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녀가 떠나길 바랐다
공통 관심사도 없고, 매번 같은 이야길 듣는 것도 지겨웠다. 고집도 세서 동의하지 않으면 피곤해졌다. 이 아주머니의 이름은 린이다. 일본어를 배우며 만났다. 나는 그녀를 ‘린상’이라 부른다. 성가시고 입 냄새가 심했다. 애착 없는 무미건조한 관계로 지낼 수 있으리라 생각했다. 그런데 나보다 곱절은 더 산 사람이 친구여, 친구여 하며 다가왔다. 왠지 불편함을 느낀 나는 왜 이래, 왜 이래 하며 뒷걸음질쳤다. 린상은 나를 좋아한다. 만나자는 연락에 내 대답의 8할은 거절이었다. 싫은 내색은 곧 죽어도 못해서 가식으로 애써 웃으며 대했다. 에둘러 핑계 대는 건 눈치 못 챘나 보다.
린상이 한번 시작한 이야기는 식당 문을 닫을 때까지 끝날 줄 몰랐다. 했던 얘기를 하고 또 했다. 세 번의 이혼, 모친에 대한 부정(否定), 그것이 낳은 우울증, 극복과 새로운 삶….... 그녀의 예순 인생이 지나온 기승전결에 대해선 귀에 딱지가 앉도록 들었다. 게다가 자신을 ‘아티스트’라고 시도 때도 없이 소개해 거슬렸다. 주말 잘 보냈냐는 물음에 뜬금없이 ‘나는 아티스트잖아.’라며 운을 떼는 식이었다.
그녀가 게요리를 한다며 초대한 적이 있다. 몇 시간 동안 맞장구 쳐줘야 할 생각을 하니 머리부터 아파왔다. 김 봉지 몇 개를 달랑달랑 들고 가 안겼다. 기뻐하며 받아 든 그녀는 ‘아뤼가로우’라며 ‘아리가또우(감사하다는 뜻의 일본어)’를 기어이 미국 사람처럼 말했다. 게는 비쌌고, 나는 얍삽했다. 다행히 그날 린상은 많은 이야기를 하지 않았다. 대신 ‘담포포’를 소개했다. 1986년 이타미 주조 감독의 영화였다.
라멘 장인을 찾아서
담포포는 최고의 라멘을 만드는 비법을 배우려는 집념의 라면 가게 아주머니다. 그 노력으로 후줄근했던 라멘 집을 살리는 내용의 영화였다. 이야기는 예측 가능한 방식을 따랐다. 국물이 담긴 커다란 통 나르기, 시간 내 조리하기, 조깅으로 지구력 기르기 등으로 훈련한다. 다음으론 육수와 면의 대가를 찾아 어렵게 조언을 구하고, 열과 성을 다해 연습한다. ‘끝내 이루리라’는 말이 무색하지 않게 문전성시를 이루는 라멘의 대가가 된다. 물론 가게 이름은 ‘담포포’다. 전형적인 일본 만화 같은 전개였다.
첫 장면에선 라멘 연구만 40년을 한 노인이 등장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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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선 그릇을 자세히 살펴보세요. 형태를 감상하고 향기를 음미해 보십시오. 국물 위에는 기름이 보석처럼 반짝이고 죽순이 빛나고, 해초가 천천히 가라앉고 양파가 표면 위를 부유하죠. 편육 세 조각은 눈여겨 볼 필요가 있죠. 핵심 역할을 담당하지만 겸손하여 자신을 드러내지 않습니다. 우선 라멘의 표면을 어루만지고 젓가락 끝으로 살짝 만져주세요.”
“왜요?”
“라멘에 대한 애정을 표현하는 겁니다. 그리고 고기를 살짝 찔러주세요.”
“고기 먼저 먹는 겁니까?”
“아니, 만지기만 하세요. 그리고 고기를 들어내어 국물에 묻어주세요. 그릇 오른쪽으로. 여기서 중요한 점. 고기에게 사과해야 합니다. ‘조금 후에 뵙겠습니다.’ 그리고 먹기 시작합니다. 면 먼저. 면을 먹을 때는 고기를 응시하십시오. 애정을 담아서요.”
-영화 <담포포 (Tampopo, タンポポ)> (이타미 주조, 1986)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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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인이 무슨 말을 하든 직감할 수 있었다. 보는 내내 애먼 침만 꼴깍 삼키리라는 걸. 영화가 끝나면 아무 라멘 집에나 들어가 대충 형태를 감상하고, 표면을 어루만진 뒤 고기를 살짝 찔러 보리란 걸. 물론 린상과 나는 영화를 다 보고 라멘 집을 찾아 나섰다. 다행히 삿포로엔 골목마다 라멘 가게가 참 많았다. 우린 오래돼 보이는 가게에 들어가 아주 친한 사이처럼 나란히 앉아 면을 불어댔다.
