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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스날, 왜 나는 너를 사랑하는가

나는 아스날과 연애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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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렇다. 나는 축구팬, 12년째 아스날과 연애중이다. 90분짜리 공놀이에 천국과 지옥을 오가며, 그 결과에 일주일의 희로애락이 좌지우지되는, 이 스펙타클하고도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연애질은 여전히 현재 진행중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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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UEFA Champions League Magazine] 

보통 제야의 타종 소리를 들으며 한 해를 마감하고 또 시작을 하지만 나에게 1년의 시작은 8월의 프리미어 리그 개막일이며, 그 끝은 종소리가 아닌 5월의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이다. 그렇다. 나는 축구팬, 12년째 아스날과 연애중이다. 90분짜리 공놀이에 천국과 지옥을 오가며, 그 결과에 일주일의 희로애락이 좌지우지되는, 이 스펙타클하고도 도무지 종잡을 수 없는 연애질은 여전히 현재 진행중이다.

인생에서 자신의 삶을 변화시키는 누군가를 만나는 일은 쉽지 않다. 어떤 사람들은 마치 운명처럼 서로를 알아본다고 말하지만 내 삶에서 그런 만남들은 매우 일상적이었고 평범하며 전혀 극적이지 않았다. 아스날과 나의 만남도 그러했다. 2002년의 어느 새벽, 이라하면 왠지 한일 월드컵에 대해 미주알 고주알 꺼내 놓았을 것 같지만, 그것과는 전혀 무관하게 나는 집에서 한창 시험공부를 하고 있었고 잠깐 쉴 생각으로 거실로 나와 TV를 틀었다. 그리고 평소와 다를 바 없이 이리저리 채널을 돌리다가 발견한 축구 중계. 유럽 팀들의 경기였다. 당시에도 축구는 좋아했지만 우리나라 대표팀 경기나 봤지 외국 선수들은 잘 모를 뿐더러 관심도 없었다.

따로 재미있는 볼거리도 없는 것 같고, 별 생각없이 소파에 누워서 경기를 보기 시작했는데.. 이게 은근히 재밌다? 그동안 본 적 없는 빠르고 화려한 축구. 내 앞에 신세계가 펼쳐졌다. 그 팀이 바로 아스날이었고 이 날을 계기로 내가 아스날 팬이 되어 지금까지 이어져왔다 …고 말할 수 있었다면 참으로 쓸만한 이야깃거리가 되었겠지만, 다시 말하는데 내 인생은 그렇게 극적이지 않았다. 희미한 기억으로 미루어 하얀 유니폼이었으니 아마도, 축구 스타들이 즐비했던 ‘갈락티코’ 레알 마드리드가 아니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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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Arsenal Legends = Thierry Henry] 

어쨌든 이날 이후, 나는 새벽마다 축구 경기를 찾아 TV 채널을 돌리게 되었고 어찌된 일인지 프랑스의 스트라이커 티에리 앙리에게 빠져버렸다. 그에 대한 관심은 곧 자연스레 그의 소속팀인 아스날 경기를 찾아보게 만든 것이다. 앙리가 공만 잡으면 상대 수비진을 가볍게 휘저으며 돌파해 들어갔고, 빠르고 정확한 슈팅은 여지없이 골망을 흔들었다. 그리고 이어지는 앙리 특유의 차분한 세레머니. 전율에 의해 소름이 돋는다면, 바로 앙리가 그랬다. 그렇다. 사실, 내가 이 지긋지긋한 연애를 시작하게 된 계기는 다 앙리 때문이다. 묘하게 거만한 표정, 긴 팔다리, 그리고 매력적인 뒷통수까지. 처음 사랑에 빠진 이들이 그러하듯 앙리의 모든 것들이 다 멋있었다.

이듬해 여름, 2003-04 시즌이 시작되자 본격적으로 아스날 경기를 챙겨보게 되었다. 스스로 ‘팬질’이라고 부를 수 있는 첫 시즌. 웬걸, 아스날은 1년동안 무려 38경기가 치뤄지는 리그에서 단 한 경기도 패하지 않은 채로 잉글랜드에서 전무후무한 무패우승을 차지했다. 한 골을 먹히면 세 골을 넣을 듯한 기세로 상대편 진영을 향해 마구 뛰어들어가던 ‘두두다다’ 공격 축구. 절대 질 것 같지 않은 그 느낌이 당시에는 너무나 당연했다. 왜냐하면 그것이 아스날이었으니까. 아스날을 두고 아름다운 축구를 한다며 칭찬하는 얘기들이 많았지만 내가 아스날을 좋아한 이유는 아름다워서가 아니라 강해서였다.

