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서유미의 한 몸의 시간
새벽은 달콤하고 시간은 흐른다
마지막 케이크 조각을 아껴 먹는 듯한 마음으로
왜 그동안 새벽의 시간을 더 알차게 즐기지 못했나. 왜 잠의 노예로 설렁설렁 살았나. 책도 더 많이 읽어두고 소설도 많이 써두고 여행도 자주 다닐걸, 후회가 밀려왔다. 그때는 그런 느슨함이 마음에 들었고 의미 있었지만 앞으로 나만의 시간이 줄어들 거라고 생각하면 심정이 달라졌다.
생활신조 중 하나가 ‘잠이 보약이다’였다. 고3 수험생 때도 특별히 잠을 줄여본 적이 없을 정도로(줄이는 데 실패했다는 말이 더 맞을 것이다) 잠이 많고 자는 걸 좋아한다. 그러면서도 늘 결정적인 순간에는 잠만 줄였어도 인생이 달라졌을 거라며 잠 핑계를 댔다.
30주가 넘으면서 출산 이후의 삶에 대해 자주 생각했다. 걱정되는 일이 많았지만 그 중 하나가 바로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습관에 관한 것이었다. 내 나름대로는 규칙적이고 오래 유지해온 패턴이라 잘 맞는 옷 같은데 아이에게는 나쁜 영향을 끼칠까봐 염려되었다. 모든 육아 관련 책들은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는 게 아이의 성장에 좋다고 강조했다. 내가 그 부분을 소리 내어 읽으면 옆 사람은 당연히 그렇겠지, 하며 고개를 끄덕거렸다. 우리도 앞으로 일찍 자고 일찍 일어나자고 다짐해놓고도 둘 다 새벽에 자는 습관을 버리지 못했다.
나는 태어나서 처음으로 자는 시간이 아까워 더 늦게까지 깨어 있었다. 군 입대를 앞둔 사람처럼(어쩐지 심정적으로 비슷할 것 같았다) 어떤 날은 헤드폰을 꽂은 채 몇 시간 동안 음악만 들었고 어떤 날은 영화를 연달아 봤다. 왜 그동안 새벽의 시간을 더 알차게 즐기지 못했나. 왜 잠의 노예로 설렁설렁 살았나. 책도 더 많이 읽어두고 소설도 많이 써두고 여행도 자주 다닐걸, 후회가 밀려왔다. 그때는 그런 느슨함이 마음에 들었고 의미 있었지만 앞으로 나만의 시간이 줄어들 거라고 생각하면 심정이 달라졌다. 나는 이렇게 할걸, 저렇게 할걸 더 할걸, 하며 마지막 남은 조각 케이크 같은 시간을 조금씩 아껴 썼다. 그럴 때면 코끼리 같은 몸도, 퉁퉁 부은 손도, 잦은 요의나 툭하면 밀려오는 식욕도 모두 내 것이 아닌 것 같았다. 이따금 뱃속의 아이가 자신을 잊지 말라는 듯 툭툭 움직였다. 어떤 때는 화를 내는 것처럼 배가 단단하게 뭉치기도 했다. 그럼 나는 하던 일을 멈추고 가만히 배를 쓰다듬었다. 그래, 안다, 이놈아. 너 거기 있는 것 다 안다. 그러니 이 노래가 끝날 때까지 조금만 기다려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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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2007년 문학수첩 작가상을 받으며 등단. 같은 해 창비 장편소설상을 탔다. 장편소설 『판타스틱 개미지옥』 『쿨하게 한걸음』 『당신의 몬스터』를 썼고 소설집으로 『당분간 인간』이 있다. 에세이 『소울 푸드』에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