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를 찾아온 첫 번째 손님이 꺼낸 말은 ‘나 헤어졌어’ 였다. 우연일까? 일본 사람들은 ‘실연하면 홋카이도로 가라’는 말을 종종 쓴다. 오죽하면 ‘실연 소녀’라는 만화도 등장했다. 실연한 여자가 삿포로의 맛집을 탐방하며 자신을 되찾는 내용이다. ‘상심 여행 넘버원, 홋카이도’라는 사이트도 보인다. 정확한 이유는 아직 모르겠다. 어쨌든 우리 모두에겐 잊어야 할 무언가가 언제나 존재하기 마련이니까. 일단 실연자 한 명이 여기 왔다. 덕분에 미뤄두었던 관광은 제대로 할 수 있었다.
징기스칸, 불을 피워라
“한때 채식을 하려고 했어. 오래 전부터 생각했던 거였지. 구제역 파동 때 엄청난 충격을 받고 비로소 결심했다고. 근데 점심시간마다 적당한 메뉴를 찾는 게 너무 힘든 거야. 하다못해 국물도 다 고기로 낸 거잖아. 그래서 일주일에 하루는 ‘고기 안 먹는 날’로 정했지. 그런데 그 다음 날이면 삼겹살 2인분을 먹어 치우고 있더라. 차라리 어렸을 때부터 고기를 안 먹었으면 모를까.”
돼지기름을 둥둥 띄운 삿포로 라멘을 코앞에 두고 한다는 대화가 고작 이거라니. 게다가 내 말에 맞장구치는 손님의 반응은 꽤 심각했다.
“책에서 읽었는데, 육식을 하려면 하등 동물부터 먹는 게 맞대. 한국에 돌아가면 소고기는 먹지 않으려고 해. 소는 인간과 너무 가깝잖아. 가장 좋은 건 땅에서 나는 채소, 그다음은 생선, 닭, 돼지 순서야.”
나는 쫄깃한 면발에 감탄하는 동시에 고개를 끄덕였다. 육식을 (집중적으로) 하는 주제에 생명에 등급이나 매기고 있다니. 위선과 모순이란 단어의 기원은 인간이 분명하다. 낮 동안 고등 동물의 생각이 잠시 머물다간 것뿐이었나. 결국 날이 저물면 불을 피우고 싶은 본능이 치밀어 올랐다. 삿포로 최대의 번화가 스스키노 한복판을 개선장군처럼 가로질렀다. 뺨을 때리는 눈 폭풍을 뚫고 드디어 목적지에 도달했다. 그 이름 ‘징기스칸’. 이왕 이렇게 된 거, 야만성은 정점에 달했다.
“우와, 양고기에서 냄새가 하나도 안 나네. 정말 맛있다.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 게 꼭 소고기 같아.”
돌아가면 소고기는 먹지 않겠다던 실연 여행자에게서 들을 수 있는 최고의 찬사였다. 홋카이도에서만 맛볼 수 있다는 양고기 로스구이를 말하는 징기스칸. 모든 것은 종업원 아주머니의 진두지휘 아래서만 가능하다. 일단 비계를 가운데 올려준다. 양파와 파를 가장자리에 두르고 나면, 싱싱한 생고기를 건넨다. 익으면 바로 먹으라는 훈수도 잊지 않는다. 비계를 바꿔달라고 해도 까맣게 타지 않으면 철저하게 통제한다.
쌀알의 심심한 위로
콸콸. 투명한 술은 이미 잔을 넘어섰다. 홋카이도 섬 넓은 평야에서 자유를 갈망했을 쌀. 비옥한 흙을 품고 탄탄하게 자라난 벼 줄기. 사방으로 하늘거리는 햇빛과 바람에 마음이 싱숭생숭했을 알맹이. 몇 해가 지나고 그 쌀은 우리 앞에 놓였다. 발효와 증류를 거친 한 홉(一合: 이치고우)의 투명한 술이 되어서. 쌀로 만든 사케는 목을 타고 들어와 핏줄을 따라 유영했다. 그렇게 태양과 남동풍한테 얻은 따뜻함을 잠깐 즐기고 영영 떠나겠지. 낮에는 고기로 상념에 잠기더니, 밤에는 술에 취해 쌀로 철학 하는 시늉을 했다.
이자카야(선술집)의 ‘알바생’은 무뚝뚝함이 묻어나는 서비스를 제공했다. 여기서는 좀처럼 보기 어려운 일이다. 그는 일본의 주도(酒道)에 따라 다리통 만한 술병을 양손으로 집어 들었다. 다 채웠나 싶더니, 잔 밑의 사각 받침에까지 넘치도록 따라준다. 평야 너머를 갈망했던 쌀알의 자유는 딱 거기까지였다. 180밀리리터의 한 홉 잔과 사각 받침. 무뚝뚝했지만, 술 한번 제대로 따라줘서 고마웠다.
