부엌의 화학자는 연구실에서 일하고 요리사는 주방에서 일하지만, 남다른 작업으로 차별화되기 위해 끊임없이 연구하고 결과물을 내놓아야 하는 것은 둘 다 마찬가지다.
나는 물리화학자다. 물질을 분석하고, 물질의 거시적 속성과 미시적/원자적 내부 구조 사이의 관계에 관해 연구한다. 물리화학자에게 음식물은 일종의 물질로 고려될 수 있다. 사람이 먹고 마시는 음식물도 일단은 물질이니까. 따라서 음식물은 물질로서 물리학의 법칙을 따른다. 음식물을 이루고 있는 분자들은 수많은 반응을 통해 상호작용을 일으키며, 그 반응들은 분석과 예측이 가능하다. 그러므로 물질을 연구하는 재료과학 같은 학문이 요리에 관심을 갖는 건 당연하다. 과학자가 요리를 두고 과학을 하듯이 여러 반응을 분석/연구/해석하고 이론적 모델을 만든다고 해서 이상하게 여길 일은 아니라는 얘기다. 그리고 그 같은 연구들은 장기적 관점에 따른 기초과학의 성질을 띨 수도 있고, 즉각적 활용을 위한 응용과학의 성질을 띨 수도 있다.
이처럼 분자요리학molecular gastronomy은 요리를 과학적인 시각으로 접근하는 활동으로, 이에 따른 일련의 새로운 자료와 지식은 혁신적인 방식에 관심이 많은 요리사들에게 유용한 도구로 활용되고 있다. 그런 데 사실 분자요리는 사람들이 흔히 생각하듯 ‘유행’으로 치부할 만한 것이 아니다. 이 문제에 대해서는 뒤에 가서 다시 이야기하기로 하자.
프랑스 요리혁신센터의 연구들이 확인시켜주듯 분자요리는 사람들의 선입견과 달리 건강에도 좋고 맛도 좋은 요리가 될 수 있다. 원 재료의 성질을 최대한 살려서 만드는 음식이기 때문이다. 게다가 분자요리는 불필요한 것을 뺀 요리라는 점에서도 즐거움과 만족감을 안 겨준다.
가령 분자요리의 관점에서 밀가루는 더 이상 비스킷에 꼭 필요한 재료가 아니며, 달걀이 없어도 수플레souffl?(달걀흰자를 거품 낸 것에 다양 한 재료를 섞어 오븐에 구워낸 요리)를 만들 수 있고, 베이킹파우더 없이 케이크를 부풀릴 수 있으며, 설탕 시럽 없이 셔벗을 만들 수 있다. 그렇다고 분자요리를 만들 때 마술이라도 부려야 하는 건 절대 아니다. 최소한의 지식만 있으면, 그리고 기존의 방법을 재검토하고 새로운 기술적 도구를 사용하는 것을 겁내지만 않으면 된다. 경험에 의존하는 요리 대신 정확한 지식에 따른 요리를 만드는 것이다. 그러면서 맛도 좋은!
예를 한 가지 들어보자. 물리화학자인 나는 자동차 타이어와 껌, 밀가루 반죽, 비닐봉지를 동일한 도구로 기술하고 분석한다. 물질의 변형과 움직임을 연구하는 유동학流動學의 관점에서 보는 것이다. 그렇다면 그 물건들 중 하나를, 가령 껌을 손가락으로 아주 조금 잡아 늘였다가 놓았다고 상상해보자. 이 경우에 껌은 처음 모양으로 되돌아간다. 탄성彈性(외부 힘에 의하여 변형을 일으킨 물체가 힘이 제거되었을 때 원래 모양으로 되돌아가려는 성질*)을 지녔기 때문이다. 그런데 조금이 아니라 충분히, 즉 어떤 한계치 이상으로 늘였다가 다시 놓으면 껌은 약간 수축되기는 해도 완전히 처음 모양으로 되돌아가지는 않는다. 가소성可塑性 (외부 힘에 의해 변형을 일으킨 물체가 그 힘이 없어져도 원래 모양으로 돌아가지 않는 성질로, 탄성 한계를 넘는 힘이 작용할 때 나타난다.*) 때문에 ‘늘어진’ 상태 가 되는 것이다. 그리고 거기서 다시 더 잡아 늘이면 껌은 결국 끊어지고 만다. 이처럼 물질 중에는 기계적으로 외부의 힘(응력)이 가해졌을 때 탄성이나 가소성 혹은 파열이라는 세 용어로 설명할 수 있는 반응을 보이는 것이 많다. 껌, 밀가루 반죽, 자동차 타이어, 비닐봉지도 모두 마찬가지다. 물론 일정한 힘이 가해졌을 때 늘어나는 정도와 변형이나 파열이 일어나는 데 필요한 힘은 물질에 따라 큰 차이가 있지만, 외부의 힘과 변형률의 상관관계를 그래프로 나타내보면 매번 전체적으로 비슷한 모양의 곡선이 그려지는 것을 알 수 있다.
