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아이가 잠든 새벽에
배달음식은 맑은 날에
아이에게 맡기고 지켜 볼 일
사실 이런 일에 ‘부모로서’라는 말을 붙이는 건 민망한 일이다. 남녀노소가 호흡하는 대기의 문제는 아이만 보호대상인 것도 아니고, 부모가 아니라도 무언가를 해야 할 문제다. (2019. 03. 15)
언스플래쉬
건강에 ‘유의’하라는 환경부의 안전 안내 문자를 일주일 연속 받았다. 어린이, 노약자 등은 실외활동 ‘금지’라는 서울시 문자도 받았다. 하지만 건강에 유의한다고 숨을 쉬지 않을 수는 없고, 미세먼지 농도가 심한 날마다 집에만 있을 수도 없다. 미세먼지는 간혹 찾아오는 불청객이 아니라 일상의 일부가 되었다. 공기청정기와 KF-94 마스크로 약간의 위험을 제어할 수 있을 뿐 피할 방도는 없다. KF-94라니, 이런 용어가 일상어가 되었다.
나는 아직 이 상황이 낯설다. 미세먼지 수치를 챙겨보지 못하고 마스크 없이 나서기도 한다. 하지만 지안이는 다르다. 미세먼지 신호등이 오늘은 빨강인지 아닌지 늘 관심을 기울인다. 아빠가 쓴 마스크가 미세먼지 마스크가 맞는지 물으며, “아빠, 아무 마스크나 쓰면 안 돼요” 가르치기도 한다. 나는 주로 나쁨인 날에 불만을 표하지만 지안이는 좋음인 날에 기쁨을 드러낸다. 기대치의 기본값이 다르다. 지안이가 태어났을 때 봄은 이미 이 모양이었다. 내가 가장 사랑하는 계절에 대하여 말할 때, 지안이는 지난 봄을 떠올리는 게 아니라 상상력을 동원해야 한다.
아빠의 이런 아쉬움을 모른 채, 아이는 그저 마스크만 믿고 있다. 미세먼지 농도가 많이 심한 날에 “지안아, 오늘은 공기가 너무 안 좋으니까 집에서 놀자”하면 “마스크 쓰면 되지 뭐” 대꾸한다. 외출 한 번 한 번에 대해서까지 민감해 할 필요도 없고, 그렇게 살 수도 없지만, 아이가 평생을 마실 먼지의 양과 그게 누적되어 훗날 발생할 수 있는 건강 문제에 대해서 걱정하지 않을 수는 없다. 지금의 봄은 따스한 봄볕과 봄꽃, 파란 하늘의 계절이라기 보다는 먼 미래에 대한 걱정, 도대체 어느 정도로 걱정해야 하는지도 모르는 걱정으로 마음이 이따금 우중충해지는 계절이다.
아이를 낳고 나서 그간 많이 생각해온 것들은, 아이에게 맡기고 지켜 볼 일과 부모가 개입해야 할 일을 판단하는 것이었다. 늦게 자고 늦게 일어나는 아이의 생활리듬에 대하여, 하루 권장량을 훨씬 넘게 우유를 마시는 습관에 대하여, 쉬가 마려우면서도 화장실에 가지 않으려는 고집에 대하여 개입의 여부와 방식과 시기를 고민해야 했다. 아이가 마주하는 상황에 대한, 결코 완전할 수는 없겠지만 중요한 솔루션으로서, 부모의 역할이 주요 관심사였다.
미세먼지 자욱한 하늘을 보면서는 다른 차원의 문제에 대해 생각한다. 중국과의 협력이 필요하고, 경유차와 휘발유차의 운행량을 줄여야 하며, 석탄화력발전소의 의존도를 낮춰 나가는 일에 한 개인이 미칠 수 있는 영향력은 지극히 미미하다. 아이의 삶에 큰 영향을 미치지만 부모의 개입이 결코 솔루션이 될 수 없는 문제에 대해, 부모의 손이 닿지 않는 문제에 대해 무엇을 어떻게 해야 하는지 오래 생각하게 된다. 그저 무력하게 안타까워하고, 아이의 마스크를 잘 챙기고, 공기청정기를 방마다 놓고, 이주의 마음을 키웠다 삭였다 할 수 밖에 없는 걸까. 안타까움은 큰데 들고 있는 패는 너무나 조촐하다.
하지만 어차피 원샷원킬의 해법은 없다. 인공강우라든지, 거리에 대용량 공기정화기를 설치하겠다는 식의 이야기가 나오지만 이런 대책에 대해서는 이미 충분히 많은 우려가 쏟아졌다. 먼지는 빨아당기지 못하고 사람들의 관심만 빨아당기는 대책이란 평이다. 당장 효과를 볼 수 있는 특단의 대책 같은 것이 없다면, 결국 부분적인 실천들을 오랫동안 지속하는 일의 중요성에 눈을 돌릴 수 밖에 없다. 나라는 나라대로, 시민들은 시민대로 해야 할 몫이 있을 것이다.
