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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에이, 아! 비에이

‘순수’를 탐할 수 있는 언덕 마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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겨울의 비에이는 온통 하얀 여백뿐이었다. 겹겹이 이어진 구릉은 한눈에 들어오지 않았다. 감정이 이리저리 날뛰었다. 고삐 풀린 망아지처럼 좀처럼 잡히지 않았다.

삿포로 톨게이트를 빠져나왔다. 홋카이도에서 자동차 여행은 처음이다. 도시의 경계를 넘지도 않았는데, 사방은 이미 텅 비었다. 내륙의 아사히카와(旭川)까지는 고속도로였지만, 목적지인 카미카와군(上川郡)의 비에이(美瑛)까지는 국도를 타야 했다. 지난밤 일부러 <겨울 왕국>을 보길 잘했단 생각을 했다. ‘아렌델’로 들어가는 것처럼 강을 건너고 산을 넘었다. 도로는 어느새 2차선으로 줄었다. 겨울철 통행금지 표지판도 몇 개 지나쳤다. 좁은 도로를 빼고는 계절의 정령이 세상을, 자연을 지배하고 있었다. 모든 게 얼어붙었고 겹겹이 쌓인 눈은 완고했다. 잎사귀 없이 단단한 활엽수와 극도로 거칠어진 침엽수가 각자의 군락을 이루고 있었다. 아주 오래되고 안정적인 진영이었다.

「Let it go」 를 흥얼거리며 창 밖을 두리번거렸다. 얼음에 갇힌 엘사를 구하러 가는 안나에 극도로 감정이입을 한 채로. 눈을 동그랗게 떴다가, 입술을 샐룩거리기도 했다. 얼굴에 경련이라도 난 것처럼 우스꽝스러웠을 게다. 다시 생각하니 좀 창피하다. 여행 시작부터 너무 감상에 빠졌다.




언덕 마을의 역사

홋카이도(北海道)에는 일본의 내지인 혼슈(本州)와는 다른 느낌의 지명이 많다. 원래 이곳에 살던 ‘아이누 족’의 흔적이다. 19세기 메이지 시대에 이곳을 개척(?)한 후 일본식 한자를 끼워 맞추었다. 원래의 이름인 ‘피예(Piye)’는 아이누 말이다. ‘기름지고 탁한 강’이란 뜻이다. 예전에는 수원지에서 흘러나온 유황 성분 때문에 이곳 강물이 실제로 그러했다고 한다. 비에이(美瑛)를 적은 한자의 뜻은 ‘아름다운 옥빛’이고, 우리 식으로 읽으면 ‘미영’이다. 왠지 피식 웃음이 나온다. 하긴, 여기에 미영이가 산다고 해도 무방할 정도로 비에이는 소박한 농촌 마을이다. 그렇지만 면적은 677.16㎢로 서울특별시와 비슷한 크기다. 전체의 70%는 삼림, 15%는 농경지이다. 이곳은 1970년대에 사진작가 ‘마에다 신조’가 발표한 작품으로 세상에 알려졌다. 사계절 다른 모습을 보여주는 구릉과 자연의 비경으로 영화나 광고의 단골 촬영지가 됐다. 언덕의 대부분은 감자, 양파, 밀, 옥수수를 경작하는 밭이다.


풍경화, 참 쉽죠?

꿀꺽, 침을 삼켰다. 고도가 높아졌는지 귀가 먹먹해졌다. 북부 고원지에서만 자라는 자작나무 숲이 966번 도로를 감쌌다. 정면으론 거대한 대설산(大雪山: 다이세츠야마)이 점점 다가왔다. 열 개의 봉우리 중 하나인 활화산 토카치다케(十勝岳)에서 시작된 물줄기는 ‘흰수염폭포(시로히게타키)’로 이어진다. 흘러내리는 물줄기가 수염 같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폭포수의 거대한 심지는 상상하기 힘든 원리로 얼어 있었다. 쏴쏴, 물줄기를 뿜어댔을 소리도 멈추었다. 참으로 겨울은 만물이 숨을 고르는 계절이다.

떨어지던 폭포수도 얼어붙은 고요한 풍경 속에 서 있었다. 다리 위에서 내려다보니 묘한 푸른 빛을 띤 물이 김을 뿜으며 흐르고 있었다. ‘방제 둑을 만들다 온천수에 포함된 알루미늄 성분이 강물과 섞였다. 그렇게 생긴 콜로이드 형태의 입자가 햇빛을 산란시켜 코발트블루 빛으로 반사되는 것으로 추측한다.’는 설명이 있었다. 가설만 존재할 뿐, 파란 빛깔을 내는 정확한 이유는 아직 밝혀지지 않았다. 그래서 더욱 신비하게 느껴졌다.


밥 로스(Bob Ross)의 <그림을 그립시다(The Joy of Painting)>라는 프로그램이 있었다. 기가 막히는 풍경화를 30분 만에 뚝딱 그리던 곱슬머리 밥 아저씨 말이다. 천진한 웃음을 지으며 ‘참 쉽죠? 누구나 이렇게 그릴 수 있어요.’를 연발해서 매번 기가 찼다.
쓱쓱. (붓을 문지른다.)

