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홋카이도의 수다를 시작하며

긴 여행의 짧은 프롤로그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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일은 일사천리로 일어났다. 결정적 순간은 한 호텔방이었다. 하코다테의 항구를 내려다 볼 수 있는 것치고는 비교적 저렴한 곳이었다. 좁은 방에 꼭 맞게 들어찬 침대 머리에 남편과 머리를 맞대고 기대어 앉았다. "여기서 살아 볼래?" 라는 물음에 "그래"라고 답한 건 얼결이었다. 그 짧은 결심이 어쩌면 긴 여행이 될 거라고 직감했다. 네 달 후, 우리는 200kg이 넘는 짐 꾸러미와 함께 삿포로에 도착했다. 대체 무슨 일을 저지른 걸까?

여행기라고 하기엔, 일상에 치우친
소설이라고 하기엔, 현실과 허구의 경계가 모호한
무작정 홋카이도로 떠나온 한 여자의 ‘수다 에세이’


호텔방에서 내려다 본 하코다테

2013년 초여름, 홋카이도에선 까마귀가 울었다. 어느새 언덕 위로 검은 날갯짓이 스며들었다. 항구 도시를 감싼 구름 사이로 해가 비추었다 사라졌다. 그때마다 단단한 무언가가 마음을 스쳤다 떠나는 듯했다. 띵동띵동, 건널목 신호가 아스라이 울려 퍼지면 거리로 나가 어디에라도 들이대고 싶었다.

시골 마을 비에이의 초여름

2013년 가을, 서울 하늘은 계절을 알고 청명했다. 높고 파란 하늘을 보니 아쉬움이 엄습했다. 창가의 난타나도 한참 피우지 않던 꽃을 내밀었다. 6월과 가을 사이에는 유난히 기억에 남을만한 일들이 줄지어 일어났다. 그 앞에는 기쁨과 즐거움, 우울과 분노, 삶과 죽음이란 단어가 어울렸다. 그리고 남은 건, 떠남이었다.


일본의 최북단 섬, 홋카이도에 사는 이야기

이야기의 시작은 지난 6월, 우리 부부가 홋카이도 여행을 왔던 때로 거슬러 올라간다.

“우리 여기 와서 살아 보자. 어때?”

그는 흥분된 마음을 감추지 못했다. 아니, 감추려는 기색조차 없었다. 검은 눈동자 바로 밑의 볼부터 귀 전체까지, 부끄러운 짓을 하다 들킨 사람처럼 빨개졌다. (세상에나) 자전거를 타며 청혼하던 순간에도 저 정도는 아니었지 싶다.

“그래.”

고작 그 한 마디. 수능시험장의 한기, 첫 미팅의 설렘에 버금가는 기억에 남을만한 순간이었다. 인생의 결정적인 선택은 뜻밖에 짧은 단어로 이루어질 수 있나 보다.

하코다테 항구

직장을 정리하고, 남편은 집을 구하러 먼저 떠났다. 애지중지 마련한 혼수는 중고 시장으로 팔려갔다. 이민에 가까운 짐을 꾸리는 건 내 몫이었다. 우체부 아저씨를 괴롭혔던 30kg짜리 짐 상자 스무 개는 비행기에 실어 보냈다. 짐을 싸면서 혼자였던 시간이 힘들지는 않았다. 눈앞의 짐이 마음의 짐을 덜어주었다고 할까. 안 좋은 일도, 좋은 일도, 시간을 맞추어 일어나주었던 것 같다. 딱 견딜 수 있을 정도로. 그래서 행복한 기억만 걸러내 담아갈 수 있을 만큼의 시간만이 내 앞에 있었다.

여러 종류의 환송회로 안녕의 인사를 나눴다. 더불어 독서, 드라마, 맛집 탐방 등으로 ‘잉여로운’ 시간을 떠나 보낸 뒤에야 11월이 왔다. 그렇게 일본의 북쪽 섬, 홋카이도(北海道)로 떠나왔다. 미련은 없었다. 정시가 되면 열차가 문을 닫고 경적을 울리며 떠나는 것처럼.

삿포로에 다시 발을 디뎠을 땐, 단풍과 함께 겨울이 성큼 눈앞에 다가와 있었다. 이번 겨울은 어느 때보다 추울 거라고들 했다.


