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세상에 예쁘고 이로운 실천

영화 <인생 후르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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노부부의 텃밭에는 노란 팻말들이 곳곳에 서 있다. “죽순아 안녕?” “여름 밀감, 마말레이드가 될 거야” “작약, 미인이려나?” 노부부가 키우고 가꾸는 것들에게 천진하게 붙인 알림 문장이다. 이 천진함이 사랑스럽다. (2019. 01. 10)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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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인생 후르츠> 포스터

 

 

새해 처음 쓰는 ‘나홀로 극장’에는 무엇을 담을까, 고민을 꽤 했다. 기왕이면 새해 메시지 같은 것이라면 좋으련만 싶어서. <그린북>의 편견 깨부수기, 예술적 재능과 어떤 우정을 이야기할까. 배우 로버트 레드포드의 은퇴작 <미스터 스마일>을 이야기할까. 왔다갔다 반복하다가 막상 <인생 후르츠>로 정한 마음은 ‘실천’이라는 화두에 끌려들어간 게 분명하다. <인생 후르츠>의 노부부가 실천하고 증명한 세계에 매혹되었다. 세 작품 모두 실화다. <인생 후르츠>는 게다가 다큐. 영화가 시작되면 얼마 전 세상을 떠난 키키 키린의 내레이션이 제일 먼저 들린다. 너무 좋다, 이 목소리.
 
작년 연말에 일본의 사가현 작은 마을을 돌아다녔다. <인생 후르츠>의 90세 건축가 츠바타 슈이치의 마지막 설계작, 정신병원 <사나레 클리닉>이 사가현 이마리 시에 있다는데 못 보고 돌아왔다. 아쉽다. 그런데 다시 생각하면 병원을 꼭 들러볼 필요가 있겠나 싶다. 그 건축물은 유명한 건축가의 것처럼 예술적이라고는 할 수 없고, 그러니까 관광객이 봐야 할 무엇은 아닌 것이다. 설계자의 뜻처럼 그건 병원에서 생활하는 사람을 위한, 자연스럽고 평온한 공간이기 때문이다. 영화 속 츠바타는 병원 건축 설계를 맡으면서 “나는 사례금, 설계비 안 받아요”라며 부디 자신의 설계처럼, 나무와 숲이 사람과 더불어 사는 건축물을 바랐다. “다음 세대가 풍요로울 수 있도록 이어주세요”라는 당부를 하면서.
 
츠바타 슈이치가 마지막 건축물에 힘을 쏟은 것은 1960년대 설계한 ‘아이치현 고조지 뉴타운’에 대한 아픈 기억 때문이다. 오래 간직했던 그 설계도를 펴보이는 츠바타의 눈빛은 안타까움 그대로다. 당시 경제 성장기의 뉴타운 건설은 설계도와는 달리 성냥갑 도시로 이루어졌다. 집 사이로 숲이 있고, 바람이 다니는 길을 만들고 싶었다는 설계자의 뜻은 몽상으로 비쳤다.
 
츠바타 부부는 그래서 결심했다. 한 사람 한 사람이 힘을 모아서 도시 계획과는 또 다른 세계를 만들자고. 황량하고 값싼 뉴타운 땅 300평을 사서 나무를 심고 농사를 짓기 시작한다. 벌써 50년이 흘렀다. 그리고 40년 전에 집도 지었다. 겨우 15평, 방 한 칸짜리 노부부가 생활하는 곳.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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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영화 <인생 후르츠>의 한 장면
 

<인생 후르츠>는 나무와 꽃과 텃밭, 그리고 작은 동물들과 이웃이 어우러져 사는 세계를 건설한 노부부의 인생 이야기다. 상냥한 목소리에 실린 히데코 할머니의 강단은 “집마다 작게라도 숲을 만든다면 커다란 숲속에 들어가 있는 기분이 들 것 같아요”라는 말에서 드러난다.
 
시스템을 변화시키는 힘을 모으는 일만큼이나 개인이 실천하는 것은 매우 중요하다. 지치지 않고, 영화 속 내레이션처럼 “고츠고츠 유쿠리(차근차근 천천히)” 실천하기란 꿈만 가지고도 언변 가지고도 안 되고 오로지 삶에 대한 사랑으로 가능하다. 그런 지구력과 즐거운 인내라는 건 사랑 없이는 불가능.
 
연금으로 생활하는 노부부의 당당하고 담백한 삶. 연금이 나오는 날, 오랜 단골집 생선가게 등에 들러 시장을 봐 오는 일은 보기만 해도 흥미롭다. 그들은 생선을 팔고 사는 것이 아니라 관계를 맺는다. 당신에게 받은 생선을 이렇게 요리해서 먹었어요,라고 매번 츠바타의 그림엽서를 받은 생선가게 주인과는 돈 주고는 살 수 없는 신뢰가 먼저다. 사람을 믿으니까 물건을 사는 것.
 
노부부가 만나 결혼한 사연도 현재의 삶을 빛나게 했다. 국민체육대회에 참여했다가 잘 곳이 없던 도쿄대 요트부 주장과 숙소를 내준 200년 된 양조장의 외동딸의 만남도, 한겨울 간단한 절차로 이루어진 결혼도, 가난한 생활 속에서도 이상적인 꿈을 몽상으로 치부하지 않고 서로 북돋운 것도 ‘차근차근, 천천히’ 사랑의 열매를 맺은 것이다.
 
노부부의 텃밭에는 노란 팻말들이 곳곳에 서 있다. “죽순아 안녕?” “여름 밀감, 마말레이드가 될 거야” “작약, 미인이려나?” 노부부가 키우고 가꾸는 것들에게 천진하게 붙인 알림 문장이다. 이 천진함이 사랑스럽다.
 
다큐 촬영 기간 동안 세상을 떠난 츠바타 건축가의 명복을. 삶의 여러 과제를 안고 있는 우리에게 희망을! 이상을 바라보며 차근차근 실천하기라는 새해의 예쁘고 이로운 메시지를 <인생 후르츠>를 보며 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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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정은숙(마음산책 대표)

<마음산책> 대표. 출판 편집자로 살 수밖에 없다고, 그런 운명이라고 생각하는 사람. 일주일에 두세 번 영화관에서 마음을 세탁한다. 사소한 일에 감탄사 연발하여 ‘감동천하’란 별명을 얻었다. 몇 차례 예외를 빼고는 홀로 극장을 찾는다. 책 만들고 읽고 어루만지는 사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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