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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등인 걸 숨기지 마라. 2등이었던 걸 잊지 마라

때로 약점이 당신의 무기가 된다 (3)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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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스타’는 <황금어장>의 유일한 생존자가 된 이후에도 자신들의 B급 콘셉트와 자기 비하를 쉽게 버리지 않았고, 마침내 지상파 심야 토크쇼의 절대강자가 된 이후에도 쉽게 승리 선언을 하지 않았다.

(‘배경과 설득, 보완 없이도 무기가 되는 약점은 없다 - 때로 약점이 당신의 무기가 된다 (2)에서 이어집니다)

 

“<황금어장>의 메인코너 ‘무릎팍 도사’의 ‘건방진 도사’ 유세윤씨가 결혼을 하셨습니다. 결혼식 가셨어요?”
“저는 그 날 시트콤 촬영이 있어서 못 갔어요.”
“저도 같이 시트콤 촬영이 있어서…”
“저는 행사가 있어서 못 갔고요.”
“저는 일부러 일을 만들었죠.”
“같은 <황금어장>이란 프로그램이지만, 사실은 어떻게 보면 라이벌이거든요?”
“난 그리고 솔직한 얘기로 축의금도 안 내려고 했어!”
“저희는 그 쪽 팀, 경조사 안 갑니다.”

 

<황금어장> 142회. 2009년 6월 24일. ‘라디오스타’ 오프닝 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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앞서 나는 두 차례 <황금어장> ‘라디오스타’가 ‘5분 방송’을 자처한 것이 의도적으로 엄살을 부린 것이었다고 말했다. 실제로는 ‘무릎팍 도사’가 다 소화하지 못하는 독하고 감각적인 접근을 대리해주는 상호보완적인 콘텐츠로 제작진을 공유할 뿐 아니라 일종의 운명 공동체로 묶여 있는 코너였음에도 불구하고, ‘라디오스타’는 끊임없이 ‘무릎팍 도사’에 대한 자격지심과 경쟁심을 드러내며 기회만 닿으면 ‘5분 방송의 굴욕’을 강조했다. 실제보다 더 초라한 위치를 자처해 특유의 B급 정서에 대한 면죄부를 사고, 챔피언 ‘무릎팍 도사’에게 끊임없이 덤벼드는 도전자 이미지를 통해 코너의 각을 세운 것이다. 2010년 <텐아시아>와의 인터뷰에서 당시 ‘라디오스타’ 메인작가였던 황선영 작가는 “잊혀져 가는 뮤지션과 욕쟁이와 (웃음) 그런 출연자들의 토크를 가장 극대화 시킬 수 있는 코너를 만들자고 했다. ‘무릎팍 도사’가 재벌이면 우린 구멍가게처럼 시작했고, 강호동 씨가 못 묻는 질문도 할 수 있다고 생각했다”고 말했다. 

 

물론 프로그램 초반엔 ‘엄살’이라고만 말할 수는 없는 처지였다. 제작진이 ‘무월관’으로 <황금어장>에 합류한 윤종신을 더 잘 활용할 수 있는 방안으로 ‘앉아서 수다 떠는 코너’를 하자는 생각을 했을 때, 이미 <황금어장> 안에는 강호동이라는 거대한 1인자가 버티고 있었으니까. 하지만 어느 정도 프로그램이 자리를 잡고 ‘무릎팍 도사’와 엇비슷한 시청률을 기록하며 어깨를 견주기 시작한 이후에도, 심지어는 강호동의 잠정은퇴로 <황금어장>에 ‘라디오스타’만 남아 단독으로 70분 방송을 책임지게 된 지금에도 ‘라디오스타’의 포지셔닝은 크게 바뀌지 않았다. 끊임없이 MC들의 치부를 무기처럼 휘두르고, 스스로를 비하하고, 자신들의 격식 없음을 ‘고품격’이란 단어를 역이용해 강조한다. 이제 더 이상 약자가 아니게 되었음에도 만년 약자임을 자처하는 이 태도는 무엇 때문이었을까?

 

 

2등인 걸 숨기지 마라

 

