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별도 잘못하지 않았어, <안녕, 헤이즐>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적 고민을 매끈하고 경쾌한 로맨스로 풀어내다
<안녕, 헤이즐>은 어떤 의미에서 충분히 예측 가능한 결말을 향해 정해진 방식으로 나아간다. 하지만 뻔해 보이는 이야기는 여전히 반짝 반짝 빛나고 잔잔한 감동으로 이어진다.
※ 영화의 결론이 포함되어 있습니다.
‘아프니까 청춘이다.’ 솔직히 싫어하는 명제다. 얼핏 위로가 되는 것 같지만, 곰곰 생각해 보면 왠지 무책임한 기성세대의 언어 같기 때문이다. 솔직히 삶을 감당하고 버텨 살아내야 하는 것은 모든 사람들의 숙제다. 때론 힘들지만 가끔은 웃고 행복하기도 하고, 싸우고 상처주고 받으면서도 여전히 살아야 하는 것이 평범한 사람들의 삶일 것이다. <안녕, 헤이즐>은 몸이 아픈 청춘의 이야기다. 물론 몸이 아파, 마음도 그만큼 아프다.
하지만, <안녕, 헤이즐>은 호들갑을 떨지 않는다. 짧은 삶을 살아야 하는 아이들을 동정하지도 않고, 훈계하지도 않는다. 그런 점에서 이 영화는 무척 영리하다. 묵직한 주제를 담고 있지만, 청춘 영화의 공식 속에 명민하게 죽음에 대한 이야기를 무겁지 않게 깔아두고, 울컥하는 눈물과 잔잔한 감동, 포근한 감성까지 놓치는 법이 없다. 언제 죽음을 맞이해야 할지 모르는 아이들이 여전히 그 나이 또래의 고민과 사랑을 겪으면서 훌쩍 자라는 성장담이며, 그리고 그런 아이들을 감싸는 부모들의 마음까지도 다독거린다. 그렇게 <안녕, 헤이즐>은 여전히 반짝 반짝 빛나는 청춘과 서로의 마음을 다독이는 풋풋한 사랑을 예찬한다.
말기 암환자인 헤이즐(셰일린 우들리)은 13살부터 암과 싸우며 산소통을 늘 곁에 두어야 하는 소녀다. 부모의 권유로 암환자 모임에 억지로 참석했다가 어거스터스(안셀 엘고트)를 만난다. 환한 미소가 매력적인 소년과 또래보다 성숙한 마음을 지닌 소녀는 너무 다른 취향을 가졌지만, 서로를 이해하면서 예쁜 사랑을 키워나간다. 헤이즐은 페터 반 후텐(윌렘 대포)의 소설을 감명 깊게 되풀이해 읽고, 그를 만나 소설 이후의 이야기를 듣는 것이 소원이다. 어거스터스 덕분에 암스테르담에 가게 되는 소원을 이룬 그들은 꿈에도 그리던 피터의 집으로 찾아간다.
명민한 관객이라면 대부분 예측했겠지만, 피터와의 만남은 예측을 벗어나는 충격이 된다. 그리고 소설의 결말에 대한 헤이즐의 과도한 집착이 보기 좋게 깨지면서 다시 한 번 각성하는 계기를 마련해 준다. 그런 점에서 ‘안네 프랑크의 집’ 장면은 헤이즐의 정신적 성장에 대해, 헤이즐과 관객들이 함께 겪어야 하는 초조하고 숨 막히면서도 동시에 극복 가능한 성장담이 된다. 안네 프랑크의 집에서 녹음된 목소리는 계속 이렇게 되뇐다. ‘그렇다고 하더라도 네가 삶의 일부분을 포기하지 않도록 하는 빛과 희망은 세상에 얼마든지 있다.’
<안녕, 헤이즐>은 어떤 의미에서 충분히 예측 가능한 결말을 향해 정해진 방식으로 나아간다. 하지만 뻔해 보이는 이야기는 여전히 반짝 반짝 빛나고 잔잔한 감동으로 이어진다. 마저 다 밝힐 수는 없지만 추도식과 사랑하는 사람을 떠나보내야 하는 슬픔, 그리고 잔잔한 감동은 도식적이지만 따뜻한 진심을 담고 있어 마음을 울컥하게 만든다. 그리고 죽음을 앞둔 아이들의 삶을 애써 포장하거나 미화하려하지 않는 덤덤한 화법은 신선하다. 헤이즐과 어거스터스가 데이트를 즐기는 해골 놀이터처럼, 이 영화는 죽음을 짊어지고 살아가는 사람들의 삶을 부정하지 않는다. 죽은 후 망각으로 누군가의 기억 속에서 지워지는 것도 받아들이라고 말한다.
