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뜻대로 되진 않았지만 - <앤 소 잇 고즈>

그리고, 그렇게 흘러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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베를린의 가을은 참으로 적요하고, 쌀쌀하다. 한 시간만 있어도 누구나 쓸쓸해지고, 차분해질 정도다

 오늘은 무얼 쓸까 고민하며 텅빈 모니터를 오랫동안 바라 보았다. 아무 말이라도 써도 상관없는 칼럼이라지만, 그렇다고 정말 아무 말이나 쓸 수는 없는 노릇 아닌가. 게다가 가급적이면 개봉 영화에 관해 써야 독자들에게도 도움이 될 것이고, 그러므로 최대한 많은 영화를 봐서 추리고 추려 괜찮은 영화를 추천하자는 게 그간 나의 생각이었다. 비록 딴 길로 새서 헛소리를 할지라도 말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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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그러나 지난회에 밝혔다시피 나는 석달간 베를린에 체류하게 되었고, 그 때문에 개봉영화를 보는데 어려움을 겪고 있다. 우여곡절 끝에 독일어 더빙이 아닌 오리지널 버전(즉, 영어로 개봉하는 헐리우드 영화를 말한다)을 상영하는 극장을 찾았으나, 문제는 여기서 다시 발생한다. 한국의 개봉 시기와 독일의 개봉 시기가 달라서 여기서 아무리 개봉 영화를 찾아 본다한들, 한국에서는 도무지 ‘아니, 이게 무슨 영화야?’하고 의아해지는 상황이 발생하는 것이다.

 

 이런 고민을 2주 째 안고 있다가 그나마 한국에 개봉할 영화를 하나 찾았다. 제목은 <앤 소 잇 고즈 And So It Goes>. 뭐, 다, 그렇게 가는 거지, 라는 풍의 인생에 대해 초연한 느낌의 제목을 보는 순간, 어쩔 수 없이 이걸 봐야겠다고 생각했다. 마침 아침에 동명의 곡인 빌리 조엘의 <And so it goes>를 들었으니, ‘이게 무슨 우연인가’ 싶기도 했다.

 

 베를린의 가을은 참으로 적요하고, 쌀쌀하다. 한 시간만 있어도 누구나 쓸쓸해지고, 차분해질  정도다. 그 자연적인 상실감에 젖어 전철에 몸을 실었다. 그런데, 극장으로 향하던 전철이 갑자기 역과 역 사이의 지하 통로에 멈추더니 움직일 생각을 하지 않았다. 마침 지하철은 터널을 통과하던 중이라 문을 연다하더라도 지하의 컴컴한 벽 밖에 마주할 게 없는 상황이었다. 땅 속의 컴컴한 동굴 속에서 지하철은 20분을 멈춰있다가, 마침내 움직이기 시작했다. 말하자면, ‘그리고 그렇게 간 것이다’(And so it goes). 물론, 완벽히 맞아 떨어지는 뜻은 아니지만, ‘이 역시 무슨 우연인가’ 싶었다.

 

 지하에 갇혀 있던 탓에 상영시작 시간을 15분 지나 도착했다. 매표소 직원에게 지금이라도 들어갈 수 있느냐고 하니, 모니터를 한참 보더니 “으음.... 한 장?”하고 되물었다. 혹시나 관객들에게 방해가 될까 싶어 나는 조심스레 상영관 안에 들어 갔는데, 상영관에는 나를 제외하고 단 두 명만이 있을 뿐이었고, 아직도 광고가 상영되고 있었다. 마침내 영화를 볼 시간이 되자, 한 때 <원초적 본능>에서 수컷 중의 수컷의 냄새를 풍기던 마이클 더글라스가 주름이 잔뜩 진 얼굴로 화면에 나타났다. 그는 암으로 죽은 아내를 그리워하는 성미 고약한 노인으로 분하였는데, 갑자기 나타난 아들이 자신은 곧 감옥에 갇힐 신세라며 손녀 딸을 맡겼다. 물론, 마이클 더글라스는 자신에게 손녀가 있었다는 사실 조차 몰랐다. ‘아니, 인생은 어찌도 이리 한치 앞도 모르게 흘러갈 수 있단 말이야’라는 표정으로 마이클은 아들을 바라보면서 말하는데, 이때부터 ‘어디 인생 뿐인가? 영화도 한치 앞을 알 수 없다네’라는 듯이 극장 스피커에 문제가 생겨버려 소리가 나오지 않았다.

 

 그리고 마치 제목처럼, 그렇게 영화는 흘러갔다(And so it goes). 나와 두 명의 관객은 극장 스피커로 인해 뜻하지 않게 성대결절 환자처럼 입만 움직이고 있는 마이클 더글라스의 육성이 되돌아오길 기다리고, 기다렸다. 아시아를 대표한 나와, 유럽을 대표한 이들의 간절한 염원이 합해졌는지 마이클의 육성은 잠시 되돌아 왔으나 인생은 그렇게 호락하지 않다는 듯, 극장 스피커는 우리를 또 다시 침묵 속으로 몰아 넣었다.

 

 

 그 과정을 한 시간 가량 반복하다가, 나는 결국 극장을 나왔다. 매표소 직원은 “으음....원래  이렇지는 않은데...으음...”하며 티켓 값을 환불해주었다. 비록 어두운 지하 동굴 속에 몇 십분간 갇혔지만, 그리고 소리가 나오지 않는 영화의 줄거리를 이해해보려고 침묵 속에서 한 시간을 기다렸지만, 어쩐지 영화를 한 편 온전히 보고 나온 느낌이 들었다. 제목이 이미 모든 것을 말해주고 있었다. 오후 네 시의 베를린 시내는 쌀쌀한 바람이 불고 있었고, 바라던 바대로 되진 않았지만, 어쩌면 일생에서 중요할 수 있는 하루는 ‘그렇게 또 흘러가고 있었다’. 이 칼럼도 뜻대로 되진 않았지만, 제목처럼 때로는 ‘그리고… 그렇게 흘러가는 것’이다. 영화도, 일상도, 글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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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최민석(소설가)

단편소설 ‘시티투어버스를 탈취하라’로 제10회 창비신인소설상(2010년)을 받으며 등단했다. 장편소설 <능력자> 제36회 오늘의 작가상(2012년)을 수상했고, 에세이집 <청춘, 방황, 좌절, 그리고 눈물의 대서사시>를 썼다. 60ㆍ70년대 지방캠퍼스 록밴드 ‘시와 바람’에서 보컬로도 활동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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