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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코다테의 심야식당

빼어난 야경 뒤에 숨은 소박한 음식과 사람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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기차에 몸을 싣고 하코다테(函館)로 향했다. 지난여름, 우리는 이곳에서 북쪽 나라 홋카이도로의 이사를 결심했다. 기약도, 밑천도 없이 떠나온 자에겐 믿음이 필요하다. 신이 있다면 그분에게 은총을 구해 별 탈 없게 해달라고 살짝 부탁하고 싶었다. 그래서 이 항구도시를 다시 찾아야 할 의무감이 들었다. 제목만 거창했던 어떤 단편소설처럼, 우리의 ‘순례 여행’은 소소하고 단출했지만.



순례자가 할 일은 몇 개의 언덕을 넘고 휑한 공터를 바라보는 일이었다. 그리고 골목 어귀를 돌아 작고 오래된 가게를 찾는 일 정도였다. 야경 감상과 쇼핑은 생략했다. 대신 천천히 걸었다. 눈으로 보고 마음으로 담을 게 지천이었다. 어슬렁거리던 하리스토스 정교회 뒷골목에선 여우 한 마리를 마주했다. 물을 찾아 마을까지 내려와 녹지 않은 눈을 핥고 있었다. 절실했다. 살아남아야 할 혹독한 겨울이다.




기묘한 밤의 심야식당

건너편 남자는 휴가 중인 해군 장교라고 했다. 거나하게 취해 온몸을 슬로우 모션으로 흐느적대고 있었다. 결국엔 피스타치오를 껍질째로 씹어 삼켰다. 그 표정이 아직도 생생하다. 보는 사람이 고통스러울 정도였다. 나무처럼 딱딱한 걸 와그작 씹어 삼켰으니 당연했다. 꽤 하드코어 몸 개그였다. 옆에는 마흔이 좀 안 되어 보이는 취객 1과 2가 나란히 앉아있었다. ‘피스타치오 장교’를 말리기는커녕, 나더러 사진으로 남기란다.

얼마 뒤 취객 3과 4가 등장했다. 늦은 시각 일을 마치고 온 사장과 늙은 여직원이다. 앉기도 전에 손가락을 하늘로 찔러대며 춤을 췄다. 그리곤 아무렇지도 않게 술과 안주를 주문하고 좁은 좌판 사이에 끼어 앉았다. 여주인은 부엌 뒤 편에서 반숙 달걀과 감자조림을 뚝딱 만들어 내놓았다. 안 되는 거 빼고 다 된다. 사람들은 그녀를 ‘마마’라고 불렀다. 우리로 치면 식당에서 ‘이모’라고 부르는 것과 비슷하다. 손님들의 각기 다른 세상살이가 좌판을 무대로 등장했다. 호텔로 향하는 전차는 이미 끊겼다.


아베 야로의 『심야식당』이 하코다테에 있다면 여기가 아닐까 싶었다. 일상에 지친 다양한 사람들의 허기와 마음을 채워주는 야밤의 포장마차. 그곳은 미슐랭 가이드의 별로 매길 수 없는 가치와 추억을 선사한다. 옆 사람이 주문한 음식을 따라 주문하고, 서로의 이야기를 나누며 공감하는 장소다. 아베 야로는 ‘심야는 고백하기 좋은 특별한 시간’이라고 말했다. 그래서였을까? 택시에 타려던 우리를 붙잡고 마마가 나에게 귓속말을 했다.

“사실은 제 남편이 자이니치(在日)예요. 다음에 하코다테에 오면 또 들러줘요.”

그날 밤은 유난히 깊고 기묘해서 쉽게 잠들 수 없었다. 그녀가 서비스로 준 생선 두 토막과 조용히 건네주던 고추장 한 숟가락이 머릿속을 맴돌았다.


