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찬란한 오월에 듣는 음악시인의 사랑법 - 슈만, «시인의 사랑, Op.48»

꼼꼼하게 뜯어가며 감상하는 16곡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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슈만의 가곡은 시와 음악이 결합하며 터져 나오는 특별한 감각을 우리에게 선사합니다. (2021.05.13)

로버트 슈만, 요제프 크리후버 판화

햇살이 투명한 오월이 오면 ‘Im wunderschönen Monat Mai(너무나 아름다운 오월에)’가 항상 떠오릅니다. 로버트 슈만(1810-1856)이 작곡한 «시인의 사랑(1840)»의 첫 곡이자 하인리히 하이네(1797-1856)의 «서정적 간주곡(1822-1823)»에 수록된 첫 번째 시이기도 하지요. 겨울이 지나 생명이 시작되는 것처럼, 시인의 사랑이 싹트기 시작한 찬란한 오월을 슈만의 음악으로 처음 들었던 기억은 시간이 지나도 잊을 수가 없습니다. 꽃봉오리가 터지고, 새소리가 화려하게 울려 퍼지는 봄, 연인에게 사랑을 고백했지만 어딘지 모르게 불안하고, 허전한 화자의 마음, 시에서는 행간에 감춰졌던 그의 어두움이 음악에서 그대로 배어 나왔기 때문인지도 모르겠습니다. 낭만문학 속 사랑이 그렇듯, 슈만이 그리는 시인의 사랑에는 우울하기 그지없는 감상적 몽상이 가득합니다. 너무나 아름다운 오월, 떨리는 사랑 고백과 지독한 우울의 만남, 바로 슈만의 연가곡, «시인의 사랑»입니다.


모든 꽃봉오리들 피어날 때

내 가슴속에서 사랑이 움텄네.

너무나 아름다운 오월에 

모든 새들이 노래할 때 

나 그녀에게 고백했네. 

내 그리움과 열망을.

_하이네, «노래의 책» 중, ‘서정적 간주곡’ 1편, 열린책들


슈만 «시인의 사랑» 1번 ‘너무나 아름다운 오월에’

피셔-디스카우 노래, 제랄드 무어 피아노(1956년, 실황녹음)




하이네 « 노래의 책 », © H.-P. Haack 

하이네가 쓴 연작시집, «노래의 책(1827)»은 작곡가들에게 엄청난 사랑을 받았습니다. 이 작품집에 수록된 시를 가사로 거의 2천 7백여 곡에 달하는 가곡이 쓰였을 정도이니까요. 로버트 슈만도 예외는 아니었습니다. 그는 «노래의 책»에 포함된 연작시, «서정적 간주곡» 예순 여섯 편(서문 포함) 중, 열여섯 편을 선택해 «시인의 사랑»을 작곡했습니다.


하인리히 하이네, 모리츠-다니엘 오펜하임 그림(1831)

«서정적 간주곡»은 이루지 못한 사랑에 관해 노래하는 낭만시입니다. 12세기 프랑스 연애시(로망 Roman)에서 시작된 ‘낭만’적 사랑 이야기는 도달할 수 없는 우아한 귀족 여인에 대한 기사의 맹목적이고 비현실적인 사랑이 주요 주제였습니다. 19세기 낭만 문학은 괴테의 «젊은 베르테르의 슬픔»에서 보이는 것처럼, 도달할 수 없는 이상적 사랑을 꿈꾸다가 이별을 극복하지 못하고 파국에 이르게 되는 극단적 감정과 우울을 소재로 삼는 경우가 많았습니다. «서정적 간주곡»도 이와 비슷하게, 이루지 못한 사랑으로 괴로운 화자의 심정을 세밀하게 표현하지요. 이상적 대상을 향한 사랑이 이루어진 것만 같았던 찰나의 행복-버림받음-체념을 지나며 느끼는 화자의 감정이 연작시에 고스란히 담겼습니다.

19세기 낭만 음악 장르 중, 연작시와 비슷한 ‘연가곡’이 있습니다. 영어로는 Song cycle이라 부르는 이 장르는 단어 그대로 여러 가곡을 하나의 주제 아래 자유롭게 연결한 작품을 말합니다. 이전 시대에 미사곡이나 협주곡, 소나타 형식처럼 어떻게 진행될지 예측이 가능한 구조와 보편적 정감을 다루는 주제가 주로 음악을 지배했다면, 낭만 시대 작곡가들은 우울, 갈망, 혹은 기쁨과 같은 개인적 감정을 자신만의 독특한 방법으로 드러내길 원했습니다. 짧은 음악을 연결하는 유연한 연가곡 구조는 작곡가의 요구에 적절히 부응하는 새로운 장르였지요. «시인의 사랑»은 시와 음악이 결합하여 새로운 예술로 탄생한, 낭만 시대를 대표하는 연가곡이었습니다.

