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불후의 칼럼 > 이승한의 예능, 매혹의 기술
<마리텔>, TV가 인터넷의 문법을 수용한 순간
스스로 외연을 한계 짓지 말라 (1)
2015년 설 특집 파일럿으로 선보인 프로그램 중 가장 성공적이었다 평가받는 작품인 <마이 리틀 텔레비전>(이하 <마리텔>)이 그것이다.
시청률과는 별개로, 2015년 초 MBC 예능이 좋은 평가를 받고 있었던 것은 아니다. <우리들의 일밤> ‘진짜 사나이’는 예나 지금이나 군대를 지나치게 미화한다는 비판의 대상이었고, 기껏 포맷을 선도했던 <우리들의 일밤> ‘아빠, 어디 가?’는 일종의 미투 상품인 KBS <슈퍼 선데이> ‘슈퍼맨이 돌아왔다’에 밀려 2기가 종영되기에 이르렀다. 정치나 연예계, 성 담론, 사회 문화에 대한 각종 토크쇼들을 선보이며 이슈를 몰고 다니던 JTBC 예능이나, 이명한-나영석-신원호 군단을 데려가 <꽃보다> 시리즈, <응답하라> 시리즈 등으로 연일 상한가를 치고 있던 tvN 예능에 비하면 MBC 예능은 무척 낡아 보였다. <무한도전>이 과거 예능왕국 MBC의 체면을 간신히 지키고 있었다. 더구나 점점 지상파 TV보다 아프리카TV나 다음TV팟 등을 통한 인터넷 방송을 더 선호하는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가 늘어나는 추세였으니, 비단 MBC 뿐 아니라 지상파 예능 자체의 위기를 말하는 사람들의 목소리가 늘어나던 순간이었다. 그때, 예상치 못한 곳에서 MBC 예능의 미래가 열렸다. 2015년 설 특집 파일럿으로 선보인 프로그램 중 가장 성공적이었다 평가받는 작품인 <마이 리틀 텔레비전>(이하 <마리텔>)이 그것이다.
인터넷 방송과 지상파 방송을 합쳤다.
뭔가 전에 없던 게 나왔다.
<마리텔>은 방송을 하는 사람과 시청하는 사람이 실시간으로 쌍방향 소통을 하는 인터넷 방송의 형식을 고스란히 지상파 TV 프로그램에 적용했다. 성장과정에서부터 인터넷을 접하고 자연스레 인터넷을 활용하는 세대, 디지털 네이티브 세대의 문법을 TV로 이식해 온 셈이다. 그래서 처음 <마리텔>이 등장했을 때만 하더라도 일각에선 ‘인터넷 방송에 대한 지상파의 항복’이라는 이야기도 등장했다. 오랜 세월 TV가 누려왔던 가장 압도적인 매체로서의 지위를 내려놓은 항복 선언이 아니냐는 지적이었다. 그러나 그 이후 <마리텔>이 뻗어나간 방향을 지켜보면 꼭 그렇다고 말하기 어렵다. <마리텔>은 스튜디오 녹화 과정을 인터넷으로 생중계해 실시간 소통이라는 인터넷 방송의 장점은 살리고, 그것을 화려한 CG나 유려한 편집으로 후가공하는 TV 예능 특유의 강점으로 보강했다. 생중계 채팅에 참여하는 네티즌들의 반응을 쇼에 반영함으로써 인터넷 네이티브 세대의 유머 코드를 TV로 가져왔으며, 김영만이나 백종원과 같이 지상파의 힘이 아니면 섭외하기 어려운 사람들을 카메라 앞으로 불러옴으로써 지상파만이 만들어 낼 수 있는 공감의 순간을 만들었다. 출발은 인터넷 방송과 지상파 방송의 장점의 결합이었지만, 도착한 지점은 그 둘 모두 도달한 적 없던 곳이었다.
수많은 시청자들을 추억에 잠기게 만든 종이접기 아저씨 김영만.
지상파의 힘이 아니었다면 이런 섭외가 가능했을까?
<마이 리틀 텔레비전> ⓒ MBC. 2015~
또한 여러 참가자들이 개별적으로 진행한 개인 방송을 편집을 통해 70분짜리 방송 한 편으로 정리하는 과정은 흡사 방송사 편성국 업무, 잡지사 에디터의 업무와도 닮아 있는데, 이 또한 전통적인 TV 예능 프로그램의 문법을 깨부순 새로운 시도라 할 수 있겠다. 처음 파일럿 프로그램이 편성되었을 때만 하더라도 단순한 먹방 코드를 들고 나온 참가자들이 적지 않았던 반면, 최근 방영분으로 갈수록 특정 분야의 전문가들이 출연해 자신만의 노하우를 알려주는 식의 시도가 주를 이루고 있다는 건 이러한 프로그램의 방향 변화를 시사하는 지점이다. 인터넷 방송 또한 여러 주제로 각자의 방송을 꾸려 나가는 이들을 한데 모아서 MCN(멀티 채널 네트워크)을 만들고 상호 콘텐츠 교류를 하는 방향으로 뻗어 나가고 있는데, <마리텔>은 아예 70분짜리 방송 한 편 안에 여러 출연자들의 방송을 담아냄으로써 마치 하나의 매거진과 같은 형태로 진화한 셈이다.