그런데 물질 중에는 늘어나는 단계를 거치지 않고 바로 파열되는 것들도 있다. 예를 들어 유리판, 설탕을 녹여 만든 장식, 자기로 된 접시 같은 것은 강한 힘이 가해지면 육안으로는 확인할 수 없을 정도로 아주 조금 변형되었다가 곧 깨진다. 이 같은 물질은 늘어나는 성질을 가진 물질에 비해 부서지기 쉽다.
어쨌든 여기서 제일 중요한 것은 물질의 여러 속성에 관한 정확한 정의가 아니라, 음식물도 일단은 그 내부 구조에 의해 속성(기계적 속성 이든 미각적 속성이든)이 결정되는 물질이라는 사실이다. 가령 캐러멜 사탕은 유리판처럼 깨지는 데 반해 피자 도우는 고무처럼 늘어나는 이유는 내부 구조 측면에서 캐러멜 사탕은 유리판과 비슷하고 피자 도우는 고무와 비슷하기 때문이다. 유리판과 캐러멜 사탕은 분자들이 불규칙 하게 배열된 비결정성非結晶性 고체로서, 액체가 응고된 상태로 볼 수 있다(고체의 결정성과 비결정성에 관해서는 107쪽 참조).
이 경우 물질의 내부 구조는 분자들의 집단적 움직임을 허용하지 않는다. 그래서 외부의 힘이 가해지면 분자들 사이의 결합이 끊어지고, 그 결과 거시적으로는 물질이 파열되는 현상이 나타난다. 이에 반 해 피자 도우에 함유된 글루텐이라는 단백질 분자들은 고무를 이루는 고분자처럼 행동한다. 반죽 과정에서 서로 얽혀 탄성을 지닌 그물 구조를 형성하는 것이다. 이 글루텐 분자들은 외부의 힘이 가해지면 힘의 방향에 따라 미끄러지듯 함께 움직이며, 따라서 피자 도우는 늘어나긴 해도 쉽게 끊어지지는 않는다.
지금까지 말한 예들에서 우리가 기억할 점은 재료과학이 알려주는 모든 지식은 요리에도 활용될 수 있다는 사실이다. 요리혁신센터에서 내가 맡은 역할이 바로 과학적 지식과 도구를 요리에 적용하는 것인 데, 이를 위해서는 기초과학적 또는 응용과학적인 연구 작업도 물론 필요하다.
음식물에 대한 내 연구는 요리사 한 사람과의 긴밀한 협력 속에 이루어지고 있다. 이제는 친구처럼 지내는 셰프 티에리 막스가 그 주인공이다. 티에리 막스를 처음 만난 건 약 10년 전의 일인데, 이 만남은 과학자로서의 내 이력에 큰 변화를 가져오면서 내 인생 자체를 완전히 바꾸어놓았다. 그때 나는 물질의 구조에 관한 박사 논문을 마무리하고 있었다. 그러다 티에리 막스가 요리사의 입장에서 구조와 구조의 파괴에 대해 이야기한다는 사실을 알고 관심을 갖게 된 것이다. 그는 간결하면서도 세련된 요리를 하는 사람이었는데, 그런 요리들 역시 그가 하는 말만큼이나 나를 사로잡았다. 일관성이란 바로 그런 것이었다. 티에리 막스는 음식으로 사람들에게 즐거움과 감동을 주는 게 목표라 고 했고, ‘잘 아는 목적지를 이전과는 다른 방법으로 가보는 여행’ 같은 요리를 만들고 싶다고 했다. 듣기에만 그럴듯한 게 아니라 현실성도 있는 말이었다.