“자, 이렇게…… 나이프를 가볍게 터치해 주세요.”
“여러분이 원하는 만큼 눈이 쌓인 산을 그려주세요. 이렇게요.”
“여기선, 코발트 블루를… 이렇게, 섞어서 칠해주고요.”
커다란 붓으로 여기저기 문지른 하늘, 나이프로 가볍게 터치한 구름, 마구 눈이 쌓인 웅장한 산맥, 코발트 블루가 섞인 강물과 폭포수……한 폭의 겨울 풍경화가 뚝딱 완성됐다.
“어때요, 참 쉽죠?”



발자국

비에이 관광 안내소에서 지도를 얻었다. 패치워크, 파노라마 등 여러 개의 코스가 있었다. TV 광고에 등장했던 켄과 메리의 나무, 세븐 스타, 철학자의 나무같이 유명한 장소도 표시되어 있었다. 어디부터 어떤 순서로 돌까 잠시 고심하다가, 가장 간단한 방법을 택했다. 시속 2~30km의 속도로 천천히 길을 따라 언덕을 넘기로. 마음에 드는 곳이 나타나면 차를 세워 밖으로 나가 보기로.

겨울 비에이의 언덕은 하얀 도화지가 넘실대는 듯했다. 어떤 구름은 언덕보다 컸다. 모든 구릉의 꼭대기는 하늘과 맞닿아 있었다. 햇빛을 받은 고운 눈 입자는 억만 개의 빛을 발했다. 앞으로 눈에 담을 수 있는 건 하얀 색뿐일 것 같았다. 나무 몇 그루와 고립된 빨간 지붕 집은 뜬금없게 느껴졌다. 여백이 너무 컸다.


“으하하… 구름을 타고 놀면 이런 기분일 거야.
 이거 봐, 푹푹 빠진다, 빠져. 으하하…
 신 난다, 이런 여행 처음이야. 너무 좋다. 으하하하……”
실성한 듯 웃어 젖히던 친구는 차에서 내리면 일단 눈밭으로 뛰어들어 갔다. 허리까지 눈 속에 잠기면서도 앞으로, 앞으로 계속 나갔다. 그는 아무것도 닿지 않았던 도화지에 발자국을 새겼다. 구렁에 빠져 엎어져도 ‘으하하’ 웃었고, 중심을 잃고 넘어지면서도 마냥 ‘좋다’는 말만 했다. 영락없이 봉두난발의 아저씨였다. 이제 막 주름이 자리를 잡기 시작하는 그의 눈가가 푹 패였다. 거짓이나 예의, 책무 같은 건 없었다. 아무것도 더하지도 빼지도 않은 순수한 눈빛과 웃음이었다.




둥글게, 더 둥글게

완만한 경사에 약간 기울어진 미루나무가 있는 언덕 앞에 멈췄을 때였다. 갸우뚱하게 생각하는 모습 같다고 하여 ‘철학자 나무’라는 이름을 가진 곳이었다. 다리가 가는 짐승이 외롭게 새기고 간 발자국이 남아있었다. 이런 곳에선 시를 써야 한다는 집착이 왜 올라왔을까. 머리 근육에 어찌나 힘을 잔뜩 주었던지 옅은 졸음이 몰려왔다.

‘가방 할 때 가, 나비 할 때 나…아기가 으앙으앙 할 때 으……’
 처음으로 세상의 글을 배웠을 때 부르던 노래가,

‘방앗간에서 갓 쪄낸 백설기, 모닥불에 구운 마시멜로, 카페모카의 휘핑크림……’
 언젠가 깊은 기억 속에 간직하고 있던 첫 하얀색의 것들이,

옅은 잠기운 속에서 뜬금없이 떠올랐다. 글의 강렬함, 방앗간의 푸근함, 마시멜로의 쫄깃함, 그리고 크림의 달콤함 같은 걸 처음 알았을 때의 기억이었다. 별다른 의미도 없을 것 같았던 순간들이 하얀 언덕 앞에 무작정 그려졌다.

이내 머리가 텅 비었고, 그대로 두기로 했다. 마음에 여백을 두면 순수와 맞닿을 수 있지 않을까 생각했다. 나도 친구가 뛰어들어간 눈밭에 따라 들어갔다. 가방 할 때 가, 나비 할 때 나, 아기가 으앙으앙 할 때 으…… 처음 말을 배우던 때로 돌아갔다. 아무것도 그리지 않은 하얀 도화지 속에서 순수를 탐했다. 둥근 구릉을 보면 마음이 편안해졌다. 위로만 뻗어내는 게 정도는 아니라는 걸 새삼 깨달았다. 언덕의 굽은 선을 보며 둥글게 사는 게 옳다고 다시 한 번 확신했다. 어쩌면 세상의 공기를 입으로 들이마시기 전부터 그랬을지도 모른다. 엄마의 자궁이 그러했다. 비에이는 둥그런 엄마 뱃속을 닮았다.


* 비에이 관광 안내

겨울철 비에이는 트윙클 버스, 택시, 렌터카 등을 이용하여 둘러보는 게 좋다. 춥고 눈이 많이 오는 날씨기에 자전거나 도보 여행은 불가능하다. JR 비에이역 바깥에 관광 안내소가 있으며, 한국어 팜플렛도 구비하고 있다. 당일치기 여행인 경우 기차와 버스 시간표를 미리 확인하는 게 좋다.

-비에이 관광협회 : //www.biei-hokkaido.jp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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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송인희

홋카이도의 매력에 흠뻑 빠져 삿포로에서 살고 있다.
새로운 언어와 문화, 일상을 여행한다.
먹고 마시는 것과 사소한 순간을 좋아하며, 종종 글자를 읽고 쓴다.
song_soon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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