자유를 꿈꾼 쌀알, 정도(正道)의 알바생, 따뜻하게 오른 취기. 왠지 모르게 하루키의 굴튀김이 떠오르는 풍경이었다. 기가 막히게 무덤덤한 묘사로 골방에서 책을 읽던 나를 허기지게 했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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추운 겨울날의 해질녘에 나는 단골 레스토랑에 가서 맥주(삿포로 중간 병)와 굴튀김을 주문한다. (중략) 내 접시 위의 튀김옷에서 아직도 지글지글 소리가 난다. 작지만 아주 멋진 소리다. (중략) 불과 얼마 전까지만 해도 어느 깊은 바닷속에 있었다. 아무 말 없이 꼼짝도 않고, 밤낮도 없이 단단한 껍데기 속에서 굴다운 것을 (아마도) 생각하며 지냈다. 그런데 지금은 내 접시 위에 있다. (중략) 역을 향해 걸어갈 때, 나는 어깨 언저리에서 어렴풋하게 굴튀김의 조용한 격려를 느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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쌀의 기운을 담은 술이 핏속에서 춤췄다. 투명한 술잔은 허공을 휘저었고, 동공 풀린 눈동자 몇 개가 마주했다. 때가 되면 무언가는 잊히고, 눈빛은 추억으로 남을 거란 걸 아는 눈동자들. 어느 날 도쿄의 하루키는 굴튀김으로부터 격려를 얻었다. 홋카이도의 우리는 사케 몇 잔에 서린 쌀알에 심심한 위로를 받았고.
이자카야를 나와 파우더같이 고운 눈을 밟고 집으로 돌아왔다. 숙취 해소로는 감자탕 대신 수프 카레 국물이 좋겠다며 낄낄대다 잠들었다. 사냥만 하지 않을 뿐 생존을 위한 수렵 본능은 뚜렷했다.
치유의 상징, 단 것
신호가 바뀌면 잽싸게 뛰었다. 길을 건너고도 한참을 지나야 신호는 깜빡이기 시작한다. 그래도 엉덩이가 빠질세라 달렸다. 그만큼 홋카이도의 케이크는 간절하다. 오후 두 세시면 동나는 구석진 골목의 빵 가게 앞에선 ‘쌔가 빠져라’ 달릴 수밖에.
주인 아주머니는 무심했다. 미안하도록 친절하기도 했다. 아직 오후 두 시 반밖에 안 됐는데, 진열대엔 텅 빈 허연 접시 몇 개뿐이었다. 그걸 등지고 묵묵히 설거지를 하며 상냥하게 나를 맞았다. “케이크는 다 떨어졌고, 주문은 가능해요. 죄송합니다.”
“저기요, 아직 세 시도 안 됐는데……에이, 좀 더 만들어 두면 안 돼요?”
일본어를 저만큼 구사할 줄 알았더라면, 내뱉고 싶은 말이었다. 저 아주머니처럼 욕심을 비워야 뭐가 되도 될 텐데.
포기할 수 없어 아예 대로로 나갔다. 오도리(大通)에 있는 ‘삿포로 스위츠 카페’. 남자 둘, 여자 하나가 각자 케이크를 하나씩 고르고 자리를 잡았다. 전부 달 것 같이 생겼는데 하나도 달지 않다. 딸기 맛, 캐러멜 맛, 우유 맛. 이름만 보고 상상한 그대로의 맛이다. 먹다가 못내 아쉬워 초콜릿 몽블랑 하나를 더 추가했다. ‘디저트를 먹느니 차라리 공깃밥 하나를 더 시키자’던 나는 여기 없다. 홋카이도에서 케이크를 비롯한 달콤한 모든 것은 최고의 수렵 대상이다.
천혜의 바람과 공기를 머금고 자란 최상급 밀가루. 넓은 녹지에 방목하여 기른 소에서 얻은 우유, 버터, 생크림. 굳이 노래하지 않아도 신토불이가 왜 좋은지 알 수 있다. 입으로 들어간 ‘단 것’은 물리적으로 사람을 치유한다.