<마이 리틀 텔레비전> 메인PD 박진경 PD 트위터. 2016년 3월 6일
플랫폼의 한계를 넘어
외연을 확장하라
콜롬버스의 달걀이 늘 그렇듯, 결과론적으로만 이야기하면 누가 이런 걸 생각해내지 못했겠느냐 반문하는 사람들도 있으리라. 그러나 지상파 채널에서 기존에 해본 적 없는 새로운 것을 시도한다는 건 굉장히 힘든 일이다. 더군다나 상대적으로 새로 등장한 장르인 오디션 프로그램이나 리얼리티 프로그램도 아니고, 지난 수십년 간 쌓여온 지상파 스튜디오 예능의 문법을 갑자기 바꾼다는 건 더더욱 어렵다. 방송심의규정부터 표현 수위에 이르기까지 지상파 채널은 케이블이나 종편과는 수준이 다른 제약에 묶여 있고, 다채널 시대 경쟁이 치열해지면서 프로그램이 자리 잡기까지 진득하게 기다려주는 일은 점점 예전 이야기가 되어버렸다. 그 탓에 새로운 시도를 하는 것보다 안전한 시도를 하는 일이 늘었고, 이런 분위기 속에서 조연출들이 메인 PD 자리에 오르는 평균 연령대 또한 지난 몇 년간 꾸준히 상승했다. 실제로 인터넷 매거진 <아이즈>와의 인터뷰에서 박진경 PD는 자신이 기획안을 써낼 때 “한창 관찰 예능이 유행했고 요리 방송이 막 뜨려는 시점이어서 다른 기획안 중에 그런 종류가 많았다”고 말한 바 있다. 앞서 시청자들로부터 어느 정도 검증된 아이템들이 올라온 것이다.
최근 몇 년 간 지상파 채널에 있던 PD들이 앞다투어 케이블과 종편으로 발걸음을 옮긴 것은 단순히 몸값의 문제만이 아니라, 이렇게 보수적인 제작 환경의 문제의 문제이기도 하다. TV의 영역이라 여겨지던 구획을 깨버리는 <마리텔>의 실험은 이런 환경 속에서 이뤄졌다. 다른 채널의 방송이나 여타 선진국 TV 프로그램에서 이미 검증된 요소를 가져온 것도, 인터넷에서 화제가 되는 아이템‘만’을 가져온 것도 아니라 아예 TV 외부의 문법을 지상파에 이식함으로써 말이다. 전통적으로 TV의 영역이라 여겨지던 구획 밖으로 뻗어 나감으로써 TV라는 플랫폼의 외연을 넓힌 셈인데, 이는 단순히 올드 미디어가 되어가던 지상파 채널 차원의 반격일 뿐 아니라 TV라는 플랫폼이 앞으로 뻗어나갈 방향을 일부나마 제시한 시도로 평가해야 옳을 것이다.
융합과 통섭의 시대라는 말이 유행의 물결을 탔던 순간들이 불과 몇 년 전이었다. 그러나 말은 쉽고 실천은 어려운 것이, 사람의 사고방식은 자주 자신이 몸 담은 플랫폼의 한계 안에 갇혀 있기 때문이다. 해서 그 플랫폼과 정체성을 뛰어넘는 발상을 하는 것은 어려운 일이며 그 발상을 현실태로 옮기는 것은 더더욱 망설여지는 일이다. 그러나 그 망설임을 과감하게 이겨내는 것이 정체상태에 대한 돌파구가 될 수 있다. 물론 어려운 일이겠지만, ‘돌파구’란 게 원래 자신을 둘러 싼 벽을 말 그대로 파고(突) 깨뜨리며(破) 나아가야 비로소 만들 수 있는 것 아니던가.
(다음 편에서 계속)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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TV를 보고 글을 썼습니다. 한때 '땡땡'이란 이름으로 <채널예스>에서 첫 칼럼인 '땡땡의 요주의 인물'을 연재했고, <텐아시아>와 <한겨레>, <시사인> 등에 글을 썼습니다. 고향에 돌아오니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