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네 마리 토끼를 좇는 모험

아스날과의 도전적이고 목표지향적인 연애에 대하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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새로운 시즌이 시작되면 우리에게는 네 가지 지상 과제가 주어진다. ‘프리미어 리그’, ‘챔피언스 리그’, ‘FA컵’, ‘리그컵’. 우리의 사랑이 한결같이 뜨겁지 않고, 늘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 끊임없이 오르내리는 이유는 바로 이것들 때문이다.

우리의 연애는 특별하다. 남들의 눈에 어떻게 비치든 상관없다. 나에게는 더없이 사랑스럽고 세상에서 단 하나 밖에 없는 존재. 그래서 나의 사랑은 올곧고 정직하며 진실하다. 그 대상이 사람이든, 축구팀이든. 다행인지 불행인지 나에게는 아직 사랑하는 이가 없는 덕택에, 바다 건너 지구 반대편에 있는 아스날이 온전히 내 사랑을 듬뿍 받고있는 중이다. 비록 멀리 떨어져있지만 이 축구팀 덕분에 나는 외로움을 느낄 새가 없다. 그래서 내게 여자 친구가 생기지 않는 것일까. 그것은 조금 걱정이다.

누군가와의 연애와 다르게 축구팀과의 연애는 도전적이고 목표지향적이다. 매년 8월, 새로운 시즌이 시작되면 우리에게는 네 가지 지상 과제가 주어진다. ‘프리미어 리그’, ‘챔피언스 리그’, ‘FA컵’, ‘리그컵’. 우리의 사랑이 한결같이 뜨겁지 않고, 늘 냉정과 열정 사이에서 끊임없이 오르내리는 이유는 바로 이것들 때문이다. 나와 사랑에 빠진 클럽이 우승과는 거리가 먼 중하위권 팀이라면 적당한 성적에도 행복할 수 있을 것 같은데, 아스날은 그렇지가 않다. 우리는 유럽 최고의 축구 클럽을 꿈꾼다. 그러므로 모든 대회에서 우승이 목표다. 여기에서 발생하는 우리의 문제는 이상과 현실 사이에서 그 차이가 매우 크다는 것. 매우.

출처: Setanta 1, UEFA Champions League Magazine, itv Sport, Direkte

소위 ‘빅클럽’이라고 불리는 클럽들은 몇 년에 한 두 개씩 작은 트로피라도 들어올리는데, 아스날은 8년째 손가락만 빨고 있다. 이상은 높지만 현실은 참담하니 불만만 계속 쌓여간다. 올해는 다를거야. 아니, 내년은 다를거야. 도대체 언제쯤 좀 다를까. 기세좋게 새 시즌을 시작하지만 딱 그때뿐이다. 차차 힘이 빠져서 시즌이 끝날 쯤에는 모든 대회에서 탈락하고 리그 4위 언저리에서 방황하다가 간신히 턱걸이로 마무리. 결론은 무관(無冠). ‘프리미어 리그’, ‘챔피언스 리그’, ‘FA컵’, ‘리그컵’ 네 마리의 토끼를 쫓다가 결국 다 놓치는 격이다. 그것이 지난 8년간 반복된 우리의 이야기. 2006년 4위를 시작으로 2007년 4위, 2008년 3위, 2009년 4위, 2010년 3위, 2011년 4위, 2012년 3위, 2013년 4위. 이 추세로 볼 때 아마 올해의 프리미어 리그는 3위로 마치게 되는 것일까. 이제는 이 지겨운 굴레에서 벗어나고 싶다. 아래로 말고 위로.

올해의 네 마리 ‘토끼 사냥’은 얼마나 잘하고 있나. 일단, ‘리그컵’ 토끼는 벌써 놓쳤다. 작년 10월에 첼시를 만나 일찌감치 탈락. 괜찮다. 가장 작은 토끼고 사냥에 성공해도 그리 인정받지 못하니까. 우리의 목표는 더 높은 곳에 있고 작은 것에 연연하지 말자며 스스로를 위로한다. 무엇보다도 아직 토끼가 세 마리나 남아있잖아? 그런데 가장 덩치가 큰 ‘챔피언스 리그’ 토끼도 놓치기 직전이다. 16강 1차전에서 바이에른 뮌헨에 2-0으로 패했고, 아직 2차전이 남아있지만 냉정하게 우승은커녕 뮌헨을 넘는 것조차 어려워보인다. 그럼 현실적으로 두 마리 토끼가 남는다.

출처: BBC Match of the Day

가장 중요한 ‘프리미어 리그’ 토끼. 최상위 네 개팀이 치열하게 경쟁하고 있는 중이다. 첼시, 리버풀, 아스날이 28경기를 치렀고, 맨체스터 시티는 26경기 밖에 아직 하지 않아서 절대 비교는 조금 어렵지만, 일단 첼시가 1위. 맨체스터 시티의 기세를 볼 때 아마도 밀린 두 경기를 이긴다고 가정하면, 첼시와 맨체스터 시티가 1위 경쟁, 아스날과 리버풀이 그 뒤를 추격하는 형세이다. 일반적으로 프리미어 리그를 우승하기 위해서는 강팀과의 경기보다 약팀과의 경기에서 차곡차곡 승점을 쌓는 것이 중요하다고 하는데, 이번 시즌은 다같이 잘하고 있으니 결국 강팀간의 맞대결에서 결판이 날 느낌이다. 그런데 아스날은 강팀과의 경기에서 유독 약한 모습을 보인다는 것. 이번 시즌을 4위 안으로 마치고 다음 시즌의 챔피언스 리그 출전권을 획득하는 것이 실현 가능한 목표가 아닐까. 우승은 솔직히 어려울 것 같다.

