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강병철의 육아의 정석
성조숙증은 정말 심각한 병일까?
성조숙증이란 다른 말로 하면 사춘기가 빨리 시작된다는 뜻
성조숙증은 ‘조기에 잡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한’ 질병이 아닙니다. 4-6개월 정도 기다려 진행 속도를 정확히 평가한 후 치료를 결정해도 문제가 되지 않아요. (2017.11. 27)
언스플래쉬
이 글은 여자아이들의 성조숙증에 관한 글입니다. 남자아이들의 성조숙증은 늘고 있지 않으며, 항상 심각하게 생각해야 한다고 지난번에 말씀드렸지요? 사춘기는 유방 발달 -> 키의 급속한 성장 -> 초경의 순서로 진행된다고 했습니다. 여자아이들은 보통 10세 경에 가슴이 나오고(사춘기 시작), 11세 경부터 키가 부쩍 커지며, 12.5-13세에 초경이 시작되면서 급속성장이 끝납니다. 성조숙증 여부는 유방을 보고 판단하는데, 만 8세 이전에 유방이 발달하면 성조숙증이라고 합니다.
최근 몇 년간 성조숙증이 늘고 있다는 보도가 이어집니다. 언론은 쇼킹한 걸 좋아하죠. 성조숙증 기사에는 으레 환경호르몬이나 고기에 포함된 성장촉진용 호르몬 얘기가 따라붙습니다. 이런 보도는 어디까지 사실일까요? 일단 성조숙증이 늘고 있는 건 분명합니다. 그런데 수많은 연구에도 불구하고 환경호르몬과 관련이 있다는 확실한 증거는 아직 없습니다. 이렇게 말하면 어떤 분들은 화를 냅니다. 그렇게 당연한 걸 아니라고 하면 어떻게 하느냐는 거죠. 식품회사나 화학회사 등 거대자본의 음모를 의심하기도 합니다. 그런데 그게 과학입니다. 과학에서 당연한 것은 없습니다. 과학은 뭐든 의심하고, 연구합니다. 아무리 그렇게 믿고 싶어도 증거가 없으면 그냥 없다고 합니다. 물론 사람은 믿고 싶은 것만 믿는 동물이기 때문에 ‘증거 없음’으로 설득시키기란 여간 어렵지 않지요. 나중에 증거가 발견될 수도 있지만 어쨌든 없는 걸 있다고 할 수는 없습니다.
그럼 왜 성조숙증이 늘어날까요? 많은 의사들이 비만 때문이라고 생각합니다. 요즘 아이들이 비만해지고 있다는 건 의심의 여지가 없습니다. 비만해진다는 건 지방세포가 커지거나 늘어난다는 뜻입니다. 사춘기란 생물학적으로 자손을 남길 준비를 갖추는 시기라고 했지요? 여성이 아기를 잉태하여 10개월간 무사히 키우려면 영양상태가 좋고 건강해야 한다는 건 당연한 말입니다. 인간의 유전자가 형성되던 먼 옛날에 우리 조상들은 항상 먹을 것이 부족했을 겁니다. 집단 전체를 볼 때 어느 정도 영양상태가 좋은 여성만 아기를 갖는 것이 합리적이겠지요.
영양상태를 뭘로 알 수 있을까요? 지방이 어느 정도 이상 몸에 축적된다면 영양상태가 좋다고 볼 수 있을 겁니다. 그래서 여성은 몸속에 지방이 늘어나면 사춘기가 시작되어 아기를 갖도록 진화한 거지요. 구체적으로 지방세포에서는 렙틴(leptin)이라는 호르몬이 분비됩니다. 여성에서는 렙틴이 사춘기 호르몬의 분비를 촉진하며, 렙틴이 부족하면 사춘기가 시작되지 않는다는 연구가 많습니다. 재미있는 건 남성의 사춘기는 렙틴과 별로 상관이 없다는 점입니다. 오히려 비만한 남자아이는 사춘기가 늦어지는 경향이 있습니다. 남자는 살이 찔 겨를이 없을 정도로 부지런히 돌아다니며 먹을 것을 구해와야 쓸모가 있고, 후손을 이을 가치가 있다는 의미일까요? 이런 사실은 현재의 남녀평등사상과는 맞지 않지만 어쨌든 우리는 그렇게 진화해 왔다고 볼 여지가 있습니다.
