시간이란 지극히 개인적 환상이 아닐까
두바이공항의 환승 구역은 천국인가?
시간과 공간이 의미를 잃고 나니, 두바이공항에서 환승을 기다리는 몇 시간 동안만큼은 영원한 젊음을 얻은 불멸의 존재가 된 듯했다.
PHOTOGRAPH : LEE CHUN-HEE
두바이공항의 환승 구역은 천국인가?
항공권에는 두바이 도착 시간이 새벽 4시 15분으로 나와 있었다. 연결 항공편 탑승 시각이 오전 9시니까 그때까지는 별 수 없이 공항에 갇힌 몸이라고 생각하며 비행기를 빠져나왔다. 그런데 웬걸, 보안 검색대를 지나 환승 구역으로 들어서자 내 예상과 전혀 다른 곳이 나타났다. 그곳에 들어서자마자 나는 시간의 흐름을 상실했고, 모든 것이 비현실적으로 바뀌었다. 거기에는 우리 삶에 중요한 뭔가가 없었다. 그러니까 환승 구역에서는 시간의 흐름이 느껴지지 않았던 것이다.
그러고 보니, ‘시간이란 지극히 개인적 환상이 아닐까’라는 생각을 처음 한 곳도 모하비 사막(Mojave Desert) 한가운데에 있는 라스베이거스(Las Vegas)였다. 애당초 관광 목적의 가족 여행이었는데 오직 숙박비가 싸다는 이유만으로 예약한 호텔에 들어섰다. 체크인하는 동안, 요란스러운 소리가 들려 고개를 돌렸더니 카지노가 있었다. 짐을 푼 뒤 소설가로서의 순수한 호기심에 끌려 구경이나 해볼 생각으로 1층으로 내려갔다. 다시 객실로 돌아왔을 땐 실종 신고되기 일보 직전이었다. 왜냐고? 나는 잠깐 구경했다고 생각했는데, 무려 4시간이 지났던 것이다.
얘기인즉슨, 다음과 같다. 도박하는 사람들을 구경하다 보니 슬롯머신 정도라면 해볼 만하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1달러면 슬롯머신에서 4번 베팅할 수 있었다. 처음은 물론 꽝. 그다음 역시 꽝이었을 것이다. 어쨌든 그 1달러를 다 쓰기도 전에 어느 순간인가 갑자기 기계 상단에 불이 들어오면서 흥겨운 음악이 흘러나왔다. 어안이 벙벙했다. 정신을 차려보니 400배짜리가 터져 100달러에 해당하는 칩이 쏟아져 나왔다. 그 순간, 당연하게도 ‘1달러를 다 걸었다면 400달러를 땄을 것이고, 만약 그게 10달러였다면…’ 하는 생각이 들었다. 그러니 다시 돈을 걸 수밖에. 그렇게 해서 내 돈 100달러까지 그 멋진 기계에 다 바친 뒤에야 자리에서 일어난 것이다.
PHOTOGRAPH : ANDREW MONGORERY
시계가 있었다면, 아니, 적어도 시간이 흘러가는 느낌이라도 들었다면, 객실에 가족을 놔둔 채 그렇게 오랫동안 슬롯머신 앞에 앉아 있지는 않았을 것이다. 아마도 1시간쯤 지난 뒤 일어나기 싫어도 일어날 수밖에 없었을 테지. 하지만 전혀 몰랐다. 나 같은 사람 때문에 카지노에는 시계도, 낮인지 밤인지 구분할 수 있는 창도 없고, 조명으로 실내를 환히 밝힌 채 늘 흥겨운 음악이 흐른다는 사실을 나중에야 깨달았다. 마치 그곳에선 낮이, 그러니까 삶이 영원하다는 듯이. 소비를 위해서는 죽음과 상실의 느낌을, 그리고 무엇보다 시간은 정지했으며 우리는 불로영생하리라는 착각을 불러일으켜야만 한다는 사실을 카지노는 잘 알고 있었던 것이다.
라스베이거스의 카지노업자만큼이나 두바이공항의 면세점업자도 지갑을 여는 여행자의 심리를 잘 알고 있는 듯하다. 이곳 환승 구역에서 역시 시간의 흐름이 느껴지지 않는 것은 당연하다. 여행 중인데다 이코노미석에서 몇 시간씩 시달린 뒤라 판단이 흐려지기도 했지만, 그렇지 않더라도 24시간 영업하는 면세점과 새벽에도 물밀듯 밀려드는 여행자 덕분에 시간은 이미 그 의미를 상실한 지 오래다. 게다가 두바이공항은 공간적으로도 현실성이 없다. 이곳에 모인 다양한 인종 틈에 있다 보면 이곳이 중동의 한복판이라는 생각은 전혀 들지 않기 때문이다. 어쩌면 낙원에 있는 것인지도 몰랐다.
시간과 공간이 의미를 잃고 나니, 두바이공항에서 환승을 기다리는 몇 시간 동안만큼은 영원한 젊음을 얻은 불멸의 존재가 된 듯했다. “당신은 이 모든 상품을 충분히 누릴 자격이 있어요.” 그 새벽에 반짝이는 화려한 불빛은 내게 그렇게 말하는 듯했다. 이곳은 낙원은 낙원이되, 한쪽에 가격표가 붙은 인공 낙원이다. 그러니 화려한 조명 아래 만수르(Mansour, 중동 출신의 세계적 부호)라도 된 듯한 기분이 든다면, 얼른 가격표를 보는 게 좋겠다. 대개 영원한 젊음이나 장생을 논하며 말을 거는 이들은 우리보다 우리의 지갑에 더 관심이 많은 법이다.
비현실적인 두바이공항의 환승 구역에서 가장 현실적인 행위는 환승 데스크로 가서 식사 쿠폰을 받는 일인 듯하다. 공항에서 대기 시간이 4시간 이상일 때 받을 수 있는 이 쿠폰에는 게이트 주변의 여러 식당에서 무료로 식사와 음료를 제공한다고 적혀 있었다. 우동을 먹을까, 스시를 먹을까 고민하면서 일식당까지 찾아간 내게 종업원이 내준 것은 컵라면이 전부였다. “일식당이라며?”라고 되묻지 않았다. 으레 공짜란 그런 것이니까. 두바이공항에 하나밖에 없는 일식당에 앉아서 신라면을 먹노라니, 목이 따끔거렸다. 오랜만에 매콤한 음식을 먹어서 혹은 인공 낙원의 속내가 보여서.
김연수는 하루도 빠짐없이 글을 쓰며 쉬지 않고 소설과 에세이를 발표하는 부지런한 소설가다. 그가 <론리플래닛 매거진 코리아>를 통해 꼭꼭 숨겨두었던 특별한 여행의 추억을 풀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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