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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아,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힐스보로의 진실과 세월호의 기적을 위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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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 날 일어난 일은 잘못되었다. 정부를 대표하여, 국가를 대표하여, 이러한 이중 불의(double injustice)가 바로잡아지지 않은채 너무나 오랜 시간이 흐른 것에 깊이 사과한다. 이 나라의 많은 사람들은 머지사이드의 사람들이 어떤 일을 겪어왔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끔찍하게 목숨을 잃은 대가는 오히려 그들을 사고의 주범으로 몰아세운 것이었다.”

나는 고등학교 때 연애를 해본 적이 없다. 내가 매력이 없었기 때문이라고 생각할 수도 있지만, 당시의 나는 공부에 열중하느라, 즉, 공부와 연애하느라 여자 친구를 사귈 시간이 없었다. 물론, 이런 내 주장을 귀담아 듣는 사람은 많지 않은 것 같다. 이과생임에도 불구하고 나와 가장 친밀했던 아이는 언어 영역이었다. 그렇다고 책을 많이 읽는 편도 아니었고 그저 언어 영역 문제들을 매일 신나게 풀 뿐이었다. 어쩌면 내 인생에서 가장 집중적인 독서를 했던 때가 바로 이 시기라고도 할 수 있다. 그때 밤을 새며 읽어내려갔던 수많은 문학 작품 중에 만해 한용운님의 시 한 편이 떠오르는 오늘이다.

님의 침묵

님은 갔습니다. 아아, 사랑하는 나의 님은 갔습니다.
푸른 산빛을 깨치고 단풍나무 숲을 향하여 난 작은 길을 걸어서 차마 떨치고 갔습니다.
황금의 꽃같이 굳고 빛나던 옛 맹서는 차디찬 티끌이 되어서 한숨의 미풍에 날아갔습니다.
날카로운 첫 키스의 추억은 나의 운명의 지침을 돌려 놓고 뒷걸음쳐서 사라졌습니다.
나는 향기로운 님의 말소리에 귀먹고 꽃다운 님의 얼굴에 눈멀었습니다.
사랑도 사람의 일이라 만날 때에 미리 떠날 것을 염려하고 경계하지 아니한 것은 아니지만, 이별은 뜻밖의 일이 되고 놀란 가슴은 새로운 슬픔에 터집니다.

.....

[출처: KBS] 

2014년 4월 16일, 인천에서 출발해 제주도로 향하던 여객선 ‘세월호’가 진도 해상에서 침몰했다. 탑승객 476명중 174명밖에 구조되지 못했고, 나머지 300여명은 실종 혹은 사망. 더 가슴을 아프게 한 것은 그 안에 수학여행을 온 단원 고등학교 학생들이 대거 포함되어 있었다는 점이었다. 사고가 났을 때 누구보다 승객들을 챙겨야했을 선장은 가장 먼저 배에서 나와 구조되었고, 대피 방송은 커녕 '움직이지 말라'는 방송으로 인해 탑승객의 대부분은 탈출 시도도 하지 않은채 꼼짝없이 배와 함께 가라앉아 버렸다.

매일 아침 실낱같은 희망을 걸고 구조된 사람의 숫자를 확인했지만 늘어나는 것은 원치 않은 사망자의 수뿐이었다. 희박한 가능성에도 불구하고 단 한 명의 생존자라도 구하고자 찬 바다로 뛰어드는 민관경 잠수사들의 노력이 부디 결실을 맺길 바라는 간절한 마음. 아마도 국민 모두의 바람이 아닐까. 어딘가에선 침몰한 배 안에서 빠져나오지 못한 이들이 있고, 그 가족은 슬픔에 오열하고 있음을 알고 있기에, 아스날이 오랜만에 시원한 3-0 승리를 한 주말마저도 그저 침통한 심정이었다. 이런 상황 속에서 평상시처럼 축구 얘기를 꺼내기란 참 어려웠다. 그저 공놀이로만 보이는 축구에서도 수많은 사상자를 낸 커다란 사건사고들이 있었고, 오늘은 그 중 하나를 소개해보려고 한다.

[출처: BBC 파노라마 힐스보로] 

96명이 목숨을 잃고 766명이 부상을 당하면서 잉글랜드 스포츠 역사상 최악의 사고로 기록된 ‘힐스보로 참사

참사의 시작은 아주 사소한 일이었다. 사고가 있기 몇 개월 전, 셰필드의 한 젊은 경찰관이 복면을 쓴 무장 강도들에게 머리에 총구가 향해진 채로 바지가 벗겨져서 사진을 찍히는 일이 있었다. 이 일은 동료 경찰관의 장난으로 드러났지만 해당 경찰관은 큰 수치심을 느꼈고 이에 불평을 제기하면서 공식적인 조사가 이뤄졌다. 결과적으로 4명이 해고되었고, 2명이 좌천되었으며, 2명은 벌금이 부과되었다. 총경이었던 브라이언 몰은 이 일에 아무런 관계가 없었지만 책임을 지고 다른 지역으로 떠나게 되었고, 그의 자리를 대신하게 된 새 총경은 축구 경기장에서 관중 통제를 해본 경험이 전혀 없는 데이비드 더큰필드였다.

