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불후의 칼럼 > 이승한의 예능, 매혹의 기술
KBS가 아니었더라도 ‘남격’이 새로워 보였을까?
당신의 전장은 당신이 결정해라 (3)
결국 중요한 건 어떤 카드를 꺼내 구사하는 게 유리한 상황인지, 내가 서 있는 전장의 유불리를 읽어내는 것에 있다.
(당신의 <우리동네 예체능>은 무엇인가? - 당신의 전장은 당신이 결정해라 (2) 에서 이어집니다.)
가끔은 익숙함이 독이 될 때도 있다. 2008년의 이경규가 그랬다. 리얼 버라이어티의 시대에 적응하지 못하던 그에게 SBS <이경규 김용만의 라인업>(2007~2008)은 야심 찬 도전이었지만, 결과가 그 야심에 부응하진 못했다. 10명 안팎을 오갔던 멤버들 간에 화학작용이 일어날 시간이 부족했던 것이 화근이었고 그 와중에 프로그램의 정체성이 자꾸 바뀐 것도 문제였다. 사람이 일이 안 풀리기 시작하면 한꺼번에 꼬인다고, <이경규 김용만의 라인업>이 끝난 다음 주엔 MBC <일요일 일요일 밤에>(이하 <일밤>)에서 선보였던 리얼 버라이어티 ‘간다 투어’도 덩달아 2개월 만에 막을 내렸다. 사람들은 예능의 미래로 MBC <무한도전>의 유재석과 KBS <해피선데이> ‘1박 2일’의 강호동을 이야기했지, 이경규를 이야기하진 않았다. 그럴 법도 한 것이, 20년 가까이 <일밤>을 지켜왔던 이경규는 더 이상 참신함이나 미래로 거론하기엔 너무 익숙한 존재였다.
화학작용을 만들어 내기엔 사공이 너무 많았고, 이경규의 도전은 실패로 돌아갔다.
<이경규 김용만의 라인업> ⓒSBS. 2007~2008
권력관계를 뒤흔드는 새로운 그림을 그렸으나
익숙했던 친정에서 거절을 당하다
연이은 리얼 버라이어티 도전에서 쓴 맛을 봤지만 이경규는 무엇이 문제였는지 얼추 파악하고 있었다. 그간 <일밤>에서 그가 선보였던 코너들 중에서도 원시적인 형태의 리얼 버라이어티라 부를 만한 것이 없었던 건 아니었다. 하지만 이경규가 성공을 거뒀던 리얼 버라이어티에는 꼭 한 명쯤은 그를 견제하거나 반기를 들 만한 인물이 함께 해서 힘의 균형을 맞춰줬다. ‘대단한 도전’과 ‘건강보감’에는 언제나 큰형님 역할로 이경규에게 딴죽을 걸어주던 조형기가 있었고, ‘이경규가 간다’나 ‘양심냉장고’ 등의 프로그램엔 각종 분야의 전문가들이 파트너로 참여해 이경규의 반대편에 무게를 실어줬다. 반면 이경규가 2000년대 들어 실패를 맛본 리얼 버라이어티에는 그를 견제해줄 만한 카운터파트가 없었다. 마치 그 나이 또래의 남자들이 슬슬 가정에서 자신을 통제할 부모 세대를 잃고 서서히 가족 내 최고 권력자가 된 채 낡은 모습으로 늙어가는 것처럼. 이경규는 자신이 상징하는 중장년 남성들이 약한 모습을 보이고 쩔쩔 매는 모습을 보여줄 수 있는 도전을 하는 게 먹힐 지도 모른다는 생각을 하고 중년의 남자들이 여러 가지 낯선 미션에 도전하는 프로그램을 기획했다.
이경규가 선보였던 리얼 버라이어티에서 이경규에게 잔소리를 할 수 있는 연장자로 기능했던 조형기.
<일요일 일요일 밤에> ‘대단한 도전’ ⓒMBC. 2002~2005
문제는 앞서 얘기했듯 <일밤>과 이경규의 조합이 이제 더 이상 새로워 보이지 않는다는 것에 있었다. 게다가 이미 비슷한 DNA를 지닌 <무한도전>을 토요일 주력 상품으로 배치한 MBC 입장에선 일요일에 비슷한 쇼를 선보이는 것이 탐탁치 않았을 것이다. 연이은 실패로 이경규란 이름이 보장하는 바가 어느 정도 퇴색한 것도 한몫 했다. 이런 저런 이유가 겹치며 이경규와 <일밤>은 결별에 이르렀다. 아무리 좋게 표현해도 일방적인 경질에 가까웠던 상황, 이경규에겐 아마 앞선 실패들보다 <일밤>과의 결별이 더 큰 상처였을 것이다. 그리고 그때 이경규는 커리어 전체에서 가장 거대한 도박을 감행한다. 한때 <일밤> 그 자체와도 같았던 이가, 2009년 <일밤>의 경쟁 프로그램인 KBS <해피선데이>로 이적한 것이다. 그것도 MBC에서 거절당한 기획안의 초안을 들고서.
