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생활툰의 연애, 한없이 현실에 가까운 허구
치열한 자기 검열을 바탕으로 각색된 판타지
연애를 다룬 생활툰을 보고 있자면 심혈을 기울이며 외줄타기를 하는 작가의 고뇌가 느껴진다. 말하자면 경험담을 바탕으로 재구성하되, 이 연애를 욕 먹이면 안 된다는 완급조절. 연애나 결혼 생활을 콘텐츠로 만든다는 것은 곧 수천, 수만을 ‘시월드’로 거느리는 것과 같다.
네이버 일상 카테고리 연재 웹툰_출처 네이버
세상은 바야흐로 대(大) 웹툰의 시대다. 그 중 작가의 생활을 소재로 한 ‘생활툰’은 웹툰의 대표적인 장르로, 웹툰 초기부터 현재까지 꾸준한 사랑을 받고 있다. 웹툰 작가들은 대체로 20-30대에 웹툰 생산자로 입문하고, 그러다보니 생활툰에서 연애나 결혼 생활은 중요한 비중을 차지한다. 여기서 이야기하고자 하는 것은 <펭귄 러브스 메브>나 <스시녀 김치남>처럼 아예 연애나 결혼 자체가 소재인 경우이다. 그런데 어쩌면 그렇게 생활툰에서의 연애, 혹은 ‘연애툰’은 하나같이 보기 흐뭇하고 바람직하던지. <모두에게 완자가> 정도를 제외하면 연애툰은 다 이성애 중심이고, 연애의 당사자 두 사람은 모두 선하다. 이들의 단점은 논란이 되지 않을 수준에 그치며 때때로 매력 포인트로 활용된다. 누구 하나가 문제가 될 만한 발언이나 태도를 보여도 ‘착한’ 상대방은 부드럽게 넘어간다. 그들은 무해하고 보편적인 문제로 투닥투닥 싸우고 알콩달콩 화해하면서 ‘너무 유난스럽지 않고’ ‘적당히 개념 있는’, 그러니까 딱 ‘보기 좋은’ 사랑을 키워간다. 그래서 연애를 다룬 생활툰을 보고 있자면 심혈을 기울이며 외줄타기를 하는 작가의 고뇌가 느껴진다. 말하자면 경험담을 바탕으로 재구성하되, 이 연애를 욕 먹이면 안 된다는 완급조절. 연애나 결혼 생활을 콘텐츠로 만든다는 것은 곧 수천, 수만을 ‘시월드’로 거느리는 것과 같다. 사람들은 참 별의 별 ‘고나리’를 다 한다. 그래서 생활툰은 현실이라기보다는 사실을 바탕으로 한 창작물이다. 마치, 다큐멘터리처럼.
트린 민하에 따르면 다큐멘터리는 “광적으로 조작된 픽션”이다. 다큐멘터리 영화의 형식을 취하며 편집을 거치는 순간, 현실은 선별과 배제를 거친 구성물로 거듭나는 것이다. 다큐멘터리의 특징이자 중요한 힘은 사람들이 그것을 ‘허구가 아닌 현실’이라는 믿음을 바탕으로 관람한다는 것이고, 이를 통해 감동이나 몰입은 배가 된다. 다큐멘터리는 허구보다 더 능란한 판타지를 보장하기 때문에 제작자의 재현 윤리가 가장 절실하게 요구되는 장르이기도 하다. 재현은 선택과 제시, 구조화와 형태 결정의 능동적인 작업 이다. 재현은 이미 존재하는 의미를 전달하는 것을 넘어, 사물들의 의미를 생산하는 능동적인 노동이며 실천이다. 생활툰은 이러한 다큐멘터리의 속성과 많은 부분 일치한다. 생활툰은 소재의 선택과 배제, 구성과 연출을 거치는 엄연한 창작물이다. 이 과정에서 작가의 시선이나 메시지가 드러나고, 독자들 역시 텍스트로서의 생활툰을 다양한 방식으로 독해할 가능성이 열린다. 생활툰의 연애는 불특정 다수에게 보여주기 전에 흠 잡힐 만한 부분은 정교하게 다듬고 재미를 위해 어떤 부분은 부풀리고 어떤 부분은 덜어낸 결과물이다. 결국 ‘개념남녀’의 ‘훈훈한 연애’만 살아남는다.
생활툰이 현실과 다르다고 성토하는 것이 아니다. 창작물의 가치는 현실을 얼마나 핍진하게 묘사하느냐에 좌우되지 않는다. 잘 만든 빵 하나가 지구를 구하고 테니스를 치다가 공룡이 소환되어도 눈 하나 깜짝하지 않는 것이 강철의 독자님들인데 리얼리즘은 무슨. 오히려 순정만화나 로맨스 소설처럼 현실의 각박함은 잊고 판타지로서의 연애를 소비할 수 있는 영역이기도 하다. 다만 독자들이 만화를 현실 그 자체로 생각하거나, 작가 본인이 작품 속 캐릭터나 서사를 실제와 구분하지 않을 때 문제가 발생한다.
