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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무지개 별빛 하늘에서 내리는 위로_드뷔시의 «꿈, L.86»

드뷔시의 « 꿈 »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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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금도 여전히 많은 사랑을 받는 « 꿈 »을 드뷔시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2021.05.27)

음악은 베일을 펼치는 꿈. 감정의 표현이 아닌, 감정 그 자체다. 클로드 드뷔시(1862-1918)


드뷔시 « 꿈 », 필립 카사르 연주(Naïve, 1995)


주문을 걸듯 끝없이 반복되는 왼손 반주 위로 공기를 머금은 투명한 멜로디가 내려앉습니다. 간결한 피아노 소리로 복잡한 일상에 지친 마음을 쓰다듬는 « 꿈 Rêverie »은 19세기 말, 프랑스 인상주의 음악을 대표하는 클로드 드뷔시가 작곡한 피아노 작품입니다.  

한국어로 ‘꿈’이라 번역이 되었지만, 프랑스어 제목인 ‘rêverie’는 ‘꿈’을 뜻하는 ‘rêve’와는 약간 다릅니다. 밤에 꾸는 수동적인 꿈이 rêve라면, rêverie는 ‘몽상’, 즐겁거나 슬픈 무언가를 스스로 떠올리고 생각에 빠지는 상태이기 때문이지요. 은유와 상징을 대변하는 ‘꿈’은 음악뿐 아니라 문학에도 자주 등장하는 제목이었습니다. 1890년, 이 작품을 작곡할 무렵, 드뷔시는 상징주의 시인들과 가깝게 지냈습니다. 그중 하나인 스테판 말라르메(1842-1898)는 상징이란 ‘어떤 사물을 직접 지시하는 대신 대상을 그림자 속으로 감추며, 간접적으로 암시하는 단어를 사용해 그것을 환기하는 기법’이라고 말했습니다. 슬픔이나 기쁨, 혹은 실제 사물을 지칭하지 않으면서 그 분위기를 불러내는 음악의 특성과 딱 맞는 개념이지요. 그래서 상징주의 시인들은 항상 음악을 닮은 시를 쓰고자 노력했답니다. 

19세기 말, 나날이 무겁고 복잡해지는 낭만 음악 사이에서 드뷔시는 인간 내면을 그려 보일 수 있는 다른 소리를 들려주고 싶었습니다. 불협화음을 협화음으로 해결하며 진행하는 전통적 음악 논리를 던져 버리고 화성을 섞고 나란히 배치해 이성에 앞서 귀를 먼저 즐겁게 만드는 소리 색채를 추구했지요. 촘촘하게 연결되었던 관현악 구조를 해체하고 재조립해 전에 듣지 못한 독특한 음향을 만들어 내어 상상력을 자극했습니다.   

피아노에서도 마찬가지입니다. 드뷔시는 극도로 유연하고 섬세하게 피아노 터치를 조절할 줄 아는 피아니스트였습니다. 마치 피아노에 해머가 없는 것처럼 부드럽게 들리도록, 공중에서 건반을 내려치지 않고 소리를 찾아 건반 안쪽으로 들어가며 연주했지요. 어려운 곡을 연주하기 위해 피아니스트가 특별히 단련한 탄탄한 새끼손가락은 드뷔시의 작품에서는 오히려 골칫거리가 되었습니다. 멜로디만 강조하고 화성을 신경 쓰지 않는 외향적인 소리가 드뷔시가 드러내고 싶은 내면적 세계에 어울리지 않았기 때문입니다. 숨결처럼 부드러운 피아니시시모(ppp)부터 천둥 치는 포르테시시모(fff)까지 미세하게 펼쳐지는 소리 팔레트를 물감 삼아 드뷔시는 보이지 않는 세계를 음악으로 그렸습니다.  