1962년 미국 렌터카 업계 1위인 헤르츠에 밀려 만년 2위였던 에이비스가 선보인 “We try harder” 캠페인은 마케팅 업계의 전설처럼 통한다. “우리는 2등입니다. 그래서 더 열심히 노력합니다.”라는 카피는 그 이전까진 찾아보기 힘든 형식의 광고 문구였다. 그 전까진 자신들이 2등이라는 점을 이렇게 직설적으로 이야기한 카피는 없었기 때문이다. 자신들이 2등이라는 것을 진솔하게 고백하는 태도의 과감함이나 그에 뒤이어 부드럽게 연결되는 ‘1등을 따라잡기 위해 더 열심히 일한다’는 서사 구조는 강자에게 도전하는 언더독을 응원하는 대중의 심리를 자극했다. 이 마케팅 전략으로 에이비스는 61%-29%였던 헤르츠와의 점유율 격차를 1966년엔 49%-36%까지 바짝 쫓아갈 수 있었다. 위기감을 느낀 헤르츠가 1966년 “에이비스가 지난 몇 년간 헤르츠가 업계 1위라고 이야기했는데, 그 이유를 설명 드리겠습니다”라는 캠페인으로 응수하기 시작하면서 에이비스의 상승세는 주춤해졌고, 헤르츠가 꾸준히 대응한 결과 1969년부터는 점유율 격차가 48%-35% 선에서 고정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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펩시나 세븐업의 전략도 비슷했다. 오랫동안 코카콜라의 아성에 도전했던 펩시나 세븐업은 각각 코카콜라를 뛰어넘는 것이 아니라 자신만의 위치를 전략적으로 파고드는 게 더 중요하다는 것을 깨닫게 되었다. 1967년부터 세븐업은 “The Uncola” 캠페인을 시작했다. ‘콜라가 아닌 음료를 찾는다면 그것은 세븐업’이라는 전략으로, 소비자들이 코카콜라 다음의 위치에 바로 세븐업을 떠올릴 수 있도록 한 것이다. 그런가 하면 펩시는 코카콜라가 그 역사가 오래된 브랜드라는 사실을 겨냥해 ‘젊은 음료’라는 이미지를 꾸준히 강조해 왔다. 이미 60년대부터 “젊은 생각을 하는 이라면 펩시”라거나 “당신은 펩시 세대”라는 슬로건으로 코카콜라와의 대립각을 세웠던 펩시는 1980년대 당대 최고의 팝스타였던 마이클 잭슨 등의 젊은 모델을 기용해 “새로운 세대의 선택”이라는 슬로건을 내건 CF를 방영하며 빠른 속도로 코카콜라의 점유율을 위협하기 시작했다. 그 전략에 위협을 느낀 코카콜라는 1985년 잠시 오리지널 코카콜라를 대체하는 새로운 음료 ‘뉴 코크’를 시장에 선보이며 펩시의 전략을 따라갔다가 하마터면 1위 자리를 빼앗길 뻔 하고는 1990년 “Can't Beat The Real Thing.”(진짜를 이길 수 없다)는 슬로건으로 돌아왔다. 때론 자신이 2등인 것을, 더 강한 경쟁자와 맞서 싸우는 존재임을 드러내는 것이 도움이 될 때가 있다.

 

 

2등이었던 걸 잊지 마라

 

2등이었던 것을 강조하며 1등과의 차이점을 내세운 브랜드들이 1위와의 격차를 줄였을 때 흔히 느끼는 충동이 있다. 바로 자신들이 1위를 노린다는 걸 선언하는 것이다. “The Uncola” 캠페인으로 재미를 봤던 세븐업의 성장세가 꺾이기 시작한 기점은 1978년 “America is turning 7 Up”(미국이 세븐업으로 돌아서고 있다) 캠페인부터였다. ‘코카콜라가 아닌 음료를 찾는다면 세븐업이다’라는 전략으로 성공을 거뒀던 과거의 전략과 정면으로 충돌하는 캠페인이었고, 기대했던 만큼의 성과를 거두지 못했다. 에이비스 또한 1971년 “1등이 되려 합니다”라는 슬로건을 내걸면서 그 상승세가 꺾였다. 이미 “우리는 2등입니다”라는 슬로건에 맞서 업계 1위인 헤르츠가 “우리가 1등인 이유를 말씀 드리겠습니다”로 응수한 뒤에 등장한 광고였다. 1등을 끊임없이 추격하는 도전자의 이미지에서 성급하게 승리 선언을 하는 것으로 방향을 튼 순간, 언더독을 응원하던 사람들의 열광도 한풀 꺾여버린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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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디오스타’는 이와 같은 실수를 범하지 않았다. ‘라디오스타’는 <황금어장>의 유일한 생존자가 된 이후에도 자신들의 B급 콘셉트와 자기 비하를 쉽게 버리지 않았고, 마침내 지상파 심야 토크쇼의 절대강자가 된 이후에도 쉽게 승리 선언을 하지 않았다. 자신들이 어떤 콘셉트로 그 자리까지 올라왔는지 잊지 않은 ‘라디오스타’는 꾸준히 제 콘셉트를 유지하는 선에서 천천히 이미지를 확장했고, 그 덕분에 지금의 위치를 확고히 다질 수 있게 되었다. 약점은 잘 활용하면 당신의 무기가 될 수 있다. 하지만 유리한 고지를 점유했다고 해서 바로 그 약점을 버리고 강자들의 무기를 취하려 든다면 상황은 다시 급변할 것이다. 애초에 자신이 성공한 원인을 끝까지 잊지 마라. 아무리 찜찜하고 다소 초라해 보여도, 한번 무기로 휘둘러 성공한 이상 그것은 당신이 포기해선 안 되는 당신만의 특징이 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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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승한(TV 칼럼니스트)

TV를 보고 글을 썼습니다. 한때 '땡땡'이란 이름으로 <채널예스>에서 첫 칼럼인 '땡땡의 요주의 인물'을 연재했고, <텐아시아>와 <한겨레>, <시사인> 등에 글을 썼습니다. 고향에 돌아오니 좋네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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