그저 흔한 사랑과 이별 노래인가 생각하고 슈만이 작곡한 «시인의 사랑»을 듣는다면, 내용이나 분위기를 이해하기가 쉽지 않습니다. 낭만 시에 등장하는 다양한 상징과 하이네가 사용했던 독일 민요의 상투적인 표현이 가득하기 때문이지요. 대자연에서 영감을 얻었던 시인의 낭만주의적 성향으로 동물이나 식물과 같은 자연에 화자의 마음이 투영되는 경우도 많습니다. 또한, 비합리적 세계에서 피난처를 찾기 위해 자주 등장하는 꿈, 과거의 기억, 동화, 환상은 시공간을 이리저리 옮기며 듣는 이를 혼란에 빠뜨리기도 하지요. 이 같은 낭만 문학의 특성을 기억하고 «시인의 사랑», 열여섯 곡을 들어 보세요. 작품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됩니다. 


로버트 슈만, 시인의 사랑 1번 ‘너무나 아름다운 오월에’ 스케치

1번 ‘너무나 아름다운 오월에 Im wunderschönen Monat Mai’는 사랑에 빠진 화자를 노래합니다. 연인에게 고백한 후, 불안해하는 화자의 마음을 은밀히 드러내듯이, 음악은 불협화음으로 시작하고 마지막에도 끝났는지 아닌지 확신할 수 없는, 공중에 붕 뜬 느낌(반종지)으로 끝납니다. 아름다운 봄과 사랑을 노래하는 시와 다르게 음악이 주는 불안감은 장조로 쓰인 노래 선율에 단조로 연주하는 피아노가 미묘하게 어긋나는 데에서 옵니다. 이언 보스트릿지(테너)와 줄리어스 드레이크(피아노) 연주(EMI, 1998)로 들어 봅시다.


1.너무나 아름다운 5월에

                                 

연인에게 사랑을 고백한 1번이 지나고 2번과 3번, 4번은 전체 연가곡 내에서 작은 단위로 연가곡을 이룹니다. 사랑에 빠진 화자의 마음을 주제로 삼은 세 곡은 앞 곡의 마지막 화성과 다음 곡의 처음을 5도 관계로 배치해 화성적으로 자연스럽게 연결됩니다. 2번은 느리게, 3번은 빠르게, 다시 4번은 느리게 노래하며 서로 대조를 이루는 속도와 모두 장조로 노래하며 다양성과 통일성을 주는 음악은 화자의 사랑을 긍정적으로 표현하는 독립된 작은 연가곡이라 해도 충분합니다. 특히 4번, ‘네 눈을 보고 있으면’에서는 하이네 시의 특징인 ‘비틀기’가 눈에 띕니다. ‘너를 사랑해ich liebe dich!’라고 느리게(리타르단도) 속삭이는 연인의 달콤한 고백에 바로 뒤따르는 ‘그래서 나는 울 수밖에 없어’라는 반전에, 듣는 이는 이 사랑에 뭔가 문제가 있음을 그제야 감지하게 되지요. 하이네의 시에서 연인의 ‘눈’은 슬픔과 연관되는 경우가 많습니다. 4번 노래에서도 그 공식은 깨지지 않으며 달콤하게만 들리던 시의 마지막 행에서 결국, 사랑이 이루어질 수 없는 현실을 자각한 우울한 화자의 마음이 드러나 버립니다.


2.내 눈물에서 싹을 틔우네

                   


3.장미, 백합, 그리고 비둘기

       


4.네 눈을 보고 있으면


                                        