첫눈

불법 유턴을 저지른 한 여자의 수다

‘아프리카를 자전거로 여행하는 신혼부부, 사표를 내고 세계여행을 떠난 사람, 60대 엄마와 함께 배낭여행을 떠난 아들...’ 요즘 사람들 홀연히 떠나기도 참 잘하더라, 했었다. 어쩌다 보니 ‘그래’라는 단어 하나로 홀연한 사람들 속에 내가 끼어들었다. 질서정연한 사거리 교차로에서 불법 유턴이라도 한 기분이다.

이 연재에서 접하는 홋카이도는 지극히 주관적인 이야기다. 약간의 사진과 함께 여행에 도움이 될 수 있는 사소한 정보도 담을 생각이다. 부디 내 수다를 접하는 사람들이 훔쳐갈 만한 이야기이기를 바란다.

삿포로의 늦가을 어느 날

긴 전화 통화를 마치는 여자의 수다처럼, 생활 여행 이야기는 밑도 끝도 없다. 일상엔 쉼표가 없고, 인생은 예측 불가능한 일상으로 이루어진다. 그래서 이 수다 에세이의 결론은 항상 같을 것 같다. ‘자세한 이야기는 다음에 만나서 하자. 뚜뚜뚜…’


맥주만큼은 실컷 이라면, 떠나도 괜찮다

삿포로 생맥주

무난한 인생을 살아왔다. 특별히 떠나야 할 이유도 없었다. 잔잔한 파도 같던 내 인생의 물결은 언제 왔나 싶게 다시 뒷걸음질 쳤다. 그렇게 계속 파도가 왔다 가길 반복하면 거기 있던 모래는 예전의 그 모래가 아닐 뿐이다. 오늘도 일상에 펼쳐진 모래에 나는 글자를 새로 새기려 한다.

외롭고, 쓸쓸하고, 방황할지라도 괜찮다. 오늘 밤도 홋카이도산 맥주를 실컷 마시며 수다를 떨 거니까. 캬아!


* 하코다테(函館)

아름다운 야경으로 유명한 하코다테는 홋카이도의 남쪽 가메다 반도에 있다. 동서와 남쪽은 쓰가루 해협에 접해있다. 19세기 중반 개항한 외항 도시로, 이국적인 정취를 찾아볼 수 있다. 삿포로에서 기차로 약 4시간 소요.

-치선 그랜드 호텔 하코다테 (Chisun Grand Hotel Hakodate)
홋카이도행을 결정한 항구가 시야에 들어오는 호텔이다. 항구에 접해있는 호텔 보다 숙박비가 저렴하다. 하코다테 역에서 도보 20분, 시전차로 4정거장.

-숨은 야경
세계 3대 야경으로 알려진 하코다테 로프웨이 외에도 숨겨진 비경을 볼 수 있는 야경 명소를 소개한다.

1) 공립하코다테미래대학
2) 시로타이(城岱) 목장
3) 오모리(大森) 바닷가
4) 중앙 부두 부근

* 삿포로의 눈

인구 100만 명이 넘는 대도시 가운데 연평균 강설량이 가장 많은 곳은 일본 홋카이도의 삿포로시다. 매년 5m95cm의 눈이 내린다. 첫눈은 보통 10월 말~11월 초순이며, 마지막 눈은 4월까지 볼 수 있다. 방수 기능이 있는 방한 부츠는 필수이며, 장갑, 목도리, 귀마개, 모자에 겹겹이 입을 수 있는 옷을 준비하는 게 좋다. 2014년 눈 축제(유키 마츠리)는 2월 5일~11일까지다.

* 홋카이도의 맥주

홋카이도에서 만드는 맥주는 일본에서도 으뜸으로 알아준다. 물이 좋아 그만큼 맛도 뛰어나기 때문이다. 삿포로에는 삿포로 맥주를 비롯해 아사히, 기린 맥주 공장을 견학할 수 있다. 공장에서 갓 만든 맥주 시음과 징기스칸(양고기) 구이도 함께 즐길 수 있다. 본 연재에서도 자세하게 살펴볼 예정이다.


[관련 기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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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송인희

홋카이도의 매력에 흠뻑 빠져 삿포로에서 살고 있다.
새로운 언어와 문화, 일상을 여행한다.
먹고 마시는 것과 사소한 순간을 좋아하며, 종종 글자를 읽고 쓴다.
song_soon2@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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