[출처: 30 for 30 Soccer Stories] 

1989년 4월 15일, 리버풀과 노팅엄 포레스트의 FA컵 준결승전이 셰필드 웬즈데이의 홈구장인 힐스보로에서 열렸다. 당시의 경기장은 입석이 많았고, 내부에는 팬들의 충돌을 막기 위해 철제 구조물로 구역을 분리하고 있었다. 경기 당일, 수많은 리버풀 팬들은 자신들의 구역인 ‘레핑스 레인’으로 모이기 시작했다.

오직 작은 회전문을 통해 경기장 안으로 입장할 수 있었기에 입장 속도는 매우 더뎠다. 킥오프 시간이 임박했지만 경기장 밖에서 미처 들어오지 못한 팬들의 수가 점점 늘어났다. 제 시간 내에 입장이 완료되지 않으면 킥오프도 지연되는 탓에, 어쩔 수 없이 경찰은 인파 해소를 위해 일반적으로 경기가 끝난 후 관중의 퇴장을 위해 열던 게이트 C를 열었다.

[출처: BBC] 

문제는 이미 경기장 안쪽 중앙 구역은 수용인원을 꽉 채운 상태였다는 것. 그렇기 때문에 사람들을 측면으로 입장시켜야 했지만 새로 부임한 데이비드 더큰필드로부터 그런 지시는 전혀 내려오지 않았다. 앞의 상황을 전혀 모르는 사람들은 활짝 열린 게이트를 지나 피치를 향해 물밀듯이 전진했고, 중앙 구역의 수용인원은 기준치의 두 배를 넘어섰다. 끝없이 사람들의 압력은 더해지기만 했고 일부는 담장을 넘어 옆 구역으로 넘어갔지만, 앞쪽에 먼저 들어와있던 사람들은 철책과 인파 사이에서 무참히 짓눌릴 뿐이었다.

[출처: 30 for 30 Soccer Stories] 

뒤늦게 사태의 심각성을 파악한 경찰은 킥오프 6분만에 경기를 중지시켰다. 힘겹게 열린 철책의 작은 문으로 사람들은 겨우 빠져나올 수 있었고, 압력에 질식한 사람들을 업고 나와 피치 위에서 심폐소생술을 하기 시작했다. 그러나 대다수의 경찰들은 리버풀 팬과 노팅엄 포레스트 팬의 혹시 모를 충돌을 막는다는 이유로 그저 일렬로 늘어서있을 뿐이었다. 이 사고로 당일에 93명이 사망했고, 2명이 병원에서 며칠간의 사투끝에 숨을 거두었으며, 1명은 4년간 혼수 상태로 있다가 결국 생명 유지장치를 떼면서, 총 96명의 사망자를 낳았다.

[출처: 30 for 30 Soccer Stories] 

리버풀팬들은 현재까지도 잉글랜드의 일간지 ‘더 선’과 유난히 사이가 나쁜데 그 계기도 힐스보로 참사였다. 이 사고가 있은 후 며칠 뒤, ‘더 선’은 ‘진실(The Truth)’이라는 제목으로 보도를 내보냈다. 내용인즉슨, 술에 취한 수백명의 리버풀팬들이 티켓없이 경기장에 매우 늦게 도착해서는, 닫혀있던 게이트를 강제로 열고 들어와 사고가 발생했다는 것이었다. 또한, 부상자들에게 심폐소생술을 하던 경찰을 향해 폭력을 휘두르고, 소변을 갈겼으며, 쓰러진 사망자들의 주머니를 털고 있었다는 내용도 있었다. 그리하여 사건의 희생자들은 가해자가 존재하지 않는 사고사처리 되었고, 힐스보로의 통제를 책임지고 있던 데이비드 더큰필드 총경에게 책임을 묻는 기소조차 증거부족으로 기각되었다.


(관계자들의 진술서들을 비롯하여 힐스보로 보고서의 모든 내용은 온라인으로 자유롭게 열어볼 수 있다.)
[출처: 30 for 30 Soccer Stories, 힐스보로 보고서

그리고 23년이 지난 후, 잃어버린 명예와 정의를 되찾기 위해 유가족들의 요청으로 구성된 ‘힐스브로 독립 패널’은 힐스보로 참사 피해자들의 무고함을 증명할 새로운 증거들을 찾아냈다. 이들이 발표한 45만 페이지에 달하는 보고서에는 사고 상황을 목격했던 경찰들의 증언 164개가 임의로 수정된 부분과 당시 적절한 치료를 받았다면 40여명이 목숨을 구할 수 있었던 정황 등의 내용이 포함되었다.

