검색

남자 혹은 여자로 산다는 것 (2)

내가 원하는 아이

  • 페이스북
  • 트위터
  • 복사

아들, 딸에 상관없이 엄마는 결국 자식을 위해 버둥대다가 죽는 거구나. 아빠로 산다는 것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자 아들, 딸이 아니라 그저 내게 온, 나를 닮은 아이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눈을 감고 입을 조금 벌린 옆모습이 담긴 초음파 사진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19.jpg

 


병원에서 초음파 검사를 받을 때마다 묘하게 가슴이 두근거렸다. 내 뱃속에서 일어나는 일들을 보는 건데 나와 전혀 상관없는 미지의 세계를 엿보는 것 같은 기분이 들었다. 모니터를 보면서도 가끔씩 그게 내 뱃속의 일이라는 걸 잊었다.


병원에 다녀오면 가족들은 업그레이드된 초음파 사진을 보여달라고 졸랐고 성별은? 하고 물었다. 아이는 움직임이 많지 않고 옆으로 누워 다리만 천천히 들어 올렸다가 내렸다. 그 덕분에 성별을 확인하는 일은 자꾸 미뤄졌다. 다음번에 확인할 수 있다고 하자 축복이는 아무래도 딸 같다거나 아들일 거라며 이야기꽃을 피웠다. 아빠는 아들에 한 표, 엄마는 딸에 한 표를 던졌고 동생들도 각각 표가 나뉘었다. 시어머니는 한 명만 낳을 거면 딸이 좋겠다고 했고 시아버지는 말없이 웃으셨다. 친한 사람들이 딸을 많이 낳은 탓도 있고 여동생이 많아서 나는 딸이 익숙했다. 팔짱을 끼고 친구처럼 걸어가는 장면을 상상하면 어쩐지 흐뭇해졌다.


초음파 화면을 보던 의사는 딸을 원해요? 아들이 좋아요? 하고 물었다. 화면 속의 아이는 모처럼 얼굴을 보였다가 팔로 가렸다가 분주히 움직였다. 나로서는 아무리 눈을 크게 뜨고 봐도 아들이나 딸의 징후를 발견할 수 없었다. 오늘은 알 수 있나요? 라고 묻자 의사가 흰 점을 가리키며 요기 보이시죠? 하고 웃었다. 고놈 참 실하네요. 처음에는 무슨 뜻인지 몰라서 멍하게 있었고 이해한 뒤에는 어쩐지 믿어지지 않아서 꼬물거리는 모습만 쳐다보았다. 아들이라니. 내가 남자아이를 키우게 된다니. 그것 역시 이미 내 안에서 일어나고 있는 일인데 다른 사람의 얘기 같았다. 진짠가요? 라고 묻자 의사는 요즘 딸을 많이 원하시는데, 아들도 키우기 나름이라는 말로 위로했다.


병원에서 나와 양가 부모님께 전화를 드리고 지인들에게도 메시지를 보냈다. ‘축복이는 아들이다’라는 요지의 소식을 전하는 동안 얘를 군대에 어떻게 보내나, 먼 훗날의 일이 걱정되었고 옆 사람을 닮은 아들이면 좋겠다고 간절히 바라게 되었다. 의례적인 축하와 감탄 섞인 인사를 받은 뒤에 딸을 키우는 친구의 메시지가 도착했다. 딸 엄마는 싱크대 앞에서 죽고 아들 엄마는 현관문 앞에서 죽는다더라. 그 메시지를 보며 나는 웃고 말았다. 아들, 딸에 상관없이 엄마는 결국 자식을 위해 버둥대다가 죽는 거구나. 아빠로 산다는 것도 크게 다르지 않을 것이다. 그러자 아들, 딸이 아니라 그저 내게 온, 나를 닮은 아이일 뿐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눈을 감고 입을 조금 벌린 옆모습이 담긴 초음파 사진을 오래 들여다보았다.   
 

 


[관련 기사]


- 여자의 배
- 참을 수 없는 존재의 메슥거림 (2)
- 아기를 위해 몸과 마음의 공간을 늘리며
- 남자 혹은 여자로 산다는 것 (1)

 


‘대한민국 No.1 문화웹진’ 예스24 채널예스


 

이 기사가 마음에 드셨다면 아래 SNS 버튼을 눌러 추천해주세요.

독자 리뷰

(1개)

  • 독자 의견 이벤트

채널예스 독자 리뷰 혜택 안내

닫기

부분 인원 혜택 (YES포인트)
댓글왕 1 30,000원
우수 댓글상 11 10,000원
노력상 12 5,000원
 등록
더보기

글 | 서유미(소설가)

2007년 문학수첩 작가상을 받으며 등단. 같은 해 창비 장편소설상을 탔다. 장편소설 『판타스틱 개미지옥』 『쿨하게 한걸음』 『당신의 몬스터』를 썼고 소설집으로 『당분간 인간』이 있다. 에세이 『소울 푸드』에 참여했다."

오늘의 책

우리 중 진짜 괴물은 누구인가

『백설공주에게 죽음을』 넬레 노이하우스 신작. 어느 날 한 소녀의 시신이 발견되고, 그녀의 엄마에게 사적 제재를 제공하는 한 단체가 접근한다. 강렬한 서사와 반전 속에 난민, 소셜미디어 등 현대 사회 문제를 녹아낸 노련미가 돋보인다. 그 끝에는 진정한 정의란 무엇인지 곱씹게 될 것이다.

시간을 사고파는 세상이 온다면?

시간 유전자를 이동하는 기술이 발견되어 돈만 있으면 누구나 시간을 살 수 있게 된 미래. 타임 스토어를 중심으로 영원한 생명을 꿈꾸는 자들의 흉악한 음모와 그들의 비밀을 파헤치는 아이들의 아슬아슬한 추격, 그리고 삶의 빛나는 가치를 이야기한다. 『열세 살의 걷기 클럽』 김혜정 작가의 신작.

경제의 중심에는 금리가 있다.

국제금융 최전선에서 활약한 조원경 저자의 신간. 금리가 경제와 금융 시장에 미치는 영향을 다각도로 분석한다. 자산 가치 증대와 리스크 관리에 필수적인 금리 이해를 돕기 위해 예금, 대출, 장단기 금리 등 다양한 사례를 제시하여 금리와 경제의 상관관계를 설명해 주는 책.

세상에서 가장 든든한 내 편!

볼로냐 라가치상을 수상한 안효림 작가 신작. 화려하고 영롱한 자개 문양이 눈길을 사로잡는다. 부모의 맞벌이로 홀로 많은 시간을 보내던 아이가 신비로운 자개장 할머니와 함께 자개 나라를 모험하며 희망과 용기를 되찾는 이야기를 담았다. 진정한 보물은 가족이라는 것을 일깨워 주는 그림책이다.


문화지원프로젝트
PYCHYESWEB02