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지옥에서는 지옥의 법도를, 지고쿠바루 온천
온천 명인 안소정의 『온천 명인이 되었습니다』 연재
세상에 많고 많은 법도가 있듯, 온천에도 법도가 있을 터. 게다가 여기는 온천 성지 벳푸가 아니던가. (2019. 03. 18)
벳푸에서 가장 하고 싶었던 건 아침 온천이었다. 이른 새벽녘 공동 온천의 활기를 느껴보고 싶기도 했고, 온천에서 아침을 맞이하면 하루를 상쾌하게 시작할 수 있을 것 같았기 때문이다. 벳푸에서 맞는 첫번째 아침, 간나와 마을 중심에 있는 지고쿠바루(地獄原) 온천으로 향했다. 왼손에는 목욕 가방, 오른손에는 달랑 100엔만 쥐고 낯선 골목으로 나선 길.
이제 막 동이 터오는 하늘에 온천 증기가 뭉게뭉게 피어오르는 풍경이 평화롭기 그지없었다. 기대를 안고 온천에 도착한 시각은 아침 일곱시. 온천 입구에 놓인 불단 아래, 무인함에 입욕 요금인 100엔을 넣었다. 조심스럽게 문을 열고 온천에 들어섰더니, 사진으로만 보던 정겨운 풍경이 펼쳐졌다. 탈의실과 탕 사이는 문 하나 없이 뻥 뚫려 있고, 안에는 네 명 정도 들어가면 꽉 찰 자그마한 탕이 전부. 전형적인 벳푸 공동 온천다운 소박함이 느껴졌다.
탕 안에서는 아주머니 두 분이 알 수 없는 대화를 나누며 목욕 중이었다. 인기척에 고개를 돌린 아주머니들과 눈이 마주친 순간, 긴장한 채로 아침 인사를 건넸다. “오하요 고자이마스.” 서툰 발음 때문일까. 호기심의 눈빛과 함께 “오하요 고자이마스”가 부메랑처럼 날아들어왔다. 옷을 벗어 가지런히 갠 뒤, 조심스럽게 안으로 들어섰다. ‘배운 대로만 하자’라고 생각하며 글로 배운 온천 목욕법을 착실히 실행했다. 먼저, 탕 근처에 적당한 자리를 찾아 무릎을 꿇고 앉는다. 둘, 바가지를 찾아 손에 쥐고 물을 퍼올린다. 셋, 몸에 끼얹는다. ‘으악!’ 소리가 절로 나올 만큼 뜨거웠지만, 긴장한 탓에 비명은 자동으로 묵음 처리가 되었다. 넷, 목욕 가방을 열어 샤워볼에 비누를 묻혀 몸 구석구석을 깨끗하게 씻는다. 다섯, 몸을 헹군다. 그리고 쓴 바가지와 가방은 한쪽 구석에 잘 놓아둔다. 마지막으로, 탕에 들어간다. 뿌듯한 마음으로 탕을 향해 한쪽 발을 딛는 그 순간, 한 아주머니가 나를 향해 무어라 외치는 게 아닌가.
한 발은 탕 가장자리 위에, 다른 한 발은 바깥에 놓은 채로 ‘동작 그만’ 상태가 된 나는 영문을 알 수 없는 외침에 어리둥절해졌다. 머릿속이 복잡해지며 조금 전까지 했던 일들을 되짚어보았다. ‘뭐가 잘못된 거지? 분명히 들어가기 전 꼼꼼하게 샤워도 했고, 조심히 발도 디뎠는데…….’ 어떻게든 이해하려 귀를 쫑긋거렸지만 구몬 일본어나 겨우 하는 수준인 내가 알아들을 수 있는 말이 아니었다. 쉴 새 없이 일본어가 쏟아지자 땀을 뻘뻘 흘리며 겨우 입을 열어 고백한 말은 “와타시와 간코쿠진데스(저는 한국인입니다).”
난데없는 국적 고백에 아주머니가 안 되겠다는 듯 노선을 바꿨다. 천천히, 크게 말하는 동시에 몸짓을 동원해 다시 설명하기 시작했다. 탕 둘레를 손가락으로 가리킨 다음, 다리를 손가락으로 가리키더니 한쪽 다리를 들어 탕 둘레에 얹었다. 그리곤 양팔로 크게 X자를 그리면서 고개를 좌우로 도리도리 흔들었다. 그러자 도가 트이고 깨달음이 찾아왔다. ‘아, 탕 둘레에 발을 디뎌선 안 되는구나!’ 그제야 조금 전, 내 한쪽 발이 어디에 있었는지 기억이 났다.
