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마르셀 프루스트 『잃어버린 시간을 찾아서』의 첫 문장
이 소설은 완벽하게 내 얘기를 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프루스트는 기억이 주는 의미가 어떤 사물에 깃들어 있다고 말한다. 찾아내야 할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심오한 철학이 아니라 지금 눈앞에 있는 어떤 것 중에 하나다.
모두 열한 권, 3,000쪽에 이르는 방대한 소설의 첫 문장은 주인공이 잠자리에 드는 것으로 시작한다. 어쩌면 나처럼 잠자는 걸 두려워하는 걸지도 모른다. 주인공, 마르셀은 거의 습관적으로 일찍 잠자리에 들었다. 나 역시 초저녁에 잠을 청했던 때가 있는데 그럴 때 괴로운 점 은 다음날 새벽 서너 시에, 내 몸 어딘가에 자명종이라도 있는 것처럼 느닷없이 잠에서 깨버린다는 것이다. 경험해본 사람이라면 알겠지만 이건 정말이지 고통스럽다. 불과 몇 시간 후면 진짜 자명종이 울릴 것이기 때문이다.
마르셀은 무엇 때문에 잠에서 깼을까? 어린 시절에 겪었던 일들이 갑자기 생각났기 때문일까? 그런 생각 때문에 잠에서 깨어났다기보다는 잠에서 깨어났기 때문에 문득 지나온 삶이 생각났을 것 같다. 조용한 새벽시간에 홀로 깨어나본 경험이 있는 사람이면 안다. 그때는 별 이상한 생각이 다 든다. 만약에 그렇다면, 이 소설은 완벽하게 내 얘기를 하고 있는 거나 마찬가지다. 과거를 추억하고 자꾸만 되살려내는 일, 내게는 그것만이 유일하고도 안전한 수면제였다.
그러나 마르셀은 한밤중에 깨어났을 때 여기저기서 떠오르는 기억들이 무엇을 뜻하는지 아직 정확히 모르고 있었다. 경우에 따라선 평생 그런 기억 속에 이끌려 다니다가 그게 뭔지 끝내 밝혀내지 못하고 생을 마감할 수도 있다. 우리가 기억하고 있는 과거의 실체는 무엇일까? 신은 왜 사람이 지나간 과거를 추억하도록 만들어놨을까? 누구라도 지난날을 되돌아보면 생각하고 싶지도 않은 기억이 있다. 만약에 우리가 기억을 마음대로 되살리고 지울 수도 있다면 좋은 기억만을 가지고 살 수 있을 것이다. 무한한 가능성을 가진 인간이라면 어떤 훈련을 통해서 충분히 가능한 일이라고 믿는다. 이 우스운 생각은 내가 초등학생이었을 때 나름 골똘히 연구하던 주제였다.
프루스트는 기억이 주는 의미가 어떤 사물에 깃들어 있다고 말한다. 찾아내야 할 것은 눈에 보이지 않는 심오한 철학이 아니라 지금 눈앞에 있는 어떤 것 중에 하나다.
“지나가 버린 우리들의 과거를 되살리려는 노력은 헛수고이다. 우리가 아무리 의식적으로 노력을 해도 되살릴 수 없기 때문이다. 과거는 우리의 의식이 닿지 않는 아주 먼 곳, 우리가 전혀 의심해 볼 수도 없는 물질적 대상 안에 숨어 있다. 그 리고 우리가 죽기 전에 이 대상을 마날 수 있을지 없을지는 순전히 우연에 달려 있다.”(1부 13쪽)
그리고 바로 이어서 저 유명한 ‘마들렌 사건’이 일어난다. 아, 이처럼 심오한 과거로 들어가는 문을 여는 열쇠가 흔해빠진 간식 따위에 숨어 있을 거라고 어느 누가 예상했겠는가!
과거를 추억하고 거기에 빠져 있는 사람들의 특징은 대개 현재 자기 삶을 못마땅하게 여기기 때문이라고 한다. 맞는 말이기도 하다. 그러나 삶의 가장 밑바닥에 있는 조각들이 갖는 의미를 모른 체하고 산다면 현재가 아무리 행복하다 해도 결국 언젠가는 마음속에 쓸쓸한 낙엽이 쌓여가는 걸 보게 될 것이다. 지금껏 삶에 커다란 문제없이 살아온 마르셀도 어느 날부터인가 이런 쓸쓸함이 더 이상 두고 볼 수 없을 정도로 커지고 있는 걸 알아차렸다.
소설의 주인공이자 작가의 이름이기도 한 마르셀, 그가 놓치고 있었던 기억의 조각은 어떤 것이었을까? 무엇이 그를 거의 40년 전 어린 시절로 돌아가도록 만들었을까? 마들렌. 나에게도 마들렌이 있었다면 내 기억을 다시 찾아볼 수 있었을까?
