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아빠 아빠, 다 끝났어

영화 <리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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실비아 플라스의 시 <아빠>의 시구가 떠오른다. “만일 제가 한 남자를 죽였다면, 전 둘을 죽인 셈이에요.” “아빠, 아빠, 이 개자식, 이젠 끝났어.” (2019. 01. 2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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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리지>의 한 장면

 

 

누군가 죽이고 싶을 수 있다, 죽이고 싶도록 누군가에게 경멸감이 생길 때가 있다. 그 누군가가 아버지라면 엄청난 일이다. 현실에서는 설령 이런 감정이 있다가도 잦아들지만, 영화에서는 죽여버린다. 영화라서 다행이라고 생각하면 또 곤란하다. 이 영화 <리지>는 실화 살인 사건이 소재니까.
 
1892년 8월 4일 미국 매사추세츠, 부부가 도끼로 살해된 ‘보든 가 살인 사건’은 엽기적인 기록으로 남았다. 용의자는 둘째 딸, 리지 보든. 대부호의 명문가 집안에서 친부의 억압과 횡포, 계모의 재산 찬탈에 두려움과 불안을 느껴 도끼로 두 사람을 사정없이 내리친 것으로 추정되었다. 당시 리지는 체포되었으나 증거가 불충분하고 ‘명문가의 배운 여성이 그런 살인을 할 리가 있겠는가’라는 배심원의 판정에 무죄로 풀려났다.
 
120여 년 전의 ‘리지 보든’은 그렇게 전설이 되었다. 그 후 책과 연극, 오페라, 드라마에서 극적인 소재가 되었다. 미국 대중예술 창작자들과 범죄물 마니아에게 ‘리지 보든’은 변용되고 반복되어도 흥미로웠다. 왜 죽였을까, 어떻게 도끼로 죽을 수 있었을까에 대한 상상력이 가지를 뻗어나갔다.
 
영화 <리지>는 헐리우드에서 가장 힙한 패션스타일로 주목받는 배우 클로에 세비니가 ‘리지 보든’ 역을, 매력적인 크리스틴 스튜어트가 리지와 특별한 관계와 유대감을 갖는 하녀 ‘브릿지 설리번’ 역을 맡았다. 두 여성이 한 화면에 가득 들어찰 때, 그 강렬한 얼굴들은 압도적이다. 게다가 빅토리아 시대 의상 스타일은 자체로 미술 작품이다. 잔잔한 꽃무늬와 퍼프 소매 웃옷과 잘록한 허리선과 우아하게 떨어져내리는 긴 치마는 어두운 조명의 큰 집과 밝은 정원의 극명한 대비 속에서 분위기를 고조시킨다.
 
왜 죽였을까. 영화 <리지>는 무죄로 풀려난 리지를 범인으로 확정하고 이야기를 풀어나간다. 소작농의 땅을 빼앗고도, 하녀를 겁탈하면서도 전혀 죄의식 없는 아버지는 결혼하지 않은 딸이 명문가의 여성답게 조용하고 정숙하기를 원한다. 극장 외출조차도 억압한다. 게다가 계모와 외삼촌은 호시탐탐 아버지의 재산을 노리고 있다. 유산 상속을 딸이 아닌 자신의 집안 쪽으로 끌어들이려는 계략이다. 명민한 리지는 그걸 알아채고 불안감이 극도에 달한다.
 
여기에 몇 달 전 입주한 하녀 브릿지와 애틋한 관계를 맺는다. 글을 완전히 깨치지 못한 브릿지를 위해 책을 선물하는 마음이 그윽하다. 함께 헛간에서 시를 읽거나 감정을 나눌 때 그들은 세상 어디든 함께할 수 있을 듯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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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리지>의 한 장면
 

 

사랑은 삶의 억압된 분노를 잠재우며 평화롭고 밝은 세계로 나아갈 힘을 주지만, 때론 그 새로운 세계를 방해하는 장애물에 대한 분노를 완벽하게 폭발시키는 기제가 되기도 한다. 리지에게 자신의 사랑인 브릿지를 겁탈하고 모독하는 아버지란, 죽여 마땅한 사람이 되어버렸다.
 
영화 속의 그들이 꿈꾸었던 ‘함께하는 것’은 현실 속에서 불가능하다. 실제로 리지 보든과 브릿지 설리번은 살인 사건 이후 헤어져 죽을 때까지 만나지 못했다고 한다.
 
살인 사건의 징조는 두 사람을 둘러싼 공기 속에서 드러났다. “누구도 당신을 해치지 않게 할게요, 약속해요”라고 브릿지에게 고백하는 리지는 이미 살의를 가진 눈빛이다. 사랑의 힘으로 살인하는 인간의 이중성에 대해서 오랫동안 사람들은 질문해왔다. 사랑하는 힘을 가진 인간에게 악마성은 또 얼마나 강력하게 깃드는가.
 
실비아 플라스의 시 <아빠>의 시구가 떠오른다. “만일 제가 한 남자를 죽였다면, 전 둘을 죽인 셈이에요.” “아빠, 아빠, 이 개자식, 이젠 끝났어.” 파시스트적인 권력의 아버지를 죽임으로써 자신의 삶도 죽여버린 어떤 여성의 이야기. <리지>는 묘하게 어둡고 마성적인, 음악과 의상과 배우가 아름다워서 더욱 혼돈스럽게 붙들린 영화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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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정은숙(마음산책 대표)

<마음산책> 대표. 출판 편집자로 살 수밖에 없다고, 그런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일주일에 두세 번 영화관에서 마음을 세탁한다. 사소한 일에 감탄사 연발하여 ‘감동천하’란 별명을 얻었다. 몇 차례 예외를 빼고는 홀로 극장을 찾는다. 책 만들고 읽고 어루만지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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