기도가 이루어지는 곳

다음날 느지막이 일어나 2번 전차를 타고 종착역인 ‘야치가시라’에서 내렸다. 담장을 넘어다니느라 바쁜 까마귀만 가끔 푸드덕댈 뿐 한적한 골목이었다. 언덕을 따라 있는 주택가의 끝은 공동묘지였다. 을씨년스럽게 느껴졌던 곳에서 조깅을 하는 사람이 있어 의아했다. 그만 돌아갈까 하던 차에 언덕 너머로 지평선인지 수평선인지 모를 경계가 보였다. ‘다치마치 곶(立待岬)’이었다.


둥글게 굽어진 해안선을 따라 힘찬 파도가 앞서거니 뒤서거니 쓸려왔다. 바다 건너 혼슈 섬의 아오모리도 보였다. 해풍에 흔들리는 나뭇가지들은 윙윙 소리를 내며 묘한 음악을 연주했다. 파도를 보며 바다가 태어난 때를 감히 상상했다가 까마득했다. 태양을 보면 우주의 수많은 별 속 먼지 같은 내 존재에 숙연해졌다. 그러다가 나의 어머니의 어머니의 어머니들이 태어나 자란 날들이 떠올라 너무 아득했다. 메시지를 받은 느낌이 들었다. 그 동안 잘 했다고, 앞으로도 별 탈 없을 거라고. 말문이 막히는 자연 앞에 서니 기도가 이루어지리란 대책 없는 확신이 들었다. 이런 데를 보고 흔히들 ‘기도발’ 센 곳이라 하나 보다.


선량한 꼬치구이 집

다시 공동묘지를 가로질러 언덕길을 내려왔다. 손이 얼어 시렸다. 전차를 타고 ‘중앙병원 앞’ 정거장에서 내렸다. 길 건너 편의점을 끼고 골목으로 들어가면 조그마한 꼬치구이 집이 있다. 잡지에서 본 뒤로 오래 전부터 가고 싶었던 돼지고기 꼬치구이 가게다. 일반적으로 꼬치구이는 닭고기를 기본으로 하지만, 하코다테에서는 돼지고기가 주를 이룬다. 예전부터 선박이나 제철소 노동자들이 열량이 높은 돼지고기를 더 선호했기 때문이다.

냉동하지 않은 홋카이도산 생고기를 사용했다. 소금구이와 타레소스 모두 담백하고 맛있었다. 상큼한 민트향이 나는 모히토가 희한하게 잘 어울렸다. 방울 토마토에 얇은 베이컨을 말아 구워주는 것도 별미였다. 모든 꼬치는 주문하면 아저씨가 숯불에서 부채를 부쳐가며 은은하게 구웠다. 계란말이를 시키면 아주머니가 달걀을 체에 걸러 부친 뒤 무를 갈아 올려 소담하게 내왔다.


연거푸 주문했더니 아저씨가 슬쩍 말을 건넸다. 왜 여기에 왔는지, 인기 한류 스타는 누구인지, 타국 생활이 힘들진 않은지 등. 주인 부부는 신혼 때부터 이곳에서 장사를 했다고 했다. 이야기가 무르익자 아주머니가 우스개로 고민을 털어놓는다. 요즘 편의점에서 파는 도시락에 맛 들려서 큰일이라고. 매일 편의점을 바꿔가며 도시락을 골라 먹느라 살이 많이 찐다고.

두런두런 이야기를 나누다 보니 선량한 기운이 느껴졌다. 부부는 오랫동안 꼬치를 꿰고 달걀을 부치며 자식을 낳아 길렀을 거다. 늦은 밤 집으로 돌아가 불 꺼진 아이 방에 가장 먼저 들렀겠지. 발 밑에 차 놓은 이불을 끌어 올려 덮어주며 수천 번의 평범하고 따뜻한 밤을 보냈을 것이다.

주인 부부에게 사진을 부탁했다. 아저씨는 덮어뒀던 숯불을 다시 지피고, 아주머니는 거울을 보며 머리를 매만졌다. 다정한 포즈를 취해달라는 요청에 쑥스러워 하면서도 여러 번 포즈를 취했다.




