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빙하처럼 차곡차곡

아르헨티나 엘 칼라파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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우리 같은 사람들에겐 새로운 계획과 굳은 각오가 필요 없다. 단단하게 지켜 온 지금의 일상을 잘 유지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할 일이다. (2017.11. 14)

빙하를 걷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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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수억 년의 시간이 내 발 아래 흐르고 있었다.

 

빙하 위를 걸었다. 태고의 신비가 숨겨져 있는 얼음 동굴에 들어가 추위를 피하던가 얼음 안에 잠들어 있는 매머드를 찾아내어 수렵시대의 식사를 하는 굉장한 경험을 하길 내심 기대했다. 지구의 남쪽 끝자락 아르헨티나 엘 칼라파테까지 갔던 것은 이 때문이다. 하지만 웬걸 빙하를 여행한다는 것은 반나절 동안 아이젠을 끼고 거대한 얼음 평야 위를 힘들게 걷다가 밥때가 되면 준비해 간 샌드위치 조각을 먹고 걸었던 것만큼 되돌아오는 것이 전부다. 정말이지 그뿐이다. ‘빙하 탐험’이 아닌 ‘빙하 투어’인데 기대가 너무 컸던 게지.

 

투어 마지막 순간, 빙하에서 살아 돌아온 기념으로 유리잔에 위스키를 따르고 빙하 조각을 넣은 ‘온 더 락’을 받지 않았다면 나는 분명 악플러가 되었을 거다. 그들이 투어 끝에서야 술을 주는 것은 어쩌면 영하의 추위에 종일 떨었으니 술 한잔하고 그 순간의 행복만 기억하라는 뜻인지도 모르겠다. 영악한 사람들!

 

페리노 모레노 빙하는 누구 말대로 죽기 전에 꼭 가봐야 할 만큼 멋진 여행지이다. 나처럼 말도 안 되는 기대를 하지 않는다면 빙하 위를 걷는 것만으로도 일생일대의 경험이 될 것이 분명하다. 얼음 강줄기를 따라 수억 년의 시간이 겹겹이 쌓여 있다. 고작 100년도 살지 못하는 인간이 수억 년을 가늠하려고 해도 이내 상상력의 한계에 부딪히고 많다. 거대하고 눈부신 빙하는 지금 이 순간에도 자라고 있다. 나이테로 나무가 자란 시간을 가늠하듯 끝도 없이 펼쳐진 너른 얼음 평야를 보고 있으면 시간과 시간이 벽으로 부딪치는 영화 <인터스텔라> 속에 들어와 있는 기분이 든다. 하지만 그 거대한 감동도 잠깐이고 얼음 위를 반나절 동안 걸었더니 춥고 힘들어서 주저앉고 싶다. 빙하란 애초에 나란 인간이 감당하기 힘든 시간이자 공간인가 보다.

 

그 거대한 시간 위를 걸으면서 조심해야 하는 것이 하나 있다. 빠지면 헤어 나올 수 없는 한없이 투명한 푸른빛의 계곡, 크레바스다. 한 번도 본 적 없는 시린 푸르름에 넋을 잃는다.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크레바스에 빠지면 누구도 구해줄래야 구할 수 없단다. 그야말로 ‘벽장’ 속에 갇히고 마는 것이다. 가이드는 투어 내내 일행에게 주의를 주며 그 단절된 틈을 앞장서서 걸으며 안전한 길을 찾는다. 가이드가 깎아서 만든 디딤판에 올라서서 들여다보니 깊이를 가늠할 수 없는 짙고 푸른 어둠의 골짜기가 보였다. 크레바스와 냇물이 만나서 생긴 웅덩이는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물감을 풀어 만든 것 같다.

 

균열이 없는 얼음 땅이 그 너머에 보여도 함부로 뛰어넘지 못한다. 작은 크레바스처럼 보여도 큰 균열이 숨어 있을 수 있어 뛰어넘다가 무너져 내릴 수 있기 때문이다. 문득 성실하게 쌓아 올린 시간이 만들어낸 이 틈이야말로 우리네 삶 같다는 생각이 잠시 스쳐 지나갔다.