같은 기획안이라도
더 돋보일 수 있는 무대가 있는 법
물론 MBC에서 기획안이 통과가 되고 일이 진행되었다 해도 ‘남자의 자격’은 제법 새로운 그림이었을 것이다. 멤버들 중 이경규와 오랜 시간 호흡을 맞춘 ‘규라인’이라 부를 만한 멤버는 이윤석 한 명뿐이었던 반면 이경규가 껄끄러워 할 만한 캐릭터는 제법 많았으니까. 연차로는 후배지만 중량감으로는 뒤쳐진 적이 없는 앙숙 김국진과 이경규의 통제를 매번 벗어났던 김성민이 버티고 있었고, 나머지 멤버들도 함께 호흡을 맞춰본 경험이 없기는 마찬가지인 낯선 환경이었다. 2000년대 들어 이경규가 선보였던 모든 예능 중 가장 새로운 그림이었고, 도전하는 미션 또한 중년 남자들이 자주 해본 적 없는 양육, 그루밍, 자기 고백, 친구로서의 이성친구 만들기 등 그간 방송에서 주목하지 않았던 소소한 부분들이었다. 하지만 이 모든 새로운 시도들이 초반부터 높은 관심을 받을 수 있었던 가장 큰 이유는, 그것이 <일밤>이 아닌 <해피선데이>를 기반으로 했다는 점에 있었다.
낯선 도전, 낯선 역학관계, 낯선 방송국. 20여년간 <일밤>만 하던 이경규가 갈 수 있던 가장 새로운 무대.
<해피선데이> ‘남자의 자격’ ⓒ한국방송. 2009~2013
MBC 예능의 상징과도 같던 사람이 친정인 <일밤>을 향해 전면전을 선택했다는 점 자체가 대중에겐 관심의 대상이 되었다. 얼마나 칼을 갈고 나왔을지 모두가 주목하는 바람에, <해피선데이>가 ‘새로운 도전’이나 ‘변화’와 같은 키워드들을 가장 빛나게 해줄 만한 무대가 된 셈이다. 그리고 그렇게 모두가 주목한 환경에서 보여준 콘텐츠는 ‘중년의 남자들이 인생 후반전에 접어들며 낯선 도전을 하며 새로운 삶을 산다’는 중심 서사를 가지고 있었는데, 그 모습이 마침 KBS <해피선데이>라는 낯선 환경에서 적응하려 노력하는 이경규의 모습과 절묘하게 일치했다. <일밤>을 떠난 것은 이경규가 바라거나 예상한 바가 아니었으나, 결과적으론 본인의 노력과 기획이 가장 돋보일 수 있는 전장을 찾아가게 된 것이다.
익숙함이냐 새로움이냐가 문제가 아니라
어디서 어떻게 구사하느냐가 문제다
잘할 수 있는 일들 위주로 전장을 재구성하라는 이야기가 무조건 익숙한 곳으로 회귀하라는 뜻으로만 읽혀선 안 된다. 강호동이 자신에게 익숙한 승부의 세계로 돌아간 것이나 유재석이 본인에게 익숙한 스튜디오 녹화로 돌아간 것에 대해 한참 이야기하고선 이제 와서 무슨 이야기를 하는가 싶겠지만, 강호동이 그 익숙한 승부의 세계를 예능과 본격적으로 결합한 건 KBS <우리동네 예체능>이 처음이었고, 유재석 또한 MBC <강력추천 토요일> ‘무리한 도전 - 퀴즈의 달인’처럼 야외 버라이어티로 시작한 프로그램의 정체성을 뒤집어가며 실내 스튜디오로 가지고 들어간 전례는 드물다. 본인들에게 익숙한 방식이나 익숙한 필드를 찾았지만 도전 자체는 과격한 승부수에 가까웠다. 마냥 익숙한 곳으로만 회귀하라는 것이 아니라, 같은 노력이라면 그 값을 더 인정받을 수 있는 유리한 길을 찾으라는 것이다.
유재석과 강호동이 자신에게 익숙한 요소를 쇼에 이식해 숨을 고르고 게임의 양상을 바꿨다면, 이경규는 패색이 가장 짙은 순간 본인이 설 무대를 ‘새로움’이란 요소를 가장 돋보이게 할 수 있는 곳으로 바꿈으로써 커리어를 리부트했다. 익숙함과 새로움은 상황에 따라 골라 꺼낼 수 있는 카드일 뿐, 그 자체로 어드밴티지를 주거나 게임을 유리하게 만드는 것은 아니다. 결국 중요한 건 어떤 카드를 꺼내 구사하는 게 유리한 상황인지, 내가 서 있는 전장의 유불리를 읽어내는 것에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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관련태그: 이승한, 이경규, 리얼 버라이어트, 남자의 자격
TV를 보고 글을 썼습니다. 한때 '땡땡'이란 이름으로 <채널예스>에서 첫 칼럼인 '땡땡의 요주의 인물'을 연재했고, <텐아시아>와 <한겨레>, <시사인> 등에 글을 썼습니다. 고향에 돌아오니 좋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