운전을 적게 하고 가급적 대중교통을 이용할 것, 다음 차를 살 때는 경유차는 물론 휘발유차도 피할 것, 에너지 소비량을 조금씩이라도 줄여갈 것, 대기질 개선을 위해 진지한 노력을 기울이는 연구집단이나 정치세력을 후원할 것. 나 개인의 차원에서는 이런 일들에 대해 다짐하게 되었다. 당장 내 눈 앞에 먼지 한 톨 없애주지 않을 일이라 가벼이 여겼던 것들이다. 내 다짐은 자주 용두사미가 되곤 하지만 이번만큼은 그러지 않는 것이, 이 문제에 관한한 부모로서 내가 해야 할 책임이 아닐까 생각한다. 막중하고 무거운 책임이 아니라 이 정도 책임이라면 나도 할 수 있지 않을까.
사실 이런 일에 ‘부모로서’라는 말을 붙이는 건 민망한 일이다. 남녀노소가 호흡하는 대기의 문제는 아이만 보호대상인 것도 아니고, 부모가 아니라도 무언가를 해야 할 문제다. ‘부모로서’라는 말은 ‘아이의 미래’라는 걸 들이밀어서야, 비로소 굼뜨게 움직이는 나를 드러내는 것이라 부끄럽다. 우리는 이 도시의 교통량이나 에너지 소비량, 정치지형에 대하여 1/n만큼의 기여를 한다. 그 만큼의 책임도 공유한다. 조촐하나마 각자가 노력해야 할 지분이 있다. 그러므로 이 노력은 ‘부모’라는 카테고리보다는 한 사람의 ‘시민’이라는 카테고리에 속하는 노력일 것이다. 동료 시민의 미래, 하다못해 나와 아내의 미래를 위해서도 필요한 그 책임을 여태껏 소홀히 하다 이제서야 얄팍한 다짐을 한다.
지안이는 아마도 궁금해 할 것이다. 예전엔 자가용으로 가던 곳을 대중교통으로 가기 시작하고, 겨울철이나 여름철 실내 온도에 1도 가량이나마 변화를 준다면 “왜요?”라고 물을 것이다. 한창 묻고 싶은 게 많은 네 살이다. 그때 나는 너의 ‘부모’로서 ‘너’를 지킨다가 아니라, 한 사람의 ‘시민’으로서 ‘우리’를 지키기 위해 이런 노력을 해야 한다고, 그것이 곧 너와 나도 지키는 일이라고 말할 것이다. 아주 조그만 먼지들이 하늘을 가득 채워 우릴 괴롭게 하듯, 한 사람 한 사람이 조금씩 먼지를 청소하면 하늘이 깨끗해 질 거라고 얘기할 것이다. 하늘이 너무 넓어서 바로 깨끗해지진 않겠지만 그런 노력에 시간을 들이는 것을 번거로운 일로 여기지 않아야 한다고 따뜻한 음성으로 들려주고 싶다. 물론 지안이는 다 알아들은 표정으로, 내 눈을 지긋하게 바라보며, 이렇게 말해줄 것이다. “왜요?”
그러니까 좋은 부모가 된다는 것은, 내 생각엔, 아이를 위해 부모가 얼마나 많은 것을 해줄 수 있느냐에 국한될 수 없다. 제 아무리 돈이 많아도 맑은 하늘을 살 수는 없다. 우리의 삶을 가능하게 하는 것들을 가족 안에서 다 얻을 순 없는 것이다. 가족 바깥의 많은 사람들과 협력함으로써 가능하다는 사실을, 나의 삶의 질을 높이는 것은 대개 우리 모두의 삶의 질을 높이는 과정 속에서 달성된다는 사실을 체득케 하는 부모가 좋은 부모 아닐까. 가족의 구성원이라는 감각만이 아니라 사회의 구성원이라는 자각을 지니도록 도울 수 있어야 한다. 부모의 시야는 아이나 내 가족에만 고정되어서는 안 되는 것 같다……
고 쓴 날, 배달음식을 주문했다. 미세먼지가 유독 자욱한 날이었다. 그 가게와 우리 집의 거리는 1km남짓. 배달 해주신 분은 그 길을 오가며 얼마나 많은 먼지를 마셨을까. 그게 그 분의 일이고, 그래서 정작 그 분은 대수롭지 않게 여기실 수도 있지만, 그렇다고 미세먼지가 그 분의 호흡기에 순하게 스며들지는 않았을 것이다. 반성하고 한 가지 다짐을 더 추가한다. 배달음식은 맑은 날에.
다행히도, 책 읽는 게 점점 더 좋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