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삿포로, 눈보다 달이 먼저 차오르는 마을

삿포로에서 떠오른 잡다한 생각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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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대로가 좋다고 했다. 도쿄는 너무 도쿄여서, 나고야는 또 너무 나고야여서 뭔가 하나씩 마음에 썩 들지 않는 구석이 있다고. 그런데 삿포로는, 홋카이도는 그대로가 좋다고 했다. 일본에서 10년 넘게 산 사람들이 그렇게 얘기하니 나는 고개를 끄덕였다. 한 달째 하는 일이라곤 청소, 밥, 빨래, 쇼핑, 산책 정도. 무언가를 해내야 한다는 조바심이 일다가 말았다. 새로운 건 하루에 하나씩이면 충분하다.

삿포로의 어느 오후

북위 43.3도의 이방인이 되다

북위 43.3도, 동경 141.2도의 어디선가 서투른 이방인이 곤경에 처해있다. 질퍽하고 검은 것이 폭발하기 직전이다. 녀석은 덜컹덜컹 선을 넘어서려고 안달이다. 10분 전, 손이 큰 이방인 여자는 실처럼 가느다란 건조 미역이 어지간히 못 미더웠다. ‘일본은 뭐든지 작단 말이지.’ 하며, 뻣뻣한 줄기를 한 움큼 더 집어 뜨거운 물에 투하한 게 잘못이었다. 낭비라고는 눈곱만큼도 저지를 수 없게 설계한 건축가의 노고가 돋보이는 부엌이다. 먹으려는 자가 먹히는 존재에게 가능한 많은 고뇌와 경의를 자연스레 느낄 수 있다. 조리 공간을 절약하겠다는 신념은 일본 건축가 특유의 전통 비슷한 게 아닐까 싶다. 비교적 큰 집에 마실을 가 보아도 부엌이 협소하긴 마찬가지다. 넘쳐 흐르는 검은 미역국으로부터 이방인이 도망칠 곳은 없다.

홋카이도의 하늘, 리본으로 단장한 나무

주린 배를 커피로 채우면 속이 쓰렸다. 오른쪽 다리를 달달 떨며 퇴근을 갈망하던 저녁 7시 35분이 존재하던 때였다. 그날도 누군가의 말 한마디에 나는 절망했다. “자, 밥 먹고 와서 합시다.” 결말이 정해진 회의는 밤늦도록 끝나지 않았고, 나는 회사를 나왔다. 아빠처럼 월급쟁이로 살고 싶지 않았다. 이후 여기저기 기웃거리긴 했지만 결국은 백수 신세다. 결혼했으니 ‘주부’로 신분 유지는 할 수 있었다. 엄마처럼 살지 않겠다고 핏발을 세우던 내가 어느새 엄마가 지나간 길을 따라 걷고 있다.

지금 시각 저녁 7시 35분, 밥은 다 먹었고 설거지까지 마쳤다. 디저트는 홋카이도산 생크림이 듬뿍 들어간 딸기 쇼트케이크다. 달지 않고 부드럽다. 가벼운 농담에 까르르 낮은 천장이 울린다. 이것만으로도 충분하다. 떠나와 보니 사실 특별한 건 없다. 적어도 내일 끼니는 미역국이라는 게 정해졌으니 먹고 살 걱정은 (아직) 없다.

‘北6 西27’라고 쓰인 길 안내판 아래에 있는 횡단보도를 건너면 슈퍼가 나온다. 신호가 바뀌길 기다리다 아빠의 노란 봉투가 떠올랐다. 매월 21일이면 양복 안 주머니에 넣어오던 월급봉투가 아직도 눈에 선하다. 나는 작았고 아빠는 젊었던 시절이었다. 아빠는 30년이 넘도록 매월 스물한 번째 날을 기다리며 살아왔을 거다. “세상에 억지로 되는 일이란 없어.” 언젠가 엄마가 건넸던 말이 생각을 스칠 때, 횡단보도 신호가 파란불로 바뀌었다. 문득 엄마와 닮은 생각을 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졌다. 코끝이 찡하고 팔에 소름이 올랐다. 북위 43.3도의 겨울은 정말 춥겠구나.


가을은 그렇게 단번에 끝났다

점박이 단풍잎이 가방에 들어와 앉던 날. 길을 거닐던 네 명의 중노인이 휘날리는 은행잎과 싸락눈을 맞으며 까르르 웃던 순간. 흩날리는 나뭇잎이 춤을 추던 광경을 사진에 담으려던 찰나. 그보다 먼저 눈에 들어간 모래를 빼내야겠다는 생각이 들던 때. 햇살을 아직 다 머금지도 못한 시퍼런 은행잎은 땅에 떨어져 회오리쳤다. 세찬 바람 몇 번에 가을은 끝났다.

