 만나는 이슬람』 이라는 책을 읽어보았습니다. 아쉽게도 왜 돼지고기를 먹지 않는지, 주로 어떤 음식 문화를 즐기는 지에 대해서는 자세한 설명이 없었습니다. 그래서 별 수 없이 마침 찾아온 여편님의 생신을 맞아 서울 시내에 위치한 튀니지 음식점을 찾았습니다. 양고기와 닭고기를 겻들인 꾸스꾸스가 주 메뉴였습니다. 튀니지 지역의 밀은 우리가 평소에 먹는 밀 보다 단백질 함량이 높다고 합니다. 병아리 콩과 콩알만한 튀니지 올리브에서도 고기 못지 않은 풍미와 사하라 사막의 고결함이 전해졌습니다. 百聞不如一見食이라…. 때론 한권의 책보다 한상이 위대한가 봅니다.
한입 무는 순간 탄성이 절로 나오는 병아리콩쿠키와 작지만 강한 튀니지 올리브
밥상을 차리다주영하 글/서영아 그림 | 보림
'배고픔'이라는 본능적이고 보편적 욕구를 우리 조상이 한반도라는 자연환경과 사회제도 속에서 채워온 과정과 그를 통해 쌓여 이룬 음식 문화와 전통을, 22개의 주제로 나누어 차근차근 흥미롭게 설명한 책입니다.
잔칫상이나 제사상에 오르는 고임 음식의 전통이 고구려 시대까지 거슬러 올라간다는 사실뿐 아니라, 불교와 유교와 같은 세계관이 음식 문화에 주는 영향 등을 흥미롭게 배워나갈 수 있습니다. 화가 서영아가 성실하고 꼼꼼하게 음식 문화를 재현해낸 그림을 곁들여 이해를 도와주고 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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