마르셀의 이야기는 길고 복잡하지만 읽어나갈수록 나와 많이 닮은 걸 발견한다. 콩브레에서 지낸 어린 시절 이야기도 그렇지만 거기서 만난 ‘스완’ 씨와 그의 아내인 ‘오데트’에 관한 이야기는 특히 아름답다. 마르셀이 어릴 적에 이미 두 사람은 부부였는데 그 이전, 그러니까 마르셀이 태어나기 전(혹은 아주 어렸을 때) 스완 씨와 오데트가 사랑을 키워가던 이야기는 따로 뽑아내 독립적인 부분으로 만들어놨을 정도로 작가는 정성을 들였다. 나는 평소에 만났던 사람 얼굴을 잘 기억하지 못하기 때문에 내가 봤던 어떤 그림에 특징을 대입시켜서 그 사람 모습을 기억해내는 방법을 쓰고 있다. 그런데 스완 씨가 오데트를 볼 때 딱 그렇게 하고 있는 것이 아닌가?
스완 씨가 처음으로 오데트를 보고 느낀 것은 보잘 것 없는 외모였다.
“옆얼굴이 너무나 날카롭고, 살갗은 지나칠 만큼 여리며, 광대뼈가 너무 불
쑥 나오고, 전체적인 얼굴 모습이 지나치게 수척했다.”(『스완의 사랑』, 248쪽)
그러나 조금씩 가깝게 지내면서 스완 씨는 오데트의 얼굴에서 신성한 기운마저 발견하게 된다. 거기에 완전히 몰입하게 되고 나서는 오데트를 위대한 르네상스 화가의 명화 속 주인공과 같은 자리에 올려놓는다. 그 일은 보고 싶다고 하던 판화작품을 갖고 오테트의 집에 찾아갔을 때 처음 일어났다.
똑같은 사람을 다시 봤음에도 불구하고 이번엔 “흐트러진 머리털을 두 볼을 따라 그대로 늘어뜨리고, 판화 쪽으로 몸을 편히 기울일 수 있게 춤추는 듯한 자세로 한쪽 다리를 굽히고, 생기가 없을 때면 무척 피로하고도 침울해 보이는 큰 눈으로, 머리를 갸우뚱하게 기울이고 판화를 들여다보고 있는 그녀는 시스티나 대성당 벽화에 있는 이드로의 딸 십보라를 꼭 닮아서”(『스완의 사랑』, 277쪽) 스완 씨의 눈을 의심하게 만든다.
이런 장면은 스테판 외에가 그린 만화로 보면 더욱 실감난다. 스완 씨는 명화의 복제품을 집으로 갖고 와서 그게 마치 오데트의 사진인 것처럼 책상 위에 올려놓고 감상에 젖기도 한다. 어쩌면 나도 나이가 들어서 누군가를 마음에 두고선, 이런 행동을 할지도 모른다고 생각하며 혼자 웃었다. 내겐 정말로 있을 법한 일이다.
프루스트는 아마도 되찾은 시간을 통해 자신이 앞으로 작가로서 해나가야 할 일들에 대한 명백한 목표를 이해했다. 물론 현실적으로 남은 문제, 아홉 살 때 처음으로 발병한 심각한 천식은 평생 짊어지고 살아야겠지만 삶의 퍼즐조각을 맞추는 데 성공한 것만큼 멋진 일이 또 있을까. 나에게도 이런 일이 일어날 수 있을까? 프루스트는 그런 일이 일어날 수도 있고 그렇지 않을 수도 있다고 말했다.
그리고 그것은 순전히 우연에 맡겨야 할 일이기 때문에 노력해서 될 일도 아니라고 한다. 나도 그 말을 믿는다. 사람의 노력은 때론 부질없는 방향으로 뻗어나가는 때가 많다. 솔직히 나는 잃어버린 시간을 찾는 데 성공한 프루스트가 좀 더 오래 살았다면 어땠을까 상상해본다. 내가 늘 걱정하고 있는 나이, 여든 살 정도라면 좋았을 텐데, 프루스트는 결국 천식 합병증으로 51세라는 젊은 나이에 세상을 떠났다. 이 또한 운명, 아니면 우연이라고 할 수 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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서울 정릉. 작가 박경리가 살던 집 근처에서 태어났다. 부모님을 따라 강원도 태백에서 어린 시절을 보냈고 다시 정릉으로 돌아와 학교를 다녔다. 어릴 때부터 헌책방 주인이 되는 것을 꿈꿨지만 대학에선 컴퓨터를 전공했고 오랫동안 IT회사에서 일했다. 서른 즈음에 회사를 그만두고 출판사와 헌책방에서 직원으로 일하다 2007년에 ‘이상한나라의헌책방’ 이라는 이름으로 가게를 열어 지금까지 그곳에서 일하고 있다. 어릴 적부터 활자중독이다 싶을 정도로 책에 빠져 살았다. 하지만 책 읽기 기준은 까다롭지 않아서 기억에 남을 만한 멋진 첫 문장과 깔끔한 마지막 문장을 발견하면 그것도 절반의 성공이라 믿는다. 헌책방 일을 하는 틈틈이 여러 곳에 글을 쓰고 강연도 다닌다. 지은 책으로는 《이상한 나라의 헌책방》,《심야책방》,《침대 밑의 책》,《헌 책이 내게 말을 걸어왔다》,《책이 좀 많습니다》가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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