거센 바람에 휘날리는 나뭇잎

가을은 당황했고 겨울은 황당했다. 엉거주춤한 두 계절 사이에서 이방인 부부는 산책을 나섰다. ‘마루야마 공원’ 안 길로 들어서자 바람이 잠잠해졌다. 자전거는 세워 두고 푹신한 낙엽 길을 발로 걸었다. 낙엽이 말라 흙으로 스며들며 커피시럽 같은 단내가 났다. 시계는 오후 세 시 반을 가리키는데 햇빛의 흔적은 거의 없다. 해가 부지런하니 야속하다.

마루야마 공원

거대한 나무들로 이루어진 공원은 흡사 ‘나니아 연대기’에 나오는 숲길 같았다. 에드먼드가 눈 덮인 숲에서 마녀의 꼬임에 넘어갔던 곳. 그 철없던 아이가 하얀 가루를 입에 묻혀가며 먹은 ‘터키쉬 딜라이트’를 아직도 잊을 수 없다. 입으로 베어 물면 마치 고운 눈송이를 반죽한 것 같은 부드럽고 쫄깃한 식감일 게 분명하다. 사실 삿포로역에 있는 백화점 식품관에서 그와 흡사하게 생긴 젤리에 눈도장 찍어 놨다. 눈이 쌓이면 그걸 들고 마루야마 공원으로 가리라. 그런데 올해 유난히 눈이 늦다. 오후 네 시가 되니 어둠이 찾아왔다. 공원을 나와 힘차게 자전거 페달을 밟아 집으로 향했다.


어떠한 질서를 마주했다

일상을 여행으로 받아들인 지 한 달이 지났을까. 나는 어떠한 질서를 마주했다. 16차선 교차로를 지나던 칠십여 대의 자동차를 일순간 제자리에 멈추게 하는 사이렌. 해가 저물면 불빛을 밝히는 자전거의 랜턴. 흡연실 외에는 거리에서도 담배를 피우지 않는 애연가의 의지. 그렇지만 흡연석에서는 어린아이가 앞에 있어도 끈질기게 담배에 불을 붙이는 성실함. 후쿠시마산 채소가 놓인 진열장 앞에서도 흔들리지 않는 침착한 눈빛. 모든 것이 생경하고 즐거웠던 한 달 남짓의 기억 속에 그것은 꿋꿋이 자리하고 있었다. 그 어떠한 질서는 때로는 편리하지만 가끔은 섬뜩하기도 했다.

점심시간 벤또(도시락)를 먹는 사람들

질서의 정수는 쓰레기에서 엿볼 수 있었다. 분리수거의 여왕을 자처하며 매주 토요일을 기다리던 한국에서의 무용담은 명함도 내밀 수 없는 처지가 됐다. 구청에서 받아온 쓰레기 배출 안내책자는 8페이지에 달했다. 깨알같이 작은 글씨로 된 안내서를 정독했다. 쓰레기는 총 아홉 종류인데, 각각 다른 날짜에 지정된 시간 동안 버릴 수 있다는 게 하이라이트였다.


까마귀들은 쓰레기 처리 시스템을 꿰뚫고 있는 게 분명하다. 귀신같이 음식물 버리는 날을 놓치지 않고 달려든다. 비둘기의 다섯 배는 될 법한 몸집에 통굽 같은 부리를 지닌 녀석들은 일본 도심에서 가장 쉽게 접할 수 있는 새다. 지능은 네 살 아이 수준이다. 사람 얼굴까지 구별해서 자신을 괴롭혔던 사람을 기다렸다가 머리를 쪼고 갔다는 일화도 풍문으로 들었다. 음식물 쓰레기를 버리는 날이면 거리에서 까마귀들의 잔치를 구경할 수 있다. 봉투를 찢는 건 기본이고, 딱딱한 것은 부리로 물어서 땅에 떨어뜨려 깨 먹기도 한다. 어쨌든 다음 날이면 거리는 말끔히 치워져 있다.