어쨌든 다시 잘 살아 보아야 한다
제철 생선으로 가득한 회전 초밥을 먹고 여정은 끝났다. 치유의 결과는 봄이 오면 알 수 있지 않을까. 사랑이 떠나 슬퍼하는 사람을 홋카이도로 이끄는 이유는 음식 말고도 많다. 뜨끈하고 미끈한 천연 온천. 유빙이 떠다니는 광활한 오호츠크해. 태고의 모습을 간직한 웅장한 자연. 그들은 온 힘을 다해 마음을 잃어버린 자에게 위로의 손길을 건넨다.
너 없이 내가 어떻게 사느냐고? 당신 앞에 놓인 뜨끈한 국물을 위해 희생된 생명의 숭고함. 한 잔 술이 되기 위해 벌판을 꿋꿋이 지켰을 쌀알의 하염없음. 쉼 없이 앞으로 나간 어느 물고기의 근면. 치유를 위해 적절하게 달콤해진 한 조각의 케이크. 진공에 갇힌 듯 고요한 골목의 고운 눈길……그런 생각을 하면 우리는 ‘나 자신’으로 다시 잘 살아 보아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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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쨌든 시간은 사람을, 사건을, 해프닝을, 우연을, 고통을 언제나 무사히 통과하는 법이니까.
-편혜영 「밤의 마침」 중에서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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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삿포로 음식 탐방 추천 메뉴
일본에서도 일부러 먹으러 찾아온다는 홋카이도(北海道). 넓은 어장은 물론, 비옥한 땅 덕분에, 제철음식을 골라 먹는 재미도 쏠쏠하다. 여름엔 옥수수, 겨울엔 감자가 맛있기로 유명하다. 거의 모든 식당엔 도내에서만 한정적으로 판매하는 ‘삿포로 클래식(Classic)’ 생맥주가 있으니, 함께 곁들이는 기회도 놓치지 마시길.
-징기스칸 (양고기 로스 구이)
둥근 철제 화로에 채소와 양고기를 구워 먹는다. 1910년대 군대에서 필요한 양모를 얻기 위해 많은 양을 사육한 게 기원이다. 이 지역만의 독특한 음식으로 자리 잡아 홋카이도 유산으로 선정 되었다. 선술집 같은 분위기에 전통의 맛을 이어오는 ‘다루마’가 유명하다. 스스키노 지역에 지점이 여러 개 있다.
-수프 카레
인도나 일본풍의 카레가 아니라 걸쭉한 국물에 밥이 따로 나온다. 큼지막하게 썰은 홋카이도 채소를 비롯해 고기나 해산물을 선택할 수 있다. 맵기 조절이 가능하며, 감자탕과 비슷한 육수 맛이 난다. ‘가라쿠(Garaku)’와 ‘옐로우(Yellow)’는 현지인도 많이 찾는 전문점이다.
-라멘
삿포로의 미소 라멘, 아사히카와와 구시로의 해산물 라멘, 하코다테의 시오 라멘이 유명하다. 삿포로 미소 라멘은 걸쭉하고 기름기가 많은 국물에 굵고 쫄깃한 면이 특징이다. 스스키노의 ‘라멘 요코초’와 삿포로역 ESTA 쇼핑몰 10층의 ‘라멘 공화국’에 가면 다양한 선택이 가능하다. 그 외에도 길에서 마주하는 여러 가게의 각기 다른 맛에 도전할 수 있다.
-홋카이도 유제품과 ‘스위츠(Sweets)’ (케이크, 쿠키, 아이스크림 등)
우유의 비릿한 맛을 싫어하는 사람에게도 추천하고 싶은 홋카이도의 병 우유를 비롯, 다양한 유제품과 스위츠를 맛볼 수 있다. 기념품과 선물로도 좋다. 매년 삿포로 스위츠 그랑프리를 열어 최고의 케이크와 과자를 선정한다. (//sweets-sapporo.com/) 수상작은 ‘삿포로 스위츠 카페(Sapporo Sweets Cafe)’에서 맛볼 수 있다. 그 밖에도 다양한 카페와 스위츠의 왕국이다. 비쎄(Bisse), 로카테이, 로이스, 스내플스, 기타카로우, 르타오 등이 유명하다.
-야끼토리와 이자카야
지하철 스스키노 역 근처에서 다양한 이자카야를 찾을 수 있고, 해산물도 실하게 내놓는다. 현지인이 많이 찾는 야끼토리 전문점으로 ‘쿠시도리(串鳥)’가 있다. 삿포로 역과 오도리 역 근처에 지점이 많다.
-초밥(스시)
해산물이 풍부한 홋카이도의 스시는 어느 가게에서든 기대 이상의 맛을 자랑한다. 저렴하고 맛 좋은 회전초밥으로 ‘하나마루’와 ‘토리통’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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