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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제보다 목적지에 가까워진다

크루즈 여행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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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언제까지 여행하며 살 것인가?’를 묻는 이들이 많다. 사람들이 걱정하는 건 떠돌며 사는 삶의 불안함일 것이다. 하지만 거꾸로 우리의 불안함은 어딘가에 정착하여 고인 물이 되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함이다. (2017. 12. 26.)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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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이 큰 배가 앞으로 나아 가는지, 뱅글뱅글 제자리를 맴돌고 있는지.


우리는 왜 여행하는가?

 

배 안에는 호텔처럼 수많은 객실이 있다. 레스토랑에서 턱시도를 차려입고 정찬 식사를 즐기거나 중식, 일식, 서양식이 차려진 뷔페를 맛볼 수 있다. 그게 귀찮다면 방 안에 누워 룸서비스를 받을 수도 있다. 먹기만 하면 살이 찌니 옥상 데크로 올라가 트랙 위에서 조깅을 하고, 수영장 안에서 물놀이를 하거나 자쿠지에서 휴식을 즐긴다. 암벽등반, 미니 골프, 아이스 스케이팅과 같은 액티비티가 지겨워지면 뮤지컬과 디너쇼를 관람한다. 카지노, 주류, 인터넷을 제외하고는 이 모든 서비스가 무료이다. 담당 웨이터와 하우스 키퍼에게 주는 팁도 크루즈 금액에 포함되어 있다. 고로 결제가 끝나면 배 위에서 돈 쓸 일이 없다. 바다 위에 떠 있는 별 4~5개짜리 거대한 리조트 호텔이 바로 크루즈이다.

 

남들은 일생에 한 번이라도 타 보길 꿈꾼다는 크루즈를 그 남자와 나는 대서양을 가로질러 미주로 향하며 한 번, 파나마 운하를 건너 남미로 향하며 또 한 번을 이용했다. 한 달씩 살아보는 여행자 아니랄까 봐 배 위에서도 한 달을 보냈다. 배에서는 시간의 흐름이란 게 무의미하다. 망망대해 위에 떠 있는 동안 배가 나아가고 있는 것인지 멈춰서 제자리를 뱅글뱅글 돌고 있는 것인지 알 수 없다.

 

일 년의 1/3은 여행하며 살고 있다. 이런 삶의 방식을 선택했으니 역마살 기질이 다분하다고 생각할 수 있지만 그 남자와 나는 여러 면에서 안정과 익숙함을 갈망하는 사람이다. 여행 후 돌아갈 곳을 늘 그리워한다. 항구를 떠난 배는 다시 항구로 돌아간다는 믿음처럼, 우리의 삶에도 회기 할 곳이 있다는 건 단순한 안도감 이상의 의미를 갖는다. 우리에게는 비록 전세이긴 하지만 서울에 머무를 집이 있다. 외부에서 몇 차례 미팅을 해치우고 온 날에는 ‘sweet, my sweet home’를 읊조리며 현관문을 열고 그 안락한 공간에 감사해 한다. 그러니 두세 달 이상의 장기 여행을 뒤라면 그 애착은 말해서 무엇하겠는가. 부모님, 친구, 한식보다 더 반가운 내 집이다.

 

‘언제까지 여행하며 살 것인가?’를 묻는 이들이 많다. 사람들이 걱정하는 건 떠돌며 사는 삶의 불안함일 것이다. 하지만 거꾸로 우리의 불안함은 어딘가에 정착하여 고인 물이 되지는 않을까 하는 불안함이다. 그리고 더 이상 새로운 자극이 없다면-아시다시피 여행은 오감이 충족되는 경험과 활력을 전해 준다- 금방이라도 늙어 버릴 것 같은 불안함이 있다.

 

긴 여행을 떠나기 전, 내가 있던 세계는 9 to 6에 귀속되는 삶, 화장을 해야 하는 삶, 결혼을 하고 출산을 해야 하는 삶, 휴가 때마다 짧은 여행을 하는 삶이라는 카테고리에 묶여 있었다. 하지만 비행기 표를 쥐어 든 순간, 그리하여 자유로운 영혼이라는 꼬리표가 따라다니게 된 지금 어떠어떠한 부류에 속하지 않고도 나답게 살 수 있는 ‘프리패스’를 얻게 되었다. 그 남자와 내가 또래의 직장인 친구보다 젊어 보이는 데에는 ‘여행’이 건네주는 낯선 자극 때문임을 부인할 수 없다. 낯선 화폐, 생김새가 다른 얼굴, 일도 알아들을 수 없는 언어, 문화의 다름 등에서 오는 잠깐의 긴장이 흥분으로 되돌아오는 경험을 할 때마다 여행을 지속시켜야 할 또 하나의 이유를 얻는다.