그럼, 마지막 남은 ‘FA컵’ 토끼. 프리미어 리그만큼은 아니지만 잉글랜드의 모든 축구 클럽들이 참가해서 우승 팀을 가리는 권위있는 대회다. 그리고 아스날이 마지막으로 들어올린 트로피도 바로 2005년의 FA컵. 올해, 아스날의 FA컵 대진운은 유난히 안좋았다. 5라운드에서 만난 3부 리그의 코벤트리를 제외하고, 차례로 토튼햄, 리버풀, 그리고 8강에서 에버튼을 만났으니, 프리미어 리그에서도 상위권 팀들만 상대했다. 그런데 그것이 전화위복이었을까. 예전에는 쉬운 상대를 만만하게 보다가 된통 당해서 탈락하곤 했는데, 올해는 어려운 상대를 만났지만 차례로 이기고 어느새 8강이다. 그러나 우리는 여기서 선택의 문제에 직면한다.

출처: BBC Sport

FA컵 에버튼전, 3일 후에 바이에른 뮌헨과의 챔피언스 리그 2차전, 이어서 주말에는 북런던 라이벌인 토튼햄 원정. 그 다음 주에는 프리미어 리그 1위를 달리고 있는 첼시와의 결전이 기다리고 있다. 어려운 경기들만 골라서 몰려있는 숨막히는 일정. 선수들도 사람인지라 적절한 휴식이 필요하고, 팀으로서도 선택과 집중이 필요한 시기다. 비록, 뮌헨에게 1차전에서 패했으나 유럽 최고의 클럽을 가리는 챔피언스 리그를 미리 포기하는 것은 있을 수 없는 일이다. 최상의 전력으로 싸워야할 경기. 주말의 프리미어 리그 경기도 물론 중요하다. 1위 첼시를 따라잡기 위해 승점을 쌓아야할 때이고, 토튼햄이 5위로 바짝 쫓아오고 있기에 더더욱 이겨야 하는 상대. 무엇보다도 아스날의 가장 직접적인 지역 라이벌이기에 자존심까지 걸려있다. 그렇다면, 다음 두 경기를 위해 이번 FA컵에서는 주전 선수들을 빼고 휴식을 주어야할까. 그런데 아스날의 8년 무관의 시대에 종지부를 찍을 가능성이 가장 높은 대회가 현시점에서 FA컵이란 점이다. 8강까지 올라왔으니 세 경기만 더 이기면 우리가 그렇게 갈망하던 트로피. 아, 어느 것 하나도 포기할 수 없다.

아르센 벵거 “난 그저 팀이 이길 수 있는 가능성을 생각할 것이고 그 뿐이다. FA컵은 우선 순위중 하나이다. 최우선 순위는 늘 프리미어 리그에서 잘하는 것이다. FA컵은 다음 경기이고, 우리는 스토크전에서 실망스러운 결과를 얻었으므로 강하게 반등하는 것이 매우 중요하다. FA컵은 완전히 우리의 우선 순위이다. 왜냐하면 다음 경기이기 때문이다. 우리가 잘하고 승리해서 4강에 오르길 바란다. 그것이 다른 경기들을 준비하는 최선의 방법이다."

출처: itv Sport

벵거 감독은 보란 듯이 주전 선수들을 대거 출전시켜 에버튼에 4-1의 대승을 거뒀다. 이제는 FA컵 우승까지 두 경기만 이기면 된다. 가장 강력한 우승 후보였던 맨체스터 시티가 탈락하면서 아스날의 준결승 상대는 2부 리그의 위건. 정말로 트로피가 손에 잡힐 듯이 가까워졌다. 설렘으로 가슴이 뛴다. 그러나 그것도 잠시, 다음 경기를 생각하면 또 새로운 고민이 시작된다. FA컵에서 힘을 많이 썼으니, 주말의 리그 경기를 위해 가능성이 희박한 챔피언스 리그를 포기해야 하는가. 아니면, 그래도 챔피언스 리그는 끝까지 포기할 수 없는가. 이쪽도 저쪽도 포기할 수 없으니 주전 선수들의 체력을 믿고 전부 승리하기를 기대해야 하는가. 세 마리의 토끼를 눈앞에 둔 우리에게 최선의 선택은 무엇일까. 어차피 아스날의 감독은 따로 있는데 홀로 아스날의 모든 근심을 어깨에 짊어진 듯 걱정하고 분석하는 어느 흔한 축구팬의 하루.

우리의 연애가 정말로 특별한 이유는 함께 꿈꾸던 것들을 아직 이루지 못했기 때문이다. 매년 목표로 세우는 네 개의 트로피는커녕 당장 다가오는 경기에도 불안해하고 있지만, 우리는 서로를 놓지 않은채 함께 아파하고 고민하며 내일의 희망을 찾는다. 불완전하고 불리한 조건 속에서 번번이 좌절하곤 하지만, 그것으로는 이 사랑을 꺼트릴 수 없다. 눈에는 보이지 않는 나의 마음이 선수들에게 전해져 그 누구보다도 승리를 위해 땀흘릴 것을 믿는다. 그러므로 우리의 연애는 특권이다. 영광의 순간이 아직 찾아오지 않았기에, 우리에게는 더 행복할 날들이 남아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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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hungarida

음악과 미술을 사랑하는, 주변에 흔한 보통의 서울 남자. 아스날과 12년째 연애중. 트위터 아스날 가십(@AFC_Gossip)에서 아스날 소식을 전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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