성조숙증이란 다른 말로 하면 사춘기가 빨리 시작된다는 뜻입니다. 사춘기의 문제는 뭔가요? 한마디로 충동은 늘어나는데 그 충동을 조절할 능력은 아직 성숙하지 않은 겁니다. ‘질풍노도의 시기’라고 하잖아요. 신체적 능력은 최고조에 달해 자신감이 넘치는데 자신을 객관적으로 보는 능력은 부족하지요. 또한 현대는 청소년에게 늦게 성숙하기를 강요하면서, 가족과 공동체가 약화되어 그들을 올바른 방향으로 이끌 역량은 부족한 시대입니다. 돈이 모든 가치의 척도가 되고 정보가 범람하면서 유혹은 그야말로 모든 곳이 존재합니다. 이런 요인들이 합쳐져 일탈이나 비행이 자주 일어나고, 정신질환도 일생 중 어떤 시기보다 많이 생깁니다.
다른 나라와 우리를 비교하기는 싫지만 서양에서는 자녀에게 성조숙증이 생기면 부모들이 이런 쪽에 더 신경을 씁니다. 충격을 받거나 우울증이 생기는 등 정서적인 어려움은 없는지, 친구들과 변함 없이 잘 어울리는지, 가족과 소원해지지는 않는지가 일차적인 관심사입니다. 우리는 어떤가요? 키에만 신경을 씁니다. 키가 크고 얼굴이 예쁘면 물론 보기 좋습니다. 하지만 그것이 인간의 가치를 결정하는 건 아닙니다. 옛날 어른들은 눈의 착각을 경계하는 말을 많이 하셨지요. “키 큰 녀석은 싱겁다”든지,, “너무 예쁘면 얼굴값을 한다”는 말은 누군가를 비난하려는 것이 아니라, 그런 특성을 갖추지 못한 대부분의 사람들에게 용기를 주면서 그것을 넘어서는 가치를 추구하라는 메시지입니다. 지금은 그런 말 대신 “키나 용모도 경쟁력”이라든지, “나중에 취업이나 결혼을 할 때까지 문제가 된다”고 합니다. 한번 생각해보세요. 그게 자녀에게 할 말인가요? 세상이 그러니 어쩔 수 없다고요? 나부터 그렇게 말하고 믿기 때문에 세상이 그렇게 된 건 아닐까요?
성조숙증이 있으면 키가 안 크고, 그러면 아이의 앞길을 망친다는 부모의 마음은 절박하기 짝이 없습니다. 세상에서 가장 속기 쉬운 사람이 누군지 아세요? 절박한 사람입니다. 사람이 절박해지면 평정심을 유지하지 못합니다. 평생 과학이나 의학에 몸담은 사람도 불치병에 걸리면 검증되지 않은 치료에 매달리거나, 심지어 귀신을 쫓는다고 굿을 하기도 합니다. 진짜 귀신이 누군지 아세요? 돈 냄새를 맡는 사람들입니다. 귀신같이 그 틈을 파고들지요. 포털에서 ‘성조숙증’으로 검색해보세요. 상업광고가 넘쳐납니다. 그 아래 뉴스도 있지요. 가만히 보세요. 특정 업체가 반복적으로 ‘뉴스’에 나옵니다. 돈 주고 기사를 산 겁니다. 요즘은 아주 허튼 소리를 하면 장사가 안 돼요. 어디서 주워 들은 말은 있어서 초경을 늦춰준다고 광고를 합니다. 정밀검사를 하라고 부추깁니다. 정말 정밀검사와 치료가 필요할까요?
『우리 아이 성조숙증 거뜬히 이겨내기』란 책이 있습니다. 미국을 대표하는 소아내분비 교수가 쓴 책입니다. 이 책의 결론은 두 가지입니다. 1) 성조숙증으로 병원을 찾는 아이 중에 진짜 성조숙증은 상당히 드물다. 진짜 성조숙증이라고 해도 정밀 검사가 필요한 경우는 더욱 드물고, 치료가 필요한 경우는 더더욱 드물다. 2) 진짜 성조숙증인 아이들도 대부분 치료받지 않아도 정상 신장(키)에 도달한다. 헉! 정말인가요? 예, 정말입니다.