 

움직인다는 것에 대한 확증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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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어제의 해는 오늘도 떠오르고.

 

크루즈 여행의 장점은 무감각한 이동에 있다. 기항지 관광을 마친 후 배로 돌아와 놀고먹고 자고 나면 어느새 또 다른 도시에 도착해 있다. 이동의 수고는 거대한 배에게 맡겨두고 즐기는 것만 신경 쓰면 된다. ‘어떻게 이동할 것인가’를 늘 염두에 두는 여행객들은 잠시나마 걱정을 내려놓고 배가 흘러가는 대로 몸을 맡기면 된다. 이보다 편한 여행 법이 또 있을까!

 

하나 이 장점은 단점이 되기도 한다. 매일 기항지가 바뀌는 보통의 크루즈 여행이 아닌 대서양이나 태평양 같은 망망대해를 건너는 배라면 열흘이고 보름이고 배 안에서만 있게 된다. ‘거대한 배’라는 감옥에 갇히게 되는 것이다. 매일 똑같은 풍경의 바다 위에서 며칠씩 떠 있다 보면 이대로 바닷속으로 사라진다 해도 전혀 이상할 게 없어 보인다. ‘배가 움직이고 있기는 하는 건가?’라는 계속된 물음이 머릿속을 파고든다.

 

그 여자와 내가 살아가는 삶의 방식은 일상과 여행의 경계가 모호하다. 안온한 일상을 그리워하지만 이내 기내용 캐리어에 옷 몇 가지와 세면도구를 챙겨 다시 비행기에 오른다. 길 위에서 또다시 연말을 보내고 있는 지금, 한 곳에 정착하지 않고 흘러가는 여행자로 산 지 6년 차가 되어 간다. 매해 연말을 해외에서 보내고 있는데 지난 한 해를 둘러보는 것으로 여행이 꽤 멋진 ‘돌아봄’을 선물해 준다. 이 나라에서 저 나라로 이동하며 다른 문화의 생활자로 사는 한 나를 가두는 시선에서 벗어날 수 있었다. 또한 세상의 여러 관점을 접할 기회와 다름을 인정하는 ‘관용’을 배웠다. 누구보다 안정을 갈망하지만 이전의 삶으로 돌아갈 수 없는 이유다.

 

사람을 태워 나르는 배의 입장에서는 기항지가 바뀌나, 망망대해에 떠 있으나 매번 열심히 다음 목적지를 향해 파도를 헤쳐 나간다. 하룻밤 지나면 어제보다 목적지에 가까워진다. 사람의 눈으로 보면 티 나지 않지만 어찌 되었건 어제도, 오늘도 그리고 지금도 계속해서 배는 움직이고 있다. 하지만 인간은 이 움직인다는 확증이 없으면 불안해진다.

 

해를 넘긴다 해도 우리 일상에 특별한 변화가 생기는 것은 아니다. 여전히 태양은 동쪽에서 떠올라 서쪽으로 질 것이고, 물은 위에서 아래로 흐른다. 변화 없는 만고의 진리이지만 뭔가 변화의 시점이라는 의미를 부여하고 싶은 것은 인간의 불안함 때문이다. 일 년이 지나고 새해가 다가오니 무언가를 새롭게 시작하고 싶은 마음이다. 거대한 바다 앞에서 나는 움직이고 있다는 확증을 받고 싶은 마음이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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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백종민/김은덕

두 사람은 늘 함께 하는 부부작가이다. 파리, 뉴욕, 런던, 도쿄, 타이베이 등 누구나 한 번쯤 꿈꾸는 도시를 찾아다니며 한 달씩 머무는 삶을 살고 있고 여행자인 듯, 생활자인 듯한 이야기를 담아 『한 달에 한 도시』 시리즈를 썼다. 끊임없이 글을 쓰면서 일상을 여행하듯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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