행복한 환상을 벗어나기 시작한 후 다음 시를 향할 때, 슈만은 이전처럼 당연하게 작품을 연결할 수 없었습니다. 그래서, 이전 곡 마지막 화성에서 남은 ‘시’음을 다음 곡의 노래 첫 음으로 희미하게 연결하고 아주 먼 화성을 반주에 배치해 행복에서 갈망으로 전환되는 감정을 비밀스레 전합니다. 연인과 함께했던, 백합 향처럼 달콤했던 순간을 회상하는 5번에서 사랑은 이제 현재가 아니라 과거에 존재합니다. 1번과 비슷하게 불협화음정으로 시작하는 이 노래는 마지막 행인 ‘놀랍도록 달콤한 시간에 In wunderbar süsser Stund’가 1번 곡, 첫 행의 ‘너무나 아름다운 오월에 In wunderbar schönen Monat Maï’에 화답하며 사랑이 시작되었던 순간을 붙잡습니다. 6번은 사랑하는 여인을 순결하고 헌신적인 성모에 비유하며 숭배하는 노래입니다. ‘성당 안 금빛 가죽 위에 그림 하나 그려져 있네’에서 말하는 그림은 슈테판 로흐너의 성모의 ‘수태고지(1440년경)’를 뜻합니다(«노래의 책», 하이네, 이재영 번역 및 해설, 열린책들). 하이네는 초기 시에서 성모 마리아를 이상적 여인의 화신으로 여러 번 표현했습니다. 쾰른 대성당, 흐르는 강물, 성모라는 세 가지 키워드를 노래하는 이 곡은 처음부터 끝까지 동일하게 유지되는 리듬과 바흐 음악처럼 긴 베이스 음으로 노래를 받치는 반주를 통해 종교적 색채를 자아냅니다. 하지만, 마지막 부분에서 성모 이미지에 연인이 겹쳐지면서 종교적 성스러움이 관능성으로 변화하는 신비로운 장면이 연출됩니다. 성악가가 이 부분을 어떻게 표현하는지 집중해 들어 보세요.


5.내 영혼을 담그리라

                       


6.라인강, 그 신성한 강에서

                                            

6번까지 사랑에 대해 노래했다면, 7번 이후부터는 이루어질 수 없는 사랑을 받아들여야 하는 화자의 심리변화가 그려집니다. 7번은 현실에서 희망이 없음을 자각한 화자가 이별을 인정하고 그녀를 원망하지 않겠다고 단호하게 노래합니다. 하지만, 사랑하는 마음을 정리하기가 그렇게 쉬울까요? 상처받은 마음을 노래하는 8번은 7번과는 분위기가 매우 다릅니다. 자신의 슬픔을 작은 꽃과 밤 꾀꼬리, 황금빛 별들이 위로해 줄 것이라 연약하고 불안하게 노래하기 때문이지요. 그렇게 마음을 삭이며 정리하는 듯하다가, 마지막 행에서 반전이 일어납니다. 자신의 마음을 유일하게 아는 연인이 ‘내 마음을 찢는다’라는 마지막 가사에서, 여리게 바스락거리며 흐르던 피아노는 화자에게 남은 분노를 음악으로 대변하듯 강력하고 난폭하게 곡을 끝맺습니다.


7.원망하지 않으리

                                                          


8.꽃들이, 작은 꽃들이 안다면

                                                

9번부터 12번은 춤곡과 슬픔이 번갈아 연주되는 두 번째 작은 연가곡입니다. 9번은 사랑하는 이의 결혼식에서 울려 나오는 음악을 들으며 화자가 상상하는 빠른 3박자 춤곡입니다. 10번은 9번에서 등장한 급하게 소용돌이치는 결혼식 춤곡과 대조되는, 기억 속 연인의 노래입니다. 피아노가 연주하는 거리가 먼 음들은 한 방울씩 떨어지는 화자의 눈물을 닮았습니다. 11번은 두 박자 민요풍 춤곡으로 돌아가 연인들의 어긋나는 사랑 이야기를 풍자하듯, 실제 슬픔과 모순되게 가볍게 노래합니다. 작은 연가곡 중 마지막 곡인 12번은 다시 슬픔입니다. 꽃이 화자를 위로하며 ‘우리 자매를 너무 미워하지 말아요’라고 당부하면서 끝을 맺지요. ‘반짝이는 여름날 아침’의 찬란한 빛과 ‘슬프고 창백한’ 화자의 심리가 교차하는 12번에서는 음악으로 표현하는 색채가 눈에 띕니다. 어느 조성인지 알 수 없는 모호한 첫 화음을 시작으로 여기저기에서 반짝거리는 이질적인 화음이 빚어내는 섬세한 색채는 해가 뜨기 시작하는 여름 아침 빛을 닮았습니다. 

1번 곡, ‘너무나 아름다운 5월에’와 짝을 이루는 12번 ‘반짝이는 여름날 아침에’는 봄꽃처럼 피어나기 시작한 사랑이 창백한 슬픔으로 전환되는 과정을 보여주기 위해 슈만이 의도적으로 배치한 순서입니다. 슈만은 작품의 순서와 배치뿐 아니라, 조표(악보에서 조성을 알리기 위해 쓰는 올림표와 내림표)에도 의미를 부여했습니다. 연인과 나눈 사랑을 노래했던 1번부터 6번까지는 조표가 모두 ‘올림표’입니다. 화자의 심리가 전환되는 7번과 8번은 조표가 없고, 연인이 떠난 후 슬픔을 그린 9번부터 12번까지의 조표는 모두 ‘내림표’입니다. 올림표(사랑)와 내림표(슬픔)로 양분된 세계가 각 노래를 지배하는 것처럼 보이지요. 


