이름을 넘어서
소포클레스의 그리스 비극 안티고네』
나 역시 ‘유리’란 이름대로 어쩌면 투명하고 맑은 사람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을 뛰어넘어서 그저 투명하고 맑기만을 암묵적으로 권장하는 사회에서 좀 더 유난을 떨고 지랄을 하며, 분탕질 하고 싶다. 투명하고 맑기만 하면,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을 테니까.
오다케 신로의 작품 「난파선」
1989년 추운 겨울에 한창 유행했던 작명법이 있었다. 그 기준은 첫째, 발음하기 쉬울 것. 둘째, 한글일 것. 셋째, 뜻이 좋을 것. 그 겨울, 어머니를 엄청난 식욕으로 고통스럽게 하더니 끝끝내 양수까지 터트리고 나와 제왕절개까지 시킨 내가 ‘김유리’란 이름을 가지게 되었다. 작명법에 맞추어 나는 발음하기 쉽고도 한글이며, 투명하고 맑은 아이라는 뜻의 ‘유리’가 만들어졌다. 하지만 나는 내 이름을 단 한 번도 좋아하지 않았다. 키도 작고 평범하기 그지없었던 ‘김유리’와 키도 크고 활발하며 우등생인 ‘김유리’를 오해하는 일이 종종 있었기 때문이었다. 나는 주로 전자에 속했다. 이름의 뜻마저도 마음에 들지 않았다. 나는 투명하고 맑음과는 확실히 거리가 멀다. 어쨌든 이름처럼 ‘투명하고 맑게’ 살기를 바라는 부모님 뜻대로 살진 않았고, 그럴 수 없다는 것도 커가면서 알게 되었다. 그건 그냥 모든 것에 순응한다는 말이나 다름 없었다.
문학작품을 보다 보면, 상당히 ‘이름’이 중요하다는 사실을 알 수 있다. 작품의 주제를 담는 이름도 있고, 이름 속에 모든 것이 내포된 소설도 본 적이 있다. 대표적인 작품은 소포클레스의 그리스 비극인 『안티고네』. Antigone. 어원적으로 분석해 보자면 Anti-gone으로 볼 수 있다. ‘거슬러 걷는 자’란 뜻을 함의하고 있는 안티고네의 이름은 그녀의 마지막을 설명하기에 부족함이 없어 보인다. 아버지는 ‘발이 부어오른’ 오이디푸스였으며, 그녀가 관습법으로 마지막 장례의식을 치러주려 했던 오라버니 폴뤼네이케스는 자신의 아버지를 불구로 만든 테바이에, 자신의 혈육에, 자신의 운명들에게 ‘많이 다투다’ 죽었다. 그럼 그녀가 거슬러 걷고자 한 이유는 무엇 때문이었을까. 그리고 그녀의 이른바 “안티성”이 비단 그녀에게만 해당되는 일인가.
비단 『안티고네』뿐만 아니라 많은 예술가들은 자신들의 작품, 혹은 자신들의 삶 속에서 감상자인 우리로선 이해할 수 없는 비합리적인 모습들을 보여준다. 우리는 그것을 보면서 공포와 연민에 휩싸이게 되고, 카타르시스를 느끼게 된다. 그것은 아리스토텔리스가 말했듯 예술이란 “특수한 유형의 사람들이 특수한 경우에 어떻게 행동할지 보여주는 사례들의 전시장”이기 때문에 발생하는 경험이다. 일련의 정신의 틀인 예술은 카타르시스를 통해 행복에 사람들이 다가갈 수 있게 해줌으로써 자신의 가능성을 최대 실현하고 일상적인 삶의 요구와 필요로부터 해방된 삶을 맛보게 한다. 즉, 우리는 예술을 통해서 현실에서 해방된다. 이는 예술이 현실을 거부하는 ‘안티성’을 전제하고 있음을 보여준다.