홋카이도의 중심에서 생활을 외치다

아사히야마 기념공원에서 내려다 본 삿포로 시내

섞이지 않는 물과 기름 사이 어디쯤일까. 닿을 듯 말 듯한 그 틈새에 사는 기분이라면 정확한 표현일까. 이렇게 이방인으로 산다고 크게 달라진 건 없다. 삶을 지지고 볶으며, 결국 평범한 일상과 모국어의 소중함을 다시 한 번 각인할 수 있을 뿐. 지난 한 달 동안 내가 가장 잘한 건 중고 용품점에서 전기 스토브를 1,980엔에 산 일이다. 가장 흡족했던 날은 ‘길치’인 남편이 ‘아사히야마 공원’으로 가는 길을 단번에 찾았던 날을 꼽겠다. 그러니 말 다했다. 2013년 12월, 우리가 사는 마을엔 기대했던 눈보다 달밤이 서둘러 찾아왔다. ‘캄캄하면 별이 더 잘 보인다’고 누군가 그랬는데, 밤이 길어 잡생각만 많아진다.


* 홋카이도의 자전거와 썰매

교통비가 비싸고 버스가 자주 다니지 않기에 자전거는 일본의 주요한 교통수단 중 하나이다. 앞뒤에 바구니를 달아 짐을 실을 수 있고, 어린아이를 태울 수 있는 보조장치도 있다. 홋카이도에서는 눈이 쌓이면 자전거 대신 썰매를 끄는 진풍경을 볼 수 있다.

-자전거 관련 주요 법규 : 모든 자전거는 가까운 사이클숍에서 ‘보안 등록’을 해야 한다(500엔). 미등록 자전거의 경우 경찰의 검문 시 문제가 될 수 있다. 지정된 장소에 주차해야 하며, 보행자 전용 도로에서는 자전거를 끌고 가야 한다. 야간에는 자전거 앞쪽의 랜턴을 키고 운행해야 한다. 자전거에 쌓을 수 있는 짐은 길이 30cm, 너비 15cm, 무게 30kg을 넘지 말아야 한다. 유아용 좌석이 있는 경우를 제외하고 다른 사람을 뒤에 태울 수 없다.

-중고 자전거 : 삿포로 총영사관에서는 매년 1~2회 유학생을 대상으로 중고 자전거를 무료로 양도한다(홈페이지 참조). 이외의 경우에는 중고용품점에서 비교적 저렴한 가격에 구매할 수 있다.

-1일 대여 서비스 ‘포로크루’ : 삿포로 시내의 40여 지점에서 하루 동안 자전거를 대여할 수 있는 서비스. 24시간 1,050엔, 운영 시간 오전 7:30~ 오후 9:00. (//porocle.jp)

* 삿포로(札幌)의 숨은 비경

일본의 5대 도시이기도 한 삿포로는, 홋카이도 가이드북에 ‘당일치기가 가능한 도시’라고 나올 정도로 관광 명소는 소박한 편이다. 대신 여유를 느끼고자 한다면 구석구석 찾아볼 만한 곳이 많다. 이번 회에 등장한 공원 두 군데를 소개한다.

-마루야마 공원(円山公園) : 삿포로시 북서쪽 마루야마 원시림의 북쪽에 위치한 공원. 북해도 신궁 및 동물원과 연결되어 있다. 계절마다 색이 다른 웅장한 숲길을 자랑하며, 특히 봄의 벚꽃이 유명하다. 근방 지역은 소규모 상점과 레스토랑, 카페로도 유명하다. 지하철 토자이선(東西線) 마루야마코엔(Maruyama Koen)역 3번 출구에서 도보 3분.

-아사히야마 기념공원(旭山記念公園) : 접근성이 떨어지지만, 무료로 삿포로 전경을 볼 수 있다. 야경을 즐길 수 있는 데이트 코스로도 유명하다. 관광객에겐 잘 알려지지 않아 한산한 편이다. 지하철 마루야마코엔역 2번 출구와 바로 연결된 버스터미널에서 아사히야마 기념공원행 버스를 타면 된다. 10~15분 소요. 버스 요금은 200엔. 노면전차를 탈 경우 니시센 9조 아사히야마 코엔 도리(Nishisen 9 Jo Asahiyama Koen Dori)에서 하차하여 서쪽으로 직진하면 공원으로 오르는 길이 나온다. 오르막길이며 도보 30분 소요.


[관련 기사]

-홋카이도의 수다를 시작하며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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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대낮 같은 밤에 마시는 술의 맛은… - 핀란드의 백야
-나를 설레어 하지 않는 남자라면 그만 끊자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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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송인희

홋카이도의 매력에 흠뻑 빠져 삿포로에서 살고 있다.
새로운 언어와 문화, 일상을 여행한다.
먹고 마시는 것과 사소한 순간을 좋아하며, 종종 글자를 읽고 쓴다.
song_soon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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