순례 여행의 소소한 기억

우리는 전차 일일 권을 사서 아무데나 내려서 걸었다. 추우면 다시 올라타서 다른 정거장에 내렸다. 5번 전차 마지막 정거장엔 거센 바닷바람 말고는 아무것도 없었다. 그때 휑한 공터에서 울음소리가 들렸다. 굶주림에 우는 소리임을 직감했다. 편의점으로 달려가 참치 캔을 사서 구석에 놓아두었다. 노란 고양이 몇 마리가 허겁지겁 배를 채웠다.

삿포로로 돌아가는 기차는 두 시에 출발했다. 그리곤 바다를 향해 곤두박질칠 기세로 차체를 기울여 해안선을 달렸다. 언뜻 잠이 들었다가 깨면 스쳐 갔던 존재들이 떠올랐다. 기묘한 포장마차의 취객과 여주인, 꼬치구이 집을 지키고 있을 선량한 부부, 한겨울 황량한 숲 속에서 생존만이 유일한 삶의 이유이자 목적인 생명들. 모두 이번 겨울을 잘 지낼 수 있길 기도했다.


『심야식당』 ‘버터 라이스’ 편에서 유랑악사 고로 씨가 밥값 대신 부르던 노래가 있다. 제목은 「하코다테의 여인」. 오래된 추억을 떠올리며 부르는 노래다. 언젠가 하코다테 골목 어귀에서 만난 인연과 겨울 숲의 가녀린 목숨이 떠오르는 밤엔 이 노래를 들어야겠다. 모두 각자의 위치에서 안녕하길.

멀리 찾아왔구나 하코다테에 / 세찬 파도를 뛰어넘어 / 따라오지 말라고 하면서도 / 뒤돌아선 모습으로 울었던 그대를 / 떠올릴 때마다 만나고 싶어서 / 무척이나 참을 수 없었어 / 바다에서 부는 바람 가슴에 스며드네 / 여기는 북쪽 나라, 물보라도 얼어붙는다네 / 이 거리 어디에 있는 건지 / 단 한 번만이라도 만나고 싶었다네
-「하코다테의 여인」 가사

* 다치마치곶 (立待岬)

하코다테산 남단에 쓰가루 해협을 끼고 둥글게 튀어나온 곳이다. 고료카쿠 지역과 바다를 내려다볼 수 있어 경치가 아름답다. 밤에는 하코다테에서 유명한 오징어 잡이 배도 볼 수 있다.

-가는 길 : 시전차 2번을 타고 종점인 야치가시라(谷地頭)에 내린다. 이정표 (Cape Tachimachi)를 따라 가면 공동묘지가 나온다. 묘역이 끝나는 언덕을 넘으면 된다. 정거장에서 도보로 약 15분 소요.

* 기묘한 밤의 심야 식당, 다이몬요코초

해가 지면 거리에 인적이 드물어지는 하코다테에서 밤 늦은 시각까지 영업하는 포장마차 촌이다. 스물 여섯 개의 점포가 영업하고 있으며, 좁은 좌판에 붙어 앉아 정겨운 시간을 보낼 수 있다. 라멘, 징기스칸, 와인, 해산물, 한식 등 다양한 음식을 찾을 수 있다.

-영업시간 : 점포별로 다름. (보통 오후 6시~12시)
-주소 : 函館市 松風町 7 (하코다테시 마츠카초 7). JR 하코다테역에서 도보 5분. WAKO 백화점 쪽으로 길을 건넌 후 세 블록 직진.

* 선량한 꼬치구이 집, 미나토야 (湊屋)

야끼토리(꼬치구이) 전문점. 주 메뉴는 돼지고기(豚肉: 부타니꾸)다. 간장으로 만든 타레소스와 소금(시오) 구이를 선택할 수 있다.

-영업시간 : 오후 5시~11시
-주소 : 函館市 本町 34-2 (하코다테시 혼마치 34-2). 유노카와행 시전차 2번 또는 5번을 타고 ‘중앙병원 앞’에서 내려 도보 3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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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송인희

홋카이도의 매력에 흠뻑 빠져 삿포로에서 살고 있다.
새로운 언어와 문화, 일상을 여행한다.
먹고 마시는 것과 사소한 순간을 좋아하며, 종종 글자를 읽고 쓴다.
song_soon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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