그래서 나는 티에리 막스에게 연락을 취했다. 그러자 그는 자기 레스토랑이 있는 코르데양 바주 호텔에 와서 며칠 지내지 않겠냐는 제안을 해왔고, 나는 내가 가지고 있던 온갖 실험 장비(분당 1만 회 회전하는 원심분리기, 증류기, 건조기, 수소이온 지수 측정기 등등)를 곧장 자동차에 옮겨 싣고 출발했다. 레스토랑에서 나는 주방 한구석에 자리를 잡고 일 을 시작했다. 이런저런 실험을 하고, 질감을 테스트하고…. 물론 더없이 후한 대접을 받으면서 말이다. 나는 주방 곳곳을 마음대로 돌아다녔고, 모든 냉장고를 열어볼 수 있었으며, 완성된 요리가 차려진 테이블에서 홀로 점심을 먹는 특권도 누렸다(내가 제일 좋아하는 시간이었다). 그렇게 나는 주방의 모든 업무를 지켜보면서 많은 것을 관찰했고, 관찰한 것보다 더 많은 것을 분석했다. 그리고 이 주말여행은 일주일간의 잊을 수 없는 ‘작업’으로 연장되었다.
과학과 요리의 접목은 당연히 많은 테스트와 질문과 실험을 통해 이루어졌는데, 특히 이 과정에서 점차 풍성해진 요리사들과의 대화는 내게도 요리사들에게도 많은 도움이 되었다. 결국 티에리 막스와 나는 함께 일하는 게 좋을 것 같다는 결론에 이르렀다. 함께 일하고 싶은 마음이 무엇보다 크게 작용했다.
요리는 음식으로 즐거움과 감동을 주는 일이다.
우리는 각기 다른 방식으로 물질에 접근했지만 중요하게 여기는 부분은 서로 같았다. 한 사람은 감동을 주는 요리의 아름다움을 탐구하고 다른 한 사람은 과학에 내재된 아름다움을 탐구하지만, 물질의 아름다움을 탐구한다는 점은 마찬가지였기 때문이다. 연구 활동의 본질은 바로 그 같은 탐구에 있다. 이상적이고 절대적인 것에 대한 동경이 예술가도 과학자도 앞으로 나아가 게 만드는 법이다.
이 책은 왜 껌은 늘어나는데 캐러멜은 딱딱하게 굳어서 유리처럼 깨지는지를 알려주는 책이다. 하지만 나는 요리에 대해 그 같은 과학적 설명을 제시하는 것에만 그치지 않을 생각이다. 내가 이 책을 통해 꼭 말하고 싶은 바는 학계와 요리업계처럼 얼핏 생각하기에는 별개의 것처럼 보이는 세계의 사람들이 서로 힘을 합하면 이전과는 다른 방식으로 발전하면서 혁신에 이를 수 있을 뿐만 아니라, 각자가 자기 일에서 큰 기쁨을 얻을 수 있다는 점이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다양한 독자층이 이 책의 내용을 쉽게 소화할 수 있도록 하는 데 많은 신경을 기울였다. 첨부된 부엌과 실험실의 사진들을 보면 여기에 제시된 몇몇 개념과 요리 및 실험 과정을 이해하는 데 도움이 될 것이다.
과학이든 요리든 물질의 아름다움을 탐구하는 것은 마찬가지다.
부엌의 화학자 : 화학과 요리가 만나는 기발하고 맛있는 과학책
라파엘 오몽 저/김성희 역 | 더숲 cuisine
요리를 통해 화학을 배우고, 화학을 통해 최고의 요리 레시피를 만날 수 있는 책 『부엌의 화학자』가 출간되었다. 젊고 실험적인 물리화학자 라파엘 오몽과 분자요리의 대가 티에리 막스, 이 재능 넘치는 콤비의 만남은 부엌을 과학 실험실로, 조리도구를 실험도구로 바꾸며 혁신적인 예술을 탄생시켰다.
[추천 기사]
- 지금 왜 셰익스피어를 읽어야 하는가
- K-POP으로 보는 대중문화 트렌드
- 총체적 난국에 빠진 대한민국 민낯 보고서
- 보통의 파스타가 지겨운 당신에게
- 고현정, 가까이 두고 오래 사랑할 도쿄 여행법
<라파엘 오몽> 저/<김성희> 역11,700원(10% + 5%)
『르 몽드』 『르 피가로』 등 프랑스 대표 언론들의 연이은 격찬! 혁신적인 물리화학자 라파엘 오몽과 분자요리의 대가 티에리 막스가 펼쳐내는 새로운 과학의 향연! 최근 방송 미디어 매체의 영향으로 요리에 대한 관심이 그 어느 때보다 뜨거워진 이때, 요리를 통해 화학을 배우고, 화학을 통해 최고의 요리 레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