스포츠 팬들 중에 ‘언더독’, 즉 2인자를 응원하고 그들이 1인자를 뛰어넘는 드라마틱한 스토리를 좋아하는 사람들이 있지만 나는 여지없이 챔피언이 좋다. 두 팀이 치열하게 승부를 벌이는 아슬아슬한 경기보다 내가 응원하는 팀이 압도적으로 지배하는 경기다 좋다. 내가 처음 사랑에 빠진 아스날이 그러했다. 이 즐거운 시간이 영원히 지속될 것임을 믿어 의심치 않은채. 허나, 그 누가 알았을까. 바로 이듬해인 2005년의 FA컵 트로피를 마지막으로 8년 동안 그 어떤 대회 트로피도 들지 못하면서 무관(無冠)의 제왕 노릇을 하게 될 줄이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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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BBC Match of the Day] 

사실은 아스날에 많은 일들이 있었고 나름의 이유들이 있었다. 그 중에서 가장 커다란 계기는 장기적인 관점으로 더 밝은 미래를 그리기 위해, 작고 낡은 기존의 하이버리 구장을 떠나 새로운 홈구장인 에미레이츠 스타디움(애쉬버튼 그로브)을 짓기로 한 것이었다. 공사에 필요한 자금 마련을 위해 우승을 차지했던 선수들을 팔고 그 자리에 어린 유망주들로 팀이 채워졌다. 자연스럽게 팀은 약해지고 차차 우승권에서 멀어진 것이다. 또한, 하필 그 시기에 슈가대디 라고 불리우는 억만장자 구단주를 등에 업은 첼시와 맨체스터 시티가 무한의 자금을 들고 리그에 등장했고 아스날로서는 더욱 불운이었다. 선수를 데려올 수 있는 이적시장마다 라이벌 팀들은 좋은 선수를 영입하고 팀을 강화하는 달콤함을 맛보고 있을 때, 아스날은 긴축 재정으로 인해 오히려 주전 선수를 팔아 재정을 충당해야 하는 쓰디 쓴 자본주의를 목격해야만 했다.

속이 쓰리고 자존심이 상했다. 내가 처음 알던 아스날은 이런 것이 아니었는데. 머리로는 상황을 이해하고 있지만 도저히 가슴으로는 받아들여지지 않는 것이었다. 그때 그 선수를 샀더라면, 그때 그 선수를 팔지 않았더라면, 그때 그 경기를 이겼더라면, 차라리 새 경기장을 짓지 않았더라면... 지금 아스날의 현재는 많이 달랐을텐데. 어쩌면 맨유가 아니라, 첼시가 아니라, 바로 아스날이 트로피를 들고 있었을텐데. 의미없는 가정의 연속.

축구팀을 응원하면서, 아니, 아스날과 연애하면서, 즐거운 일이 더 많아야 하는데 오히려 스트레스만 받고 답답하고 화나고.. 특히 라이벌 팀을 상대로 패배하는 날에는 주변에서 조롱과 위로의 연락들이 쏜살같이 날아든다. 문자 그대로 아스날에 따라 희로애락이 좌지우지되는 셈이다. 누군가가 물었다. “그렇게 짜증나면 응원하는 팀을 바꾸는 것은 어때?” 이 질문에 대한 답은 아스날 팬으로 유명한 닉 혼비의 『피버피치』 에서 찾을 수 있다.
“스윈든 전 이후, 나는 적어도 축구에 있어서 충성심이라는 것은, 용기나 친절 같은 도덕적 선택이 아님을 알게 되었다. 그것은 사마귀나 혹처럼 일단 생겨나면 떼어낼 수 없는 것이다. 결혼도 그 정도로 융통성 없는 관계는 아니다. 바람을 피듯이 잠깐 동안 토튼햄을 기웃거리는 아스날 팬은 단 한사람도 없다. 축구팬에게도 이혼이 가능하기는 하지만(사태가 너무 심해지만 경기장에 가는 것을 그만둘 수는 있다.) 재혼은 불가능하다. 지난 23년동안 아스날로부터 도망칠 궁리를 했던 적도 많았지만, 그럴 방법은 전혀 없었다. 창피스럽게도 (스윈든, 트랜미어,요크, 월솔, 로더햄, 렉스햄을 상대로) 패배할 때마다, 인내와 용기와 자제심을 총동원하여 참아내는 수밖에 없다. 달리 할 수 있는 일은 아무것도 없으며, 그 사실을 깨닫는 순간 우리는 불만으로 가득 차 몸을 비틀 따름이다.”