진짜 성조숙증이 뭔지 설명하자면 얘기가 너무 길어질 테니 일단 넘어갑시다. 정 궁금하시면 책을 참고하세요. 성조숙증인데도 대부분 정상 신장에 도달하는 이유는 진단 시에 이미 키가 평균보다 크고, 사춘기 급속성장 기간이 더 길기 때문입니다. 물론 아주 키가 작아져 사회생활에 지장을 겪을 위험이 있다면 치료해야 합니다.
즉, 1) 6세 이전에 사춘기가 시작된 경우 2) 6세 이후에 시작되었더라도 급속히 진행하는 경우 3) 처음 진료실을 찾았을 때 신장이 평균 이하인 경우입니다. 그런데 급속히 진행하는지 어떻게 알죠? 방법은 하나뿐입니다. 정기적으로 관찰하는 겁니다. 처음 진료 시 급속히 진행할지 알 수 없기 때문에 4-6개월 뒤에 다시 진료실을 방문하여 진찰을 받아야 합니다. 여기서 문제가 생깁니다. 우리는 성격이 급해서 대부분 몇 개월씩 기다리지 못합니다. 진료실을 나가는 순간 온갖 상업광고와 공포마케팅이 밀려듭니다. 혹시나 해서 찾아가면 바로 이런 얘기를 듣습니다. “6개월을 어떻게 기다려요? 그러다 아이 난장이 되는 꼴 보시려구요?” 부모는 안도의 한숨을 내쉽니다. ‘아, 역시 여기 찾아오길 잘 했어!’ 그리고 ‘정밀검사’를 받고 눈물이 찔끔 날 정도로 값비싼 약과 키를 키워준다는 건강식품을 한아름 사서 집으로 갑니다. 누구 말이 옳은지 모르겠다고요? 한번 생각해보세요. 뭔가를 파는 사람 말이 맞을까요, 아무 것도 팔지 않고 안심하라고 일러주는 사람 말이 맞을까요?
성조숙증은 ‘조기에 잡지 않으면 생명이 위험한’ 질병이 아닙니다. 4-6개월 정도 기다려 진행 속도를 정확히 평가한 후 치료를 결정해도 문제가 되지 않아요. 그래도 키가 걱정된다고요? 어린 나이에 매달 주사를 맞고 검사를 받으면서 스스로 ‘환자’라는 인식을 갖는 아이의 마음은 생각해보셨나요? 이 아이들이 은연 중에 ‘키 작은 녀석은 루저’라고 생각하기 때문에 점점 세상이 각박해지는 건 아닐까요? 우리는 세상 탓을 하지만 세상은 결국 우리가 만들어가는 겁니다.
우리 아이 성조숙증 거뜬히 이겨내기줄리아 로스먼 저/김선아 역 | 더숲
성조숙증이 생겼을 때 아이는 신체적 문제와 함께 어떤 심리적, 행동적 문제를 겪는지, 병원을 찾는 경우 어떤 검사와 치료를 받게 되며 의사에게는 무엇을 물어 보고 아이는 어떻게 마음의 준비를 시킬 것인지에 이르기까지 부모가 알아야 할 모든 것을 망라하고 있다.
관련태그: 성조숙증, 사춘기, 렙틴(leptin), 질풍노도의 시기
서울대학교 의과대학을 졸업하고 같은 대학에서 소아과 전문의가 되었다. 2005년 영국 왕립소아과학회의 ‘베이직 스페셜리스트Basic Specialist’ 자격을 취득했다. 현재 캐나다 밴쿠버에 거주하며 번역가이자 출판인으로 살고 있다. 도서출판 꿈꿀자유 서울의학서적의 대표이기도 하다. 옮긴 책으로 《원전, 죽음의 유혹》《살인단백질 이야기》《사랑하는 사람이 정신질환을 앓고 있을 때》《존스 홉킨스도 위험한 병원이었다》《제약회사들은 어떻게 우리 주머니를 털었나?》 등이 있다.
<폴 카플로비츠> 저/<서울아동병원 의학연구소> 역14,400원(10% + 5%)
부모와 의사를 위한 성조숙증의 모든 것! 언제부터인가 아주 흔한 병이 되어 버린 성조숙증. 그러나 그 원인이 무엇이며 치료는 어떻게 해야 하는지, 정서적 문제는 없는지, 성인이 되면 키가 얼마나 작아지는지 등을 차분하고 꼼꼼하게 일러 주는 조언자를 찾기는 쉽지 않다. 이 책은 성조숙증의 원인과 치료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