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남자 혹은 여자로 산다는 것 (2)
내가 원하는 아이
아들, 딸에 상관없이 엄마는 결국 자식을 위해 버둥대다가 죽는 거구나. 아빠로 산다는 것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자 아들, 딸이 아니라 그저 내게 온, 나를 닮은 아이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눈을 감고 입을 조금 벌린 옆모습이 담긴 초음파 사진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병원에서 초음파 검사를 받을 때마다 묘하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내 뱃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는 건데 나와 전혀 상관없는 미지의 세계를 엿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모니터를 보면서도 가끔씩 그게 내 뱃속의 일이라는 걸 잊었다.
병원에 다녀오면 가족들은 업그레이드된 초음파 사진을 보여달라고 졸랐고 성별은? 하고 물었다. 아이는 움직임이 많지 않고 옆으로 누워 다리만 천천히 들어 올렸다가 내렸다. 그 덕분에 성별을 확인하는 일은 자꾸 미뤄졌다. 다음번에 확인할 수 있다고 하자 축복이는 아무래도 딸 같다거나 아들일 거라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아빠는 아들에 한 표, 엄마는 딸에 한 표를 던졌고 동생들도 각각 표가 나뉘었다. 시어머니는 한 명만 낳을 거면 딸이 좋겠다고 했고 시아버지는 말없이 웃으셨다. 친한 사람들이 딸을 많이 낳은 탓도 있고 여동생이 많아서 나는 딸이 익숙했다. 팔짱을 끼고 친구처럼 걸어가는 장면을 상상하면 어쩐지 흐뭇해졌다.
초음파 화면을 보던 의사는 딸을 원해요? 아들이 좋아요? 하고 물었다. 화면 속의 아이는 모처럼 얼굴을 보였다가 팔로 가렸다가 분주히 움직였다. 나로서는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봐도 아들이나 딸의 징후를 발견할 수 없었다. 오늘은 알 수 있나요? 라고 묻자 의사가 흰 점을 가리키며 요기 보이시죠? 하고 웃었다. 고놈 참 실하네요.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몰라서 멍하게 있었고 이해한 뒤에는 어쩐지 믿어지지 않아서 꼬물거리는 모습만 쳐다보았다. 아들이라니. 내가 남자아이를 키우게 된다니. 그것 역시 이미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인데 다른 사람의 얘기 같았다. 진짠가요? 라고 묻자 의사는 요즘 딸을 많이 원하시는데, 아들도 키우기 나름이라는 말로 위로했다.
병원에서 나와 양가 부모님께 전화를 드리고 지인들에게도 메시지를 보냈다. ‘축복이는 아들이다’라는 요지의 소식을 전하는 동안 얘를 군대에 어떻게 보내나, 먼 훗날의 일이 걱정되었고 옆 사람을 닮은 아들이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라게 되었다. 의례적인 축하와 감탄 섞인 인사를 받은 뒤에 딸을 키우는 친구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딸 엄마는 싱크대 앞에서 죽고 아들 엄마는 현관문 앞에서 죽는다더라. 그 메시지를 보며 나는 웃고 말았다. 아들, 딸에 상관없이 엄마는 결국 자식을 위해 버둥대다가 죽는 거구나. 아빠로 산다는 것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자 아들, 딸이 아니라 그저 내게 온, 나를 닮은 아이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눈을 감고 입을 조금 벌린 옆모습이 담긴 초음파 사진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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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2007년 문학수첩 작가상을 받으며 등단. 같은 해 창비 장편소설상을 탔다. 장편소설 『판타스틱 개미지옥』 『쿨하게 한걸음』 『당신의 몬스터』를 썼고 소설집으로 『당분간 인간』이 있다. 에세이 『소울 푸드』에 참여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