얼마 전 웹툰 <낢이 사는 이야기>의 작가 ‘낢(서나래 작가)’은 댓글을 단 독자들 일부를 고소했다. ‘낢’의 남편 캐릭터인 ‘이과장’에 대한 악플이 그 이유였다. 서나래 작가가 ‘낢’으로 통하듯, ‘이과장’은 서나래 작가의 남편을 캐릭터화한 인물이다. 논란이 된 화는 낢이 아침에 일어나 남편 ‘이과장’의 도시락을 싸다 울었다는 내용이었다. ‘낢’ 시리즈는 생활툰 부흥의 첫 물꼬를 튼 작품으로 그 인기만큼이나 무수한 악플이나 오지랖, 비난을 동반했다. 독자가 절대적인 권력을 쥐는 웹툰 시장에서 고소와 같은 적극적 액션은 양날의 검과 같다. 사실 웹툰 작가들, 특히 실제 인물을 다루는 생활툰 작가들은 악플에 시달린지 오래 되었는데, 마인드C 작가나 서나래 작가처럼 적극적으로 고소라는 법적 형식을 취하게 된 것은 ‘여성혐오’ 논란이 불거지면서이다. 악의적인 집단 인신공격이나 성적 모욕 등은 이 글에서 언급하는 ‘비판’에서 제외한다. 그것은 찬/반의 영역 바깥에 있는 엄연한 폭력이기 때문이다. 그런데 ‘낢’ 고소 사건에서, 무혐의 처분을 받은 이들이 존재한다. 이렇게 진짜 악플과 구분 없이 분류되었지만 악플이 아니라는 판결을 받은 사례가 의미하는 바에 초점을 맞추어야 한다. 그리고 ‘왜’ ‘하필’ ‘이 사태에 대해서’ 고소라는 적극적인 대응을 선택했는지가 중요하다. 서나래 작가가 고소하겠다고 쓴 글에서 ‘올바른 여성 운동’의 방향을 거론했다는 사실 역시, 이 사태가 단순히 한 웹툰 작가가 치른 악플과의 전쟁에 한정되지 않음을 시사한다.
낢이 아침부터 일어나 도시락을 싸는 표면적인 이유는 ‘이과장이 낢의 불규칙한 생활 리듬을 교정하려고’였지만, 독자들이 그 구성과 연출을 통해 본 것은 그처럼 유능한 프리랜서조차 사회적으로 요구되는 아내의 덕목에서 자유롭지 못한 현실이었다. 게다가 눈물이 재현되었기 때문에 이것이 상징하는 불공평한 가사분담과 그로 인한 고충은 독자들이 충분히 문제의식을 느낄 만한 지점이다. (독자들이 대부분 낢과 비슷한 연령대의 여성인 점을 고려하면 더더욱.) 등장인물은 특별한 의미나 극적 효과를 창조하고자 어떤 측면들을 의도적으로 선택/배제한 결과물로, 이들의 행동에는 창작자의 계산이 들어간다. 현실을 소재로 하는 다큐멘터리나 생활툰도 마찬가지이다. 다큐멘터리 속의 주인공은 현실에 있을 때와 달리 작품 내에서 ‘등장인물’로서의 역할을 해낸다. 서사를 견인하고 주제 의식을 형성한다. 생활툰에서 편집과 구성, 연출을 거친 캐릭터를 실존 인물과 완전히 동일 선상에 놓을 수는 없고, 등장인물에 대한 감상이나 평가가 곧장 실존 인물을 겨냥한다고 보는 것은 비약이다. 중요한 것은 언제나 구성을 거쳐 재현된 인물이고 극 중에서 의미하는 바이다. 한껏 독자를 의식해서 순화하고 각색을 거친 극 중에서도 문제적이라면, 현실에서는? 이것이 단지 낢과 이과장만의 문제가 아니라 맞벌이를 하는, 혹은 그런 결혼생활이 보편적인 세계를 살아가는 여성들 전체의 문제라면?