세상에 많고 많은 법도가 있듯, 온천에도 법도가 있을 터. 게다가 여기는 온천 성지 벳푸가 아니던가. 벳푸 온천에는 보편적인 매너를 넘어선 법도가 있는데, 그중 하나가 바로 ‘탕 둘레에 발을 딛지도 앉지도 말 것’이다. 옆에 있던 다른 아주머니가 거들어서 설명하기를, 다른 지역에서는 특별히 금하지 않지만 벳푸 온천에서만큼은 꼭 지켜야 하는 규칙이라고 했다. 이후에 수많은 벳푸 온천을 다녔지만, 어떤 온천에서도 탕 둘레에 발을 딛거나 앉는 사람을 볼 수 없었다. 나중에야 그 이유를 들을 수 있었는데, 벳푸에서 탕 둘레는 ‘머리를 두는 곳’이라 발이나 기타 신체 부위를 두는 것을 비위생적으로 여긴다고 한다.
내가 말뜻을 알아들으니 뿌듯했던 걸까? 아주머니는 요청하지도 않았는데 더 많은 규칙을 전수해주기 시작했다. 탕 안에서 적당한 자리를 잡는 법, 물을 튀기지 않게 바가지를 쓰는 법, 찬물을 사용하는 법, 자리 정리하는 법, 인사하는 법 등. 모두 온천 명인이 되기 위한 필수 과정이었다. 모든 말을 완벽히 알아들을 수는 없었지만 눈빛과 몸짓만으로도 충분히 이해할 수 있었다.
얼떨결이지만 무림의 고수에게 온천 법도를 전수받는 절호의 기회! 어쩐지 이 관문을 통과하지 못하면 안 될 것 같은 예감에, 하나부터 열까지 충실히 수행하려 노력했다. 조용히 탕에 몸을 담그고, 발끝부터 신경쓰며 물을 튀기지 않도록 조심스럽게 일어선 뒤, 자리로 돌아가 몸을 헹구고 자리를 정리했다. 그렇게 돌아서는데 어깨 뒤에서 아주머니의 외침이 다시 한번 들렸다.
“스바라시(훌륭해)!”
의기양양해진 나는 만면에 미소를 지으며 인사를 건넸다.
“아리가토 고자이마시타(감사했습니다).”
꿈결처럼 뭉게뭉게 피어나는 온천 수증기와 코끝을 건드리는 유황냄새가 가득한 지옥 온천 마을 간나와에서 나는 제대로 지옥의 법도를 배웠다. 뜻하지 않은 특훈을 통과했기에 지고쿠바루 온천에서의 아침은 그 어느 때보다도 상쾌하고 뿌듯했다.
주소 | 오이타현 벳푸시 간나와히가시 후로모토166(大分? 別府市 ?輪東 風呂本166)
영업시간 | 6:30~21:00, 연중무휴
찾아가기 | 지고쿠바루(地獄原) 버스정류장 하차 후 도보 1분
입욕요금 | 100엔(요금함 투입)
시설정보 | 대야, 의자 있음
수질 | 염화물천
영업형태 | 공동 온천(무인)
온천 명인이 되었습니다안소정 저 | 앨리스
좋아하는 일은 누구에게나 특별합니다. 또 무언가 좋아하게 되면, 매일 반복되는 하루가 새롭게 느껴집니다. 이는 일상에 긍정적인 영향을 주며 매일을 더 윤기 있게 해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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보통의 회사원. 볕 좋은 가을날 온천에 들어갔다가 뒤늦게 적성을 발견했다. 이후 한국과 일본의 목욕탕을 여행하고 기록해왔다. 내친김에 목욕 가방 들고 일본의 소도시 벳푸를 거닐다 제7843대 벳푸 온천 명인이 되었다.
<안소정> 저13,320원(10% + 5%)
연분홍빛 타일, 모락모락 김이 나는 뜨끈한 물, 습기로 뿌옇게 된 창문, 열기에 발갛게 달아오른 얼굴, 뜨거운 물을 한 바가지 가득 떠서 몸에 끼얹는 짜릿한 순간. 그리고 개운한 몸과 마음으로 마시는 고소한 우유 한 모금. 이쯤 생각하니, 온천에 가고 싶어진다. 하지만 막상 ‘온천’이라고 하면 ‘값비싼 료칸에서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