9.플루트와 바이올린이 연주된다

                                                


10.그 노래 다시 들을 때마다

                                                 


11.한 청년이 한 처녀를 사랑했네

                                              


12.반짝이는 여름날 아침에 

                                                      

13번부터 15번에는 꿈과 동화의 세계를 주제로 삼은 세 번째 작은 연가곡이 등장합니다. 낭만 문학에서 꿈은 내면과 외부 세상 사이를 연결하며, 원하는 바를 환상 속에서라도 이루는 긍정적 역할을 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13번 ‘꿈속에서 나는 울었어’에는 세 가지 꿈이 등장합니다. 연인이 죽는 꿈, 그가 나를 버리는 꿈, 그리고 연인이 아직도 자신을 사랑하는 꿈입니다. 각각의 꿈은 ‘꿈속에서 나는 울었어’라는 시행으로 피아노 반주 없이 고요히 읊조리며 시작합니다. 마치 기도문을 낭독하는 것처럼 들리지요. 화자의 슬픔을 노래하는 곡이니 조성은 물론 ‘내림표’입니다. 반면, 14번 ‘매일 밤 꿈속에서’는 ‘올림표’ 조성입니다. 13번 마지막에서 연인이 아직도 나와 함께 하는 듯한 착각이 14번에서 연인과 화해하기까지 나아가며 꿈속에서는 사랑이 아직도 유효한 듯 보이기 때문입니다. 물론 잠에서 깨어나면, 연인이 속삭였던 말조차도 기억이 나지 않지만요. 꿈을 주제로 엮은 작은 연가곡의 마지막 곡은 15번 ‘오래된 동화에서’입니다. 전체 열여섯 곡에서 가장 긴 이 작품은 꿈이 이루어지는 오래된 동화 속 환상 세계를 노래합니다. 역시, ‘올림표’ 조성으로 쓰였습니다. 자연을 표현하는 온갖 시어들이 다시 등장하는 아름다운 세계를 슈만은 바로크 무용 모음곡의 ‘지그’처럼 가볍고 즐거운 춤곡으로 노래했습니다. 하지만, 꿈은 꿈일 뿐, 해가 뜨고 꿈이 거품처럼 사라지고, 피아노 후주(노래가 끝난 후 피아노 혼자 지속하는 부분)도 거품이 꺼지듯 잦아듭니다.


13.꿈 속에서 나는 울었어

                                                        


14.매일 밤 꿈속에서

                                                            


15.오래된 동화에서

                                                            

마지막 곡인 16번 ‘해묵은 나쁜 노래’는 노래 부분은 ‘올림표’ 조성(C#단조)으로 피아노 후주는 ‘내림표’ 조성(Db장조)으로 작곡되었습니다. 양분되었던 두 세계가 마지막 곡에 이르러 이명동음(같은 음이지만 다른 이름)인 C#과 Db으로 결합하며 화해합니다. 거인 열두 명이 옮길 수 있는 큰 관이어야 겨우 담는 화자의 사랑과 고통은 결국 넓고 깊은 바다에 수장되며 시가 끝납니다. 텍스트가 사라진 후 홀로 남은 피아노 후주에서 12번 ‘반짝이는 여름날 아침에’의 후주 선율이 다시 등장합니다. 마치, ‘우리 자매를 너무 미워하지 말아요’라고 했던 꽃의 마지막 말을 화자에게 전하는 것처럼요.


16.해묵은 나쁜 노래

                                                        

슈만은 시를 너무나 사랑했습니다. «작곡가들이여, 시인이, 인간이 먼저 되시오. 음악과 함께 고양된 예술 영역으로 올라가기 전, 시를 느끼고, 읽고, 말하는 법을 좀 배우시오(1834년, 신음악잡지)»라고 했을 정도였죠. 슈만의 가곡은 사랑에 관한 일상적 경험이나 시 텍스트를 넘어, 시와 음악이 결합하며 터져 나오는 특별한 감각을 우리에게 선사합니다. «시인의 사랑»을 들으며 예술가라는 필터를 통해 찬란하게 드러나는, 사랑과 절망 사이에 존재하는 세밀한 인간의 감정을 새롭게 발견하는 아름다운 봄날이 되기를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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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송은혜

음악 선생. 한국, 미국, 프랑스에서 피아노, 오르간, 하프시코드, 반주, 음악학을 공부한 후 프랑스의 렌느 2대학, 렌느 시립 음악원에 재직 중이다. 음악 에세이 『음악의 언어』를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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