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랩의 본질을 탐미하다, 화지

화지 - 〈ZISSOU〉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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허탈감을 쾌락으로 채우는 청춘들에 대한 <EAT>와 니힐리즘에 대한 반항의 움직임을 권하는 <ZISSOU>, 이 연속된 두 수작을 만든 화지는 엔터테인먼트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여타 다른 래퍼들과는 근본적인 차이를 보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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불타는 도시 위에 떠 있는 비행기와 그 안에서 팝콘을 씹으며 관람하고 있는 한 남자가 그려진 앨범 재킷이 음반이 취하는 태도를 대변한다. 현시대 청춘의 여러 변질된 성질을 점철하는 니힐리즘(Nihilism), 즉 무(無)를 뜻하는 지독한 허무주의에서 벗어나자는 주장은 자유와 평화를 추구한 1960년대 히피의 정서와 맞닿아있다. 20세기의 히피가 아닌 21세기에 새로 등장한 히피임을 자처한 화지는 현재 자본주의 제도와 통념을 꼬집으며, 이는 곧 무너질 것을 암시한다. 이러한 비관론적인 시선과 함께 그는 냉소적인 어감을 취한다. 곧 불바다가 될 나라를 편히 구경할 수 있는 상아탑을 짓자 제안하는 첫 트랙은 심지어 교활해 보이기까지 한다.

 

탈출에 대한 욕망엔 시대를 경멸하는 시선이 서려 있다. 시스템의 모순과 현상의 이유를 늘어놓거나 자세한 설명을 덧붙이지 않은 채, 그저 그와 같이 '새 히피'가 될 것인지, 시스템에 암묵적으로 동의하여 스스로를 굴레에 묶을 것인지의 선택지를 제시할 뿐이다. 무관심한 뉘앙스로 제안을 하는 「히피카예」와 직설적인 「서울을 떠야돼」가 대표적이다. 자신의 신념의 확고함을 말하는 「꺼져」나 동창회라는 장치를 빌려 '새 히피'의 월등함을 비꼬듯 주장하는 「그건 그래」는 위의 권유를 뒷받침한다. 재치 있는 비유와 은유가 즐비한 불친절한 가사는 곱씹어 볼수록 해석의 쾌감을 선사한다. 특히 한글과 영어를 혼용하지 않으면서 라임을 유지하는 능력과 통렬한 단어 선택엔 가사를 쓰는 래퍼의 무수한 고민이 묻어난다.

 

메시지의 큰 비중을 두어 듣는 맛을 소홀히 하는 경우는 <ZISSOU>엔 해당하지 않는다. 일정한 무드를 머금은 거친 트랙이 연속적으로 배치되었음에도 전혀 지루하지 않다. ‘그건 그래’나 ‘오 주여 구하소서’ 같은 간단한 단어들로 만들어진 재미있는 훅과 긴장감을 조성하는 묵직함과 흐트러짐이 없는 유려함을 동시에 갖춘 화지의 탁월한 래핑은 귀를 즐겁게 한다. 또한 앨범의 모든 트랙에 프로듀싱을 맡은 영 소울의 로파이 감질 비트는 앨범이 일궈낸 또 하나의 성취이다.

 

허탈감을 쾌락으로 채우는 청춘들에 대한 <EAT>와 니힐리즘에 대한 반항의 움직임을 권하는 <ZISSOU>, 이 연속된 두 수작을 만든 화지는 엔터테인먼트적인 측면을 강조하는 여타 다른 래퍼들과는 근본적인 차이를 보인다. 관점이 옳으냐 그르냐를 떠나 힙합의 오락성을 갖추는 동시에 이러한 탐구적인 가사를 쓰는 래퍼는 드물다. 랩의 본질을 탐미하고 이를 잘 구사하는 래퍼 또한 드물다. 화지와 그의 앨범들은 조명이 시급하다.


 
2016/02 이택용(naiveplanted@naver.com)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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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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