일상을 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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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크레바스에 한 번 빠지면 살아 나올 수 없다.


한 해가 저물어 가고 있다. 연말을 특별하게 만들 계획으로 마음이 들썩인다. 언제 한 번 만나야지 했던 인사를 해가 넘어가기 전에 지키려고 끝없는 약속들을 이어나간다. 연말이 다가오고 새해를 맞이하며 우리 주변의 일상이 모두 새롭게 시작될 것처럼 행동한다. 시간은 그저 겹겹이 쌓인 일상이 모여 인생이라는 거대한 시간을 만들 뿐인데 말이다. 들뜬 마음으로 계획을 세우지만 우리의 인생은 지금도 자라고 있는 빙하처럼 끝없이 이어지는 일상의 연속이다. 단지 특별한 하루가 아니라 또 하나의 일상.

 

새해가 찾아오지만 그 남자와 나는 그저 또 하루의 일상을 사는 것뿐이라고 생각한다. 운동을 하고 책을 읽고 글을 쓰며 꽉 찬 하루를 보낸다. 우리 같은 사람들에겐 새로운 계획과 굳은 각오가 필요 없다. 단단하게 지켜 온 지금의 일상을 잘 유지하는 것, 그것이 우리의 할 일이다.

 

그 남자와 나는 꽤 규칙적이고 엄격하게 일상을 살고 있다. 지켜낸다는 의미가 정확할 것이다. 일상이 모여 ‘그 사람은 어떠했노라’라는 일생이 만들어진다. 성실하게 하루하루를 충실히 사는 사람의 일상과 ‘뭐 하루쯤인데 어때’라는 마음을 매일같이 품어 온 사람의 일상이 어떤 일생으로 기록될지 눈을 감아도 알 수 있다. 그저 평생 주체적으로 살지 못하고 인생을 한탄하듯 산 사람의 일생이 어떤 식으로 망가질는지 우리는 그 끝을 그려 볼 수 있다.

 

새해가 되면 자기계발서가 불티나게 팔리고 외국어 학원 수강생이 늘어나며 체육관에 회원들이 바글거린다. 어제와 똑같은 오늘일 뿐인데 사람들의 마음은 그게 아닌가 보다. 더 나은 ‘나’를 위해 시간을, 돈을 투자하는 것이겠지만 현실이 고달픈 우리의 ‘인내’와 ‘끈기’는 작심삼일 만에 소멸된다. 결심을 방해하는 다른 방해물들이 다가올 것을 우리는 너무나 잘 알고 있다. 매해 겪는 일이라 낯설지도 않다.

 

짙푸른 빙하 위에서 느끼는 영겁의 세월과 그 시간만큼 축적된 한기를 느꼈다. 발자국마다 전해지던 사각거리는 얼음의 낯선 감촉이 또렷하다. 그리고 바라보고 있는 것만으로도 빨려 들어갈 것만 같았던 갈라진 틈의 푸른 빛까지. ‘빙하 위의 함정’이라고 불리는 크레바스야말로 성실한 시간을 위협하는 균열이었다.

빙하가 녹은 물을 마셔 봤다. 심장을 도려낼 것 같은 차가움이다. 물에 손이 닿자마자 손가락 마디마디가 얼얼해졌다. 컵으로 한 잔 떠서 뜨거운 물을 식히는 것처럼 잠시 두었더니 적당히 차가워졌다. 몸 끝까지 맑아지는 기분이다. 연말이라고 새해라고 특별할 것 없이 그저 맑은 기분으로 오늘을 살아가고 싶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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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ㆍ사진 | 백종민/김은덕

두 사람은 늘 함께 하는 부부작가이다. 파리, 뉴욕, 런던, 도쿄, 타이베이 등 누구나 한 번쯤 꿈꾸는 도시를 찾아다니며 한 달씩 머무는 삶을 살고 있고 여행자인 듯, 생활자인 듯한 이야기를 담아 『한 달에 한 도시』 시리즈를 썼다. 끊임없이 글을 쓰면서 일상을 여행하듯이 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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