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서유미의 한 몸의 시간
하지 않을 용기
조금 더 천천히, 천천히
마음이 급해질수록 나는 숨을 고르며 천천히 움직였다. 늦게 낳는 첫 아이인데, 라는 상황에 붙들리기 시작하면 마음은 한없이 약해지고 분수에 넘치는 소비를 하게 될 것 같았다.
임신 6개월에 접어들면서 출산 전에 준비해야 할 것들에 대해 자주 생각하게 되었다. 그럴 때면 중요한 시험이나 여행을 앞둔 사람처럼 약간의 기대와 그것을 압도하는 두려움에 빠졌다. 준비란 물품부터 마음가짐에 대한 것까지 포함했다. 자주 들어가는 인터넷 카페에 ‘출산 준비’라고 검색하면 다양한 정보들이 떴다. 사진과 글을 읽다보면 나는 시험 범위를 잘못 알고 있거나 시험 날짜를 착각한 것 같은 혼란에 빠졌다. 임신 중기에 들어서면 산후 조리원을 예약해야 하고, 출산에 관한 책을 읽거나 강의를 듣고 임산부를 위한 요가나 체조를 해야 했다. 베이비 페어에 가서 좋은 물건을 사 두고 해외로 태교 여행을 다녀오는 것도 빠지지 않았다.
태교 여행을 가고 싶고 산후 조리원도 알아봐야 하지만, 사야 할 물건들의 리스트도 만들고 무엇을 어디에서 살지도 결정해야 하지만 마음이 급해질수록 나는 숨을 고르며 천천히 움직였다. 늦게 낳는 첫 아이인데, 라는 상황에 붙들리기 시작하면 마음은 한없이 약해지고 분수에 넘치는 소비를 하게 될 것 같았다.
내가 준비해두고 싶은 건 좋은 유모차나 아기 침대, 낳는 순간부터 촬영하는 성장 동영상만이 아니었다. 쓰던 소설을 잘 마무리해서 출판사에 보내고, 새로운 소설의 시놉시스를 만들어놓고, 옆 사람과 둘이 보내는 시간을 많이 갖는 것이었다. 아이에게 필요한 물건을 정성스럽게 준비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어떤 것을 사지 않고, 하지 않고, 거절할 용기도 필요했다. 첫 아이고 노산이라 귀하고 다 주고 싶지만 바로 그 이유 때문에 단호해지고 멀리 볼 필요가 있었다. 옆 사람과 나는 최대한 얻어 쓰자고 결심했고 주변 사람들에게 알렸다. 다행히 유모차는 내가 줄게, 기저귀 가방은 내가 줄게. 많은 분들이 쓰던 물건을 나눠주었다.
옆 사람과 나는 산책을 시작했다. 출산 전까지 매일 한 시간씩 걸으며 이야기를 나누기로 하고 코스를 정했다. 복이 많은 아이야. 받은 만큼, 아니 그보다 많이 베푸는 아이가 되었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아이가 태어나도, 크는 동안에도 지금의 마음을 잊지 말자고 다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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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2007년 문학수첩 작가상을 받으며 등단. 같은 해 창비 장편소설상을 탔다. 장편소설 『판타스틱 개미지옥』 『쿨하게 한걸음』 『당신의 몬스터』를 썼고 소설집으로 『당분간 인간』이 있다. 에세이 『소울 푸드』에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