벨테-미뇽 녹음 피아노, 독일 프라이부르크, 1905

그가 직접 연주한 녹음이 아직도 남아있습니다. 19세기 후반에서 20세기 초에 유행했던 ‘벨테-미뇽’ 롤-피아노로 녹음했던 자료 덕분이지요. 녹음기술이 발달하기 전, 피아니스트의 터치와 페달 기법을 저장할 수 있었던 장치인 롤-피아노는 당시 유명 작곡가들의 연주를 지금까지도 생생히 전해줍니다. 롤이 균일하게 돌아가지 않을 때는 리듬이 약간 어색하게 들리기도 하지만, 드뷔시의 피아노 소리를 직접 들을 수 있는 귀한 자료입니다. 1996년에 나온 « Claude Debussy Plays His Finest Works »는 1904년 부터 1913년 사이에 벨테-미뇽으로 녹음된 드뷔시의 연주를 모은 음반입니다. 



그 중, 드뷔시가 연주하는 « 꿈 »을 들어 보세요. 


« 꿈 »에서 오른손으로 연주하는 멜로디는 부드러우면서도 우울하고 단순합니다. 세 번째 박을 향해 올라갔다가 잠시 머무르고 다시 내려오며 유연하게 반복되는 왼손 모티브 덕에, 오른손 멜로디는 마치 물결 위에 몸을 맡긴 조각배처럼 편안하게 리듬 위를 유영합니다. 조성을 흐리는 화성과 음역을 바꾸어 이리저리 움직이는 선율을 들으며 감상자는 고요히 몽상에 빠져듭니다. 

지금도 여전히 많은 사랑을 받는 « 꿈 »을 드뷔시는 별로 좋아하지 않았습니다. 급하게 써 내려간 별로 중요하지 않은, 나쁜 작품이라고 딱 잘라 말했지요. 청중의 기호에 맞춰 자신이 원하는 바를 절충한 ‘상업적’ 작품이라고 스스로 느꼈는지도 모르겠습니다. 하지만, 이 작품에는 드뷔시가 자주 사용하는 여러 아이디어가 씨앗처럼 담겼습니다. 장조나 단조에 교회선법을 혼합해 익숙한 조성체계를 벗어나고, 6도, 7도, 9도 음정으로 채색하듯 만들어낸 재즈를 닮은 화성, 넓은 음역으로 만드는 공간감 등, 다른 작품에서도 보이는 드뷔시 특유의 음악 언어가 더욱더 쉽고, 친숙하게 우리에게 다가옵니다.    

이 작품을 통해 드뷔시의 피아노 음악에 한 발 들여 놓았다 생각이 든다면, 아라베스크(Arabesques, L.66)과 베르가마스크 조곡(Suite Bergamasque, L.75)으로 프랑스 음악이 꽃 피우는 몽환적인 색채를 만끽해 보세요. 눈에 보이는 겉모습이 아니라 감춰진 내면을 드러내는 상징 세계, 잡힐 듯 잡히지 않는 생각을 소리로 부드럽게 펼치는 신비로운 음악과 만날 수 있습니다.

드뷔시가 많은 영감을 받았던 시인, 폴 베를렌(1844-1896)의 시, ‘하얀 달’을 소개합니다. « 꿈 »을 들으며 함께 감상해 보세요. 

하얀 달

빛나는 숲에서

우거진 잎 사이로

터지는

목소리


오, 사랑하는 이여


검은 버드나무

윤곽을 비추는

깊은 거울

연못에

흐느끼는 바람


꿈꾸는, 바로 이 시간


찬란한 무지개 별빛 

하늘에서

넓고 포근한

위로가

내리는 듯


감미로운 이 시간


_폴 베를렌 시집 « 아름다운 노래(1870) » 중, ‘하얀 달’에서


만약, 아무리 들어도 드뷔시가 스스로 연주한 음악이 어색하게 들린다면, 롤-피아노가 어떻게 연주되는지 영상을 통해 보세요. 그 후, 드뷔시 연주를 다시 듣는다면 훨씬 아름답게 들릴 겁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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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송은혜

음악 선생. 한국, 미국, 프랑스에서 피아노, 오르간, 하프시코드, 반주, 음악학을 공부한 후 프랑스의 렌느 2대학, 렌느 시립 음악원에 재직 중이다. 음악 에세이 『음악의 언어』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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