2012년 9월, 데이비드 캐머론 잉글랜드 총리는 유가족들에게 공식적으로 사과한다.
“그 날 일어난 일은 잘못되었다. 정부를 대표하여, 국가를 대표하여, 이러한 이중 불의(double injustice)가 바로잡아지지 않은채 너무나 오랜 시간이 흐른 것에 깊이 사과한다. 이 나라의 많은 사람들은 머지사이드의 사람들이 어떤 일을 겪어왔는지 이해하지 못한다. 사랑하는 사람들이 끔찍하게 목숨을 잃은 대가는 오히려 그들을 사고의 주범으로 몰아세운 것이었다. 많은 나라에서 훌리건에 대해 명확하지 않게 바라보고 있음에도, 이 날의 보고서는 흑백 논리로 씌여졌다. 리버풀 팬들은 참사의 원인이 아니었다.”

많은 이들의 가슴에 상처를 낸 힐스보로 참사는 아이러니하게도 잉글랜드 축구계를 새로운 시대로 나아가게 하는 계기가 되었다. 1994년부터 프리미어 리그에서 입석은 사라졌고, 음주는 금지되었으며, 이에 맞게 경기장들은 보수되거나 새로이 지어졌다. 그리하여 오늘날의 수준 높은 프리미어 리그를 안전하게 관람할 수 있는 축구 문화가 형성 된 것이다. 이 과정 속에서 누군가의 슬픔과 눈물이 없었다면 더 좋았으련만...

[출처: 30 for 30 Soccer Stories] 

2014년 4월 13일, 리버풀의 홈구장인 안필드에서 리버풀과 맨체스터 시티의 경기가 펼쳐졌다. 이 날은 힐스보로 참사 25주년을 기념하여 96명의 희생자들을 추모하기 위해 96개의 관중석을 비워놓기도 했다. 이 마음을 하늘에서 듣기라도 한 것일까. 리버풀은 3-2의 극적인 승리를 거두며 1990년 이래로 첫 프리미어 리그 우승에 한 발 더 다가갔다. 아직 시즌은 끝나지 않았고 우승의 향방은 알 수 없지만, 리버풀이 정말로 이번 시즌에 우승을 차지한다면 그들에게 참 뜻깊은 일이 될 것 같다. 아스날팬인 나로서는 여전히 그리 달가운 일이 아니지만 말이다.

어느새 세월호가 침몰한 지도 일주일이다. 애타게 기다리는 생존자는 나오지 않고 있고, 연일 뉴스에서는 세월호를 둘러싼 각종 의혹과 불편한 소식들만 이어지고 있다. 커다란 참사에서 책임 규명을 하는 것도 중요하고, 이런 혼란을 자신의 기회로 삼는 이들을 제재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가장 중요한 것이 결여되어 있다. 그 누구보다 가슴 아파하고 상실감으로 힘들어하고 있는 피해자 가족들을 향한 따뜻한 시선은 어디있는가? 이들에게는 더 많은 관심과 사랑이 필요하다.

내가 언어 영역과 연애하던 시절, 그 시절을 보내고 있던 학생들이 아직까지 물 속에서 나오지 못하고 있다. 즐거운 추억으로 가득해야할 수학여행이 끔찍한 비극이 될 줄 누가 알았을까. 너무 늦어버린 구조 활동으로 생존자를 기대하기는 갈수록 어려워지고 있지만, 나는 마지막까지 작은 희망을 놓을 수 없다. SNS에 ‘노란 리본’ 캠페인이 확산되고 있는 것을 보면 나와 같은 마음을 품은 사람들이 아직 이 세상에는 많은 것 같다. 유명 연예인들과 스포츠 선수들도 선뜻 기부에 나서며 한 마음으로 세월호로부터 좋은 소식이 들려오길 기다리고 있다. 아스날의 센터백인 페어 메르테사커도 트위터를 통해 직접 한글로 '기적을 빕니다' 라고 남기며 뜻을 같이했다. 기적이라는 것이 정말 있다고 믿고 싶다. 단 한 명이라도 좋으니까 부디 살아 돌아오기를.

[출처: 페어 메르테사커 트위터] 

마지막으로, 세월호에서 미처 빠져나오지 못한 모든 이들을 위해 앞에서 읊조리던 ‘님의 침묵’ 뒷부분을 바치고 싶다.

.....

그러나 이별은 쓸데없는 눈물의 원천을 만들고 마는 것은 스스로 사랑을 깨치는 것인 줄 아는 까닭에 걷잡을 수 없는 슬픔의 힘을 옮겨서 새 희망의 정수박이에 들어부었습니다.
우리는 만날 때에 떠날 것을 염려하는 것과 같이 떠날 때에 다시 만날 것을 믿습니다.
아아, 님은 갔지마는 나는 님을 보내지 아니하였습니다.
제 곡조를 못 이기는 사랑의 노래는 님의 침묵을 휩싸고 돕니다.
교정 : @yesdomo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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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hungarida

음악과 미술을 사랑하는, 주변에 흔한 보통의 서울 남자. 아스날과 12년째 연애중. 트위터 아스날 가십(@AFC_Gossip)에서 아스날 소식을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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