한적한 니쥬용켄 역 앞의 그 가게 이름은 아직도 잘 모르겠다. 간판에 새긴 사람 성씨일 듯한 한자는 인터넷에도 잘 나오지 않는다. 읽기 힘든 그 이름으로 살아온 주인장 부부가 가게를 단단히 지키고 있었다. 둘은 쿵작쿵작 배경 음악을 깔면 딱 맞을 정도로 손발이 맞았다. 남편이 면과 국물을 만들었다. 설거지를 하거나 손님을 맞던 부인은 어느새 젓가락을 들고 주방에 서 있기도 했다. 제때 고명과 차슈(양념해 삶은 돼지 고기를 얇게 썬 것)를 얹기 위한 준비 동작이었다. 조금 전 내 앞에서 물잔을 건네고 있었는데 주방으로 순간이동이라도 한 건가 싶었다.
몇 인분을 주문 받아도 한 그릇씩 국물을 만들었다. 그의 손놀림과 순서는 수십 년 동안 한결같았음을 알 수 있었다. 칼과 젓가락을 놀리며 움직이는 각도대로 등이며 어깨가 고집스럽게 굽어 있었다. 면을 삶는 과정 또한 경이로웠다. 거품이 끓어오르면 육수를 휘젓던 손을 놓고 찬물을 부었다. 완벽히 쫄깃해진 걸 알아챈 순간 건져 올려진 면발은 어느새 사발 속으로 직행해있었다. 조리 매뉴얼을 만들면 얇은 책 한 권이 나올 법했다. 오랜 세월 호흡을 맞춰 온 파트너의 정교한 짜임새였다. 영화를 보고 기대했던 라멘 장인의 모습이었다. 진한 국물과 쫄깃한 면발을 한 사발 즐기고 일어섰다. 그제야 부부는 막중한 임무가 끝났다는 듯이 온화하게 인사를 건넸다. 내가 라멘을 열렬히 사모하게 된 건 이때부터였던 것 같다.
라멘을 먹을 때마다
린상은 이번 주에 시애틀로 돌아간다. 마리화나를 합법적으로 기를 수 있는 마당이 딸린 집을 구했다. 결혼은 다시 하지 않고, 남은 인생은 연금으로 ‘예술’이란 걸 하며 살아갈 것이다. 그녀의 다짐대로 90kg이 넘던 체중을 60kg대로 줄일 것이다. 언젠가는 홀로 방에 남겨져 죽은 지 일주일 정도 뒤에 발견될지도 모른다. 뼛속 깊이 간직해 온 히피의 영혼이 자유롭게 훨훨 날아갈 것이다. 그날이 올 때까지, 때로는 누군가에게 너무 많은 말을 토하거나, 고집을 부려 피하고 싶은 사람이 될지도 모른다.
‘이제 가식적인 시간을 보내지 않아도 돼서 후련한가?’하고 내게 묻는다. 그녀가 나누어 준 수채화나 스팀다리미라든가, 한밤중 두 시간 동안 눈으로 만든 개 조각상이라든가, 이런 것들이 떠오를 때마다 자책하지 않을 수 있을까? 린상은 자신의 마음속을 들여다보고, 열과 성을 다해 표현했던 걸지도 모른다. 유난히 내 얘기에 서투른 나를 위해 너무도 열심히. 린상은 나와 헤어질 때면 항상 치즈 반 통은 집어삼킨 듯한 발음으로 이렇게 말했다. “내 얘길 다 들어줘서 고마워. 다음엔 네 얘기도 들려줘. 아뤼가로우.”
어떡한담. 앞으로 라멘 사발을 앞에 둘 때마다 생각이 날 텐데. 육수에 떠 있는 고명을 바라보다 문득 그녀가 멈출 줄 몰랐던 이야기가 떠오르면 어쩌나. 귀찮게 느껴졌던 히피 예술가의 부재를 미리 실감해 본다. 나도 내 이야기를 열과 성을 다해 들려줄걸. 고기를 탈탈 털어 입에 넣은 뒤, 면을 후후 불다가 생각하겠지. 되돌아보니 이유 없이 사람을 미워한 것 같다고. 내 눈앞의 사람을 가장 소중한 사람처럼 여기라고 했는데, 그렇게 하지 못했구나. 후회하며 그녀를 회피한 대가를 치르겠지. 담포포처럼, 린상처럼, 라멘 장인처럼, 열과 성을 다해 살아본 적 있던가. 어쨌든 잘 가요, 예술가 아주머니. ‘아뤼가로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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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홋카이도 지역별 대표 라멘
일본인, 특히 삿포로 사람들의 라멘에 대한 자부심은 대단하다. 미소 라멘의 원조 도시이기도 하다. 한 그릇 가격은 7백~1천엔 선. 결코 저렴하지 않은 가격이다. ‘아, 짜’라는 말이 절로 나오는 간간한 육수에 기름도 잔뜩이라 거부감이 들 수 있다. 그런데 다음 날이면 걸쭉하고 짭조름한 국물에 담근 쫄깃한 면발이 신기하게 다시 생각난다.
-삿포로 미소(된장)라멘
시라바키산소우 : 삿포로역 ESTA 쇼핑몰 10층, 신치토세 공항 터미널 3층
긴파로우(銀波露) : 신치토세 공항 터미널 3층
寶龍 : 삿포로시 니시구 니쥬용켄 1조 4
-아사히카와 생강 쇼유(간장)라멘
미즈노 : 아사히카와시 토키와도리 2초메 (旭川市常盤通2丁目)
-하코다테 시오(소금)라멘
세이류우케이(星龍軒) : 하코다테시 와카마츠마치 7-3 (函館市若松町7-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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