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최민석의 영사기(映思記)
좋은 영화란 무엇인가? <아메리칸 셰프>
셰프가 요리해주는 삶의 애피타이저
훌륭한 애피타이저의 역할은 주요리를 더욱 기대하고, 더욱 즐기게 하는 것이다. 영화가 삶의 한 단편이라면, 훌륭한 영화의 역할은 삶이라는 주 요리를 더욱 흥겹게 즐기도록 하는 것이다
2주간 본 영화는 <강남 1970>, <허삼관>, <아메리칸 셰프>였다. 그중 <아메리칸 셰프>에 관해 언급을 아니 할 수 없는데, 정말로 스토리와 상관없이 수시로 풍만한 여성들을 등장했다. 훌륭한 영화였다는 말이다. 이런 이야기에 힘을 뺀 영화를 꽤나 좋아하는데, 줄곧 맛있는 음식이 등장했고, 즐거운 음악이 쏟아져 나왔다. 게다가 트럭을 타고 미 전역을 떠돌아다니, 나까지 여행하는 기분마저 들었다.
약간 어이없는 설정도 있었다. 그건 주인공 ‘존 파브로’의 전처가 ‘소피아 베르가라’이면서 현재 데이트를 즐기는 여인이 ‘스칼렛 요한슨’이라는 것이었다. ‘도대체 주인공의 어디가 좋아서?!’라고 반문하고 싶었지만, 존 파브르가 주인공이자 동시에 감독이라는 것을 깨달은 순간, ‘영화계도 어쩔 수 없는 자본주의 세계의 축소판이군’하며 탄식할 뿐이었다.
그나저나, ‘소피아 베르가라’가 누구인가. 이런 말은 뭣하지만, 나는 사실 소피아 베르가라 때문에 변방 작가로 낙인찍힌 기구한 사연을 품고 있다. 이태 전 가을, 실로 오랜만에 단편 소설을 하나 청탁 받았는데, 소설을 워낙 오랫동안 쓰지 않았던 탓인지 도무지 소재가 떠오르지 않았다. 그리하여 머리나 식힐 요량으로 평소에 호감을 품고 있었던 할리우드 B급 영화의 선구자라 할 수 있는 ‘로버트 로드리게즈’ 감독의 <마셰티 킬즈>를 보러 갔었다. 그때, 그녀를 처음 만났는데, 평안한 심신상태로 극장 의자에 깊숙이 몸을 박고 있던 나는 그만 순간적으로 언어를 잃어버리고 말았다. 그녀가 스크린에 첫 등장을 하는 순간, 화면을 가득 채운 압도적인 가슴에 말문이 막혀 버린 것이었다. 나는 이때껏 구사하고, 외워왔던 모든 단어를 상실해버렸다. 그건 아무리 보아도 신이 인간에게 허락한 사이즈가 아니었다. ‘아... 아.... 이...이...이건..’, 하는 얼버무리는 내 머릿속에선 경이와 충격의 감탄사들이 난무했다. 사실, 곧 중년을 바라볼 나이에 무슨 사춘기 소년 같은 호기심이 남아 있겠는가, 라고 변명하고 싶었으니, 말하자면 그건, 일종의 작가적 상상력이었다(고 해두자). 작가는 항상 서사의 개연성을 염두에 두고 영화를 보니까 말이다. 즉, 아무리 생각해도 그 비자연적인 형체에는 뭔가 반전이 있을 것이라 생각할 수밖에 없었다. 아니나 다를까, 실제로 그녀는 위기의 결투 신에서 양 팔을 뒤로 젖히며 적들을 향해 흉부를 개방하더니, 그곳에서 미사일을 발사 시켰다. 마감을 하루 앞둔, 나는 ‘그래! 이거야! 한국 문단은 이런 식으로 권위 의식을 버려야해’하며 유레카를 외쳤고, 그녀의 헌신적 열연에 존경을 표하는 마음으로 이 설정을 숭고한 한국문학의 단편소설에 온전히 차용했다. 그 소설이 발표된 후, 단편소설 청탁은 뚝 끊겨버렸다.
<지골로 인 뉴욕>에서도 화끈한 연기를 선보였던, 그녀는 <아메리칸 셰프>에서는 단지 서서 이야기를 하고, 샌드위치 주문을 받을 뿐인데도 화끈했다. 존재만으로도 영화의 주제가 갈 길을 잃어버리고, 장르가 확 바뀌어버리는 것이다. 아아, 나는 지금 또 한 번 소피아 베르가라 때문에 글을 망치고, ‘여전히 저급한 작가’라는 오명을 뒤집어 쓸 위기에 처해 있다(지만, 이 역시 그녀의 존재감을 방증하는 것이다). 게다가, 이 영화 주인공의 현재 애인이 스칼렛 요한슨이라니. 자세한 설명은 아직 건전한 예술적 활동이 창창이 남아 있는 내 미래를 고려하여 생략키로 하자.
여하튼, <아메리칸 셰프>는 인간의 기본적인 관심과 욕구를 모조리 충족시켜준다. 입과 귀와 눈이 즐겁다. 끊임없이 당신을 배고프게 만들고, 우리가 먹을 수 있는 존재라는 것에 대해 고마워하고, 즐길 수 있게 해준다. 동시에 우리가 음악을 듣고, 춤 출 수 있는 존재라는 것에 대해, 그리고 우리에게 ‘비록 실패할 지언정, 이성에게 호감을 품을 수 있다는 그 사실 자체만으로도 아름답고 가치 있는 것’이라 말한다.
훌륭한 애피타이저의 역할은 주요리를 더욱 기대하고, 더욱 즐기게 하는 것이다. 영화가 삶의 한 단편이라면, 훌륭한 영화의 역할은 삶이라는 주 요리를 더욱 흥겹게 즐기도록 하는 것이다. 이전 보다 조금 더 적극적으로 살게 하는 것이랄까.
쿠바 음악과 스페인어가 가득했던 이 영화를 보고 돌아오는 길에, 스페인어 학원에 들렀다. 다음 달 수강 일정을 확인하고 집에 와서는 혼자서 컴퓨터로 레벨 테스트를 받았다. 그리고 주인공이 미국 전역을 돌아다니며 팔았던 샌드위치를 만들어 먹었다. 모든 관객이 그렇듯, 어쩔 수 없이 삶을 소화해내야 하는 내게 <아메리칸 셰프>는 훌륭한 애피타이저였다. 물론, 소피아 베르가라도 한몫했지만 쓰다 보니 지나치게 자세히 기술 됐으니, 부디 잊어주시길. 엉엉. 이번에도 망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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단편소설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로 제10회 창비신인소설상(2010년)을 받으며 등단했다. 장편소설 <능력자> 제36회 오늘의 작가상(2012년)을 수상했고, 에세이집 <청춘, 방황, 좌절, 그리고 눈물의 대서사시>를 썼다. 60ㆍ70년대 지방캠퍼스 록밴드 ‘시와 바람’에서 보컬로도 활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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