그리고 헤이즐이 그토록 존경해 마지않던 작가조차도 스스로의 상처를 극복하지 못한 알코올중독자 찌질이일 수 있다는 것도 인정한다. 그리고 자신이 죽고 난 후 살아남은 사람들이 제대로 살 수 있기를 바라는 헤이즐의 과도한 집착이, 죽은 자를 기억하기 보다는 살아남은 사람들이 제대로 살아갈 수 있도록 위로해줘야 한다는 성찰로 이어지는 극의 구성은 단순한 청춘 영화 이상으로 삶에 대한 성찰로 이어진다.
전작 <스턱 인 러브>를 통해 다양한 사랑의 모습을 보여준 조쉬 분 감독은 자신의 장점을 살려, 원작 소설의 철학적 고민은 조금 덜어내고 예쁜 청춘의 로맨스에 방점을 찍는다. 그리고 그 전략은 성공적이다. 1,200만 불의 제작비를 들인 영화는 북미에서만 1억2천만 불의 흥행 수익을 내면서 21세기의 대표적 청춘 영화로 부상했다. 당연히 청춘영화 이상의 무언가를 기대하는 관객에겐 실망스러울 수 있지만, <안녕, 헤이즐>은 타깃이 분명하고 그 타깃에게 어떤 이야기와 감동을 줄 수 있을 것인지 충실하게 계산된 영리한 영화다. 그리고 영화는 말한다. 아프니까 청춘이지, 라는 기성세대의 언어를 사용하는 멘토 대신, 실연당한 친구를 위해 계란을 준비하는 친구가 더 소중하다는 것을, 그리고 이 영화가 너의 친구가 되어줄 것이라고. 그리고 그 소박한 마음은 통했다.
원작 소설 <잘못은 우리별에 있어 The fault in our stars>
로맨스 영화에 재능이 있는 조쉬 분 감독의 연출과 보기만 해도 흐뭇해지는 셰일린 우들리, 안셀 엘고트라는 예쁜 배우들 덕분에 영화는 빛나지만, <안녕, 헤이즐>이 가장 감사해야 할 사람은 원작가 존 그린이다. 자칫 신파에 빠지기 쉬운 이야기를 기막힌 청춘의 성찰로 끌어가는 건 존 그린의 원작에 힘입은 바 크다. 삶과 죽음에 대한 철학적 고민을 매끈하고 경쾌한 로맨스로 풀어내는 작가의 빼어난 문구들은 영화가 자칫 유치해지는 순간, 영화 속 명대사가 되어 관객들의 마음을 움직인다. 담배를 물고만 있는 소년, 언제 죽을지 모르는 자신을 폭탄이라고 생각하는 소녀의 캐릭터도 입체적이고, 소박한 이야기 속에 삶의 성찰을 담아내는 문장들이 감탄스럽다.
원작 소설의 제목인 <The fault in our stars>는 셰익스피어의 희곡 <줄리어스 시저>에서 인용한 문구다. 시저의 암살 음모를 주도한 캐시어스는 ‘잘못은 우리 운명에 있는 게 아니라 우리 스스로에게 있다네’라고 말한다는 것에서 인용하였다. 개인에게 닥치는 행운과 불운이 운명의 탓이 아니라, 결국 본인이 과거에 내린 결정에서 비롯된다는 뜻이다. 원제를 <잘못은 우리별에 있어>로 번역한 한국어 제목은 매력적인 의역이지만, 결국 존 그린은 원작을 통해 우리의 삶의 변수는 운명의 탓이 아닌, 개인의 선택에 대한 것이라고 말한다.
아마 국내 개봉영화에서 <잘못은 우리별에 있어>라는 근사한 제목 대신 <안녕, 헤이즐>이라는 심심한 제목을 선택한 이유도 여기에 있을 것 같다. 원작소설 <잘못은 우리별에 있어>는 뉴욕타임스, 월스트리트저널, 아마존닷컴 등 영향력 있는 여러 매체를 통해 2012년 최고의 소설로 손꼽혔다. 영화가 미처 품어내지 못한 더 매력적인 이야기는 책으로 꼭 확인해 보길 권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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늘 여행이 끝난 후 길이 시작되는 것 같다. 새롭게 시작된 길에서 또 다른 가능성을 보느라, 아주 멀리 돌아왔고 그 여행의 끝에선 또 다른 길을 발견한다. 그래서 영화, 음악, 공연, 문화예술계를 얼쩡거리는 자칭 culture bohemian.
한국예술종합학교 연극원 졸업 후 씨네서울 기자, 국립오페라단 공연기획팀장을 거쳐 현재는 서울문화재단에서 활동 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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