실제의 연애에서는 사귀던 여자친구와 헤어지게 되면 나중에 다른 여자, 더 좋은 여자를 만날 수도 있다. 그러나 축구팀과의 연애는 다르다. 어떤 이유로든 한 번 성립된 관계는 영원히 지속된다. 그것이 너무 지치고 힘들어서 멀어질 수는 있지만 결국 이 팀과 끝까지 함께하는 것이다. 실은 그 부분이 이 연애의 멋이기도 하다. 실제로 경기장을 가본 적도 없고 선수들을 본 적도 없다. 그저 TV를 통해 접하게된 우연한 계기로 내 삶에 새로운 사랑이 싹이 튼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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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출처: BBC Match of the Day] 

끝이 보이지 않던 아스날의 암흑기에서 다시 빛이 보이기 시작한 것은 작년 초였다. 아스날이 에미레이츠 스타디움을 지으면서 안고있던 단기 부채들이 대부분 해결되면서 이제 재정적으로 숨통이 트였다는 것이다. 다가오는 여름에 아스날은 큰 돈을 투자할 수 있고 스타 플레이어들을 영입해서 다시 챔피언에 도전할 것이라는 언론의 보도와 아스날이 유럽 클럽들 중에서 가장 많은 현금을 보유하고 있다는 통계. 2012-13 시즌도 우승은 이미 한참 멀어진 채로 끝을 향해 가고 있었지만 미래에 대한 새로운 희망으로 부풀었고 조금은 식어버린, 지쳐버린 나의 연애 감정도 다시 불붙을 준비가 되어있었다.

그렇게 기대를 모은 2013년 여름 이적시장, 아스날의 공격을 이끌 새로운 스트라이커 영입은 실패했지만, 구단 역사상 최고액인 £42.5m(약 750억원)의 거금을 들여 독일 국가대표이자 레알 마드리드에서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골을 만들어냈던 미드필더 메수트 외질을 영입했고, 과거에 팀을 떠났던 마티유 플라미니가 돌아왔다. 기대했던 것보다는 한참 못 미치는 선수 보강이었지만, 기존 선수들의 성장과 더불어 시너지 효과가 나타난 것일까? 아스날은 새로운 시즌, 놀랍게도 시즌 전반기 대부분의 시간을 리그 1위로 보냈고 현재까지 승점 1점 차이로 맨체스터 시티에 이어 2위를 달리고 있다.

정말 이번 시즌에는 아스날이 8년 무관의 고리를 끊고 트로피를 들 수 있을까? 아직 수면 위로 드러나지 않은 잠재된 선수들의 혹사 문제와 겨울 이적시장의 선수 영입 실패로 기대보다는 우려가 앞서는게 사실이다. 지금까지 드러난 팀의 약점과 주전 선수들의 부상으로 생긴 공백들을 새로운 영입으로 보강하고 시즌 후반기에 앞으로 달려나갈 원동력을 얻었다면 얼마나 좋았을까? 이런 움직임이 확실한 우승에 대한 보증은 하지 못하더라도 트로피에 한 걸음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지 않았을까? 10년 넘게 유럽 톱레벨에서 감독을 해온 아르센 벵거의 안목이 나보다 뛰어나겠지만 이 불만과 안타까움을 누가 알아주랴. 결국 아스날과 사랑에 빠져버린 내 탓이다. 그러나 이렇게 불평을 쏟아내다가도 주말이 되면 아스날 경기 시간에 맞춰 나는 또다시 TV 앞에 앉는다. 지난 주 5-1의 대패를 당한 리버풀을 영국 축구협회가 주최하는 FA컵에서 또다시 상대한다. 오늘 밤은 평화롭게 잠들 수 있을까? 이 연애, 도저히 쉽지가 않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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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hungarida

음악과 미술을 사랑하는, 주변에 흔한 보통의 서울 남자. 아스날과 12년째 연애중. 트위터 아스날 가십(@AFC_Gossip)에서 아스날 소식을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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