그렇다면 왜 안티성이 중요한 것일까. 일련의 예를 들어보자. 한국소설사의 잣대 중 하나로 ‘자아’를 빼놓을 수 없다. 그 중에서도 근대의 발명품으로서의 ‘나’, 근대적 주체는 주체의 부정으로 생성된다. 이상이 자아와 세계의 대립을 극명하게 보여주면서 자아의 분열과 소외를 일으키고, 김승옥은 자아의 책임을 물으면서 자아와 또 다른 자아의 대립을 보여준다. 그들은 자기 자신의 존재를 철저한 자기 ‘부정’에서 시작한다. 이러한 자기부정의 역사는 현대소설에서도 찾아볼 수 있다.
현대소설사에서도 엿볼 수 있듯이 발전에 있어서 고독하고도 처절한 자기부정은 필수불가결의 요소이다. 아버지 오이디푸스가 ‘발 부은 자’로서 인간의 불완전성을 대표하는 인물이었다면 딸인 안티고네는 ‘거슬러 걷는 자’답게 국가법을 대변하는 크레온에게 자연법(혹은 관습법)을 지키라고 당당히 말한다. 그녀에게서는 죽음도 불사하는 용기가 느껴진다. 하지만 ‘안티성’이 여기에서 끝났다면 그녀는 아버지처럼 이름에 머무르는 사람이었을 것이다. 크레온(국가법) 입장에서 본다면 그녀는 분명 ‘거슬러 걷는 자’이다. 하지만 그녀는 진정한 ‘안티성’을 획득하기 위해서 자기부정을 한다. 그녀야말로 권력과 전쟁 속에서 여러 변명들로 고대부터 지켜져 내려오던 관습법을 ‘거슬러 걷는 시대’ 속에서 ‘올곧게 걷는 자’였다. 그녀가 보여주듯 진정한 안티성은 현실과 일상을 똑바로 직시하고 잘못된 것을 거부하는 것이다. 자기가 딛고 있는 땅이 본래부터 없었다고 그 땅 자체를 리셋(re-set)하진 않는다. 하지만 그 땅의 흙이 좋지 않다면 좋은 토양으로 바꾸기 위해 새로운 흙을 바꾸길 끊임없이 말한다.
인간의 운명은 이러한 이름부정, 자기부정에서 시작되는 것이 아닐까. 21세기에도 대한민국 어디선가, 지구 반대편 어디선가 제2, 제3의 안티고네들이 태어나고 커가고 있다. 그네들이 품고 있는 이름은 각기 다르다. 안티고네들은 자신에게 부여된 이름을 사회의 시스템에 통용되는 의미에서 해석하다 운명에 좌절할 수도 있겠다. 하지만 그 중에서도 통용의미를 처절하게 반항하면서 자신만의 부정(Anti)성의 의미를 획득하는 안티고네들이 있을 것이라 믿는다. 안티고네 말대로 그녀들은 “맨 마지막으로 누구보다도 가장 비참하게 지하로 내려가고” 있으면서도 “희망을 품고 있”는 자들이기 때문이다. 그리고 이 희망으로 인해 통용의미의 중점인 사회가 안티성을 향해 일보 전진한다.
나 역시 ‘유리’란 이름대로 어쩌면 투명하고 맑은 사람일 수도 있다. 하지만 그것을 뛰어넘어서 그저 투명하고 맑기만을 암묵적으로 권장하는 사회에서 좀 더 유난을 떨고 지랄을 하며, 분탕질 하고 싶다. 투명하고 맑기만 하면, 바뀌는 건 아무것도 없을 테니까.
안티고네소포클레스 저 | 새문사
일반 독자와 전공자 모두를 염두에 두고, 오늘날의 외국어 독자의 눈과 귀, 그리고 상상력에 친밀하게 가닿는 번역, 공연처럼 물 흐르듯 읽히는 번역, 가독성과 정확성을 지닌 번역을 다하려고 했으며, 작품 이해에 도움이 되는 참신한 해설을 덧붙였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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드물고 어려운 고귀한 것 때문에 이렇게 살아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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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안티고네]는 일반 독자와 전공자 모두를 염두에 두고, 오늘날의 외국어 독자의 눈과 귀, 그리고 상상력에 친밀하게 가닿는 번역, 공연처럼 물 흐르듯 읽히는 번역, 가독성과 정확성을 지닌 번역을 다하려고 했으며, 작품 이해에 도움이 되는 참신한 해설을 덧붙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