그럼에도 불구하고, 결국은 모델이 실존하기 때문에 생활툰이나 등장인물에 대한 평가는 윤리적인 성찰을 필요로 한다. 악플과 ‘고나리’, 그리고 적절한 비판을 구분해야 하는 것이다. <스시녀와 김치남>을 연재하는 웹툰 작가 사야카는 자신에게 쏟아지는 악플에 하나하나 반박했다. 사야카의 행동이 남성 판타지에 헌신한다고 무작정 인신공격적인 욕설을 퍼붓는 것은 저열하고 안일하다. 이 경우 역시 논의의 여지가 없는 폭력으로 분류해야 하며, 문제 삼아야 할 것은 소재를 다루는 작가의 가치관이나 연출의 의도이다. 한국 남성과 결혼한 일본 여성 사야카의 만화에는 더치페이를 하거나 무거운 짐은 혼자서 들며 “여자도 힘이 있어요”라고 말하는 모습이 등장한다. 일본 여성의 미덕으로 꼽히는 점을 고스란히 재현하면서 사야카는 ‘개념녀’에 대한 강박이 있다고 비판 받았다. 사야카의 논리는, 일요일에도 쉬지 못하고 마트까지 태워다준 남편이 고마워서 장 본 물건을 혼자 든다는 것이다. 이런 질문이 가능하다. 그렇다면 생필품은 사야카만 쓰는가? 함께 생활하는데 쓸 물건을 사는데 남편이 함께 가는 것은 ‘고마운’ 일이고, 자신이 가는 것은 당연한가? 혼자 물건을 드는 사야카를 주변 사람들이 ‘오오오’ 놀라면서 쳐다보는 것은 사람들이 정말 그렇게 쳐다봤느냐는 진실 여부를 떠나, 명백히 작가의 의도가 개입된 장면이다. 사야카를 주목하는 사람들이 만화 속에 등장함으로써 혼자 짐을 드는 것은 ‘드문 행동’이 된다. 이 행동이 드물다는 것은 곧 대부분의 여자들이 ‘힘이 있음에도’ 짐을 남자에게 떠넘긴다는 인식을 전제로 한다. 더치페이 편에서도 마찬가지다. “나는 이렇다”를 넘어 “이렇게 행동하는 나”를 추구하는 자의식과, 주변의 시선이 출연한다. 매우 의미심장한 연출이다. 사야카의 세계에는 남편의 심기를 거스르거나 의견이 충돌하는 경우가 없다. 의견과 주관이 있는 인간이라면 갈등이 있기 마련인데 말이다. 사야카의 만화는 여자가 연애나 결혼에서 비난 받을 수 있는 모든 행동 요인을 한 발 앞질러 제거해버린 멸균 상태 같다. 이러한 위화감은 정도의 차이만 있을 뿐 생활툰에서 연애를 다루는 다른 작가들에게서도 쉽게 발견할 수 있다.
‘고나리’가 들어올 구멍을 막고, ‘~녀’ 딱지가 붙을 위험을 제거하고, 적당히 로맨틱하면서도 너무 불평등한 관계로 보여서는 안 되고…손가락이 부러져도 가방 선물 받은/받고 싶은 이야기는 안 되고…내 아내는 다른 여자들이 부들거리는 농담에도 쿨하게 넘어가는 센스 있는 여자고…. 생활툰에서의 연애는 이렇게 치열한 자기 검열을 바탕으로 각색된다. 그래서 현실을 소재로 하는 동시에 지극히 허구적이다. 작가는 보여주고 싶은 것만 보여주고, 독자는 보여주는 만큼 소비한다. 때때로 재배치된 현실에서 독자가 읽어내는 것이 작가의 의도와 다를 수 있다. 연출과 구성을 거친 작품은 작가의 손을 떠난 순간 해석 가능성이 풍부한 텍스트가 되기 때문이다. 어떤 순간에는 그것이 미처 덜어내지 못한 불편한 진실일지도 모른다. 한편 독자들 역시 자신이 보는 것이 그들의 전부가 아니고, 어디까지나 잘라내고 재구성한 부분에 불과함을 인지하고 있어야 한다.
생활툰의 연애는 알콩달콩 좋기만 하던데 뭐 이렇게 피곤하게 구냐고, 누군가는 말할 것이다. (사실 이렇게 살면 당사자가 제일 피곤하지롱) 나는 언제나 좀 피곤한 애였는데, 유독 일상의 모든 것에 깊이 침투해 있는 연애, 그 천연덕스러운 핑크빛이 거슬렸다. 그래서 삽 하나 들고 파기 시작했는데 이런 광산일 줄이야. 연애가 은폐하는 폭력이, 연애를 강요하는 억압이, 누군가에게는 박탈된 연애의 자유가, 연애 내부에 존재하는 권력 관계가, 연애를 다루는 사회적 문법이, 파도 파도 계속 나와서 여기까지 왔다. 나는 이 모든 것이 여전히 흥미롭고 또 의심스럽다. 채널예스 칼럼은 오늘이 마지막이지만, 앞으로도 계속 이 까칠함으로 여기저기를 찔러볼 생각이다. 그동안 신세 지면서 잘 놀았다.
그 동안 <나는 하지 않는 편이 좋겠습니다> 칼럼을 사랑해주셔서 감사합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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비연애인구 전용잡지 <계간홀로> 발행인. 문충이(文蟲)가 되고 싶은 그냥 식충이. 뭐든지 재미 있어야 하지만 재미의 기준은 내 마음. 읽고 쓰고 덕질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