도시를 걷다
김연수의 여행 에세이
오랫동안 기다린 책이라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통독해야 마땅하다. 도시도 마찬가지다. 처음부터 끝까지 걸으면서 구경해야만 한다.
PHOTOGRAPH : LEE CHUN-HEE
고등학교 1학년 때 누군가를 따라 대구에 간 적이 있다. 당시 ‘빽판’이라고 부르던 불법 음반을 사기 위해서였다. 빽판 가게는 대구역을 빠져나와 동성로를 지난 뒤에도 한참 더 걸어야 하는 곳에 있었다. 겉보기엔 평범한 음반 가게였는데, 빽판을 사러 왔다고 하면 뒷문을 가리켰다. 그곳은 조명이 어두웠다. 빽판 앨범 재킷은 파란색 일색이라 어쩐지 정육점에 들어온 듯한 느낌도 들었다. 그러나 감상에 빠져 있을 시간은 없었다. 먼저 온 이들이 정신 없이 판을 넘겨가며 재킷을 살피고 있었으니까. 재고 파악 같은 건 전혀 안 되기 때문에 먼저 잡는 사람이 임자였다. 열심히 뒤지다가 찾던 음반이 나오면 레코드를 꺼내 확인했다. 속지 같은 건 있을 리 없고 대개 판만 튀어나온다. 빽판은 과장을 보태어 얇은 피자 반죽 정도로 두꺼웠는데, 간혹 휘거나 다른 판이 들어가는 경우도 있기 때문에 잘 살펴봐야 했다.
한번 다녀오고 나니 내내 대구 생각만 났다. 돈을 모아 다시 대구에 갔다. 그리하여 대구는 내가 처음으로 혼자서 찾아간 도시가 됐다. 혼자서 찾아간 도시라면 무슨 생각부터 드는지? 나는 ‘걷는다’는 생각부터 든다. 아는 건 역 건물뿐이다. 그러므로 역에서 곧장 앞으로만 걷는다. 좌우로 방향을 틀면 헷갈리니까 계속 앞으로만 간다. 어느 정도 갔다 싶으면 돌아서서 역의 위치를 확인한다. 이제는 좌우의 골목을 탐색해도 된다. 역으로 돌아가는 길만 잊지 않으면 되는 것이다. 큰 길에서 점차 작은 길로 접어들면서 도시는 점점 흥미로워진다. 도시의 재미있는 것은 모두 뒷골목에 있으니까. 그렇게 대구 시내를 쏘다녔지만, 버스를 탄 적은 거의 없다. 버스를 탄다는 건, 뭐랄까, 그 동네에 사는 사람이나 하는 일 같았다. 역 앞에 중심가가 있으니 대개 버스를 탈 필요가 없었고, 역에서 조금 떨어진 곳을 가야
더라도 버스 노선을 알아보느니 그냥 걷는 편이 더 나았다. 걸으면 한 골목이라도 더 가보게 되니까 혹시 도시를 탐색하고 있다면 일거양득인 셈이다.
PHOTOGRAPH : PARK JUNG-HOON
고등학교를 졸업한 뒤 대학에 진학하기 위해 서울로 올라왔다. 서울역을 나서자 아는 골목이 하나도 없는 낯선 도시가 눈앞에 펼쳐졌다. 서울은 마치 내가 그토록 읽고 싶어 하던 소설책과 같았다. 표지만 봐도 가슴이 두근거리는 이 멋진 책을 앞에 놓고서 누가 발췌독을 하리오? (누가 버스를 타고 다니리오?) 누가 요약된 줄거리와 서평에 만족하리오? (누가 패키지 투어에 참가하리오?) 오랫동안 기다린 책이라면 시간이 얼마나 걸리든 통독해야 마땅하다. 도시도 마찬가지다. 처음부터 끝까지 걸으면서 구경해야만 한다. 신입생 때는 정말 많이 걸어 다녔다. 자취방이 있던 명륜동에서 대형 서점이 자리 잡은 종각까지는 당연히 걸어 다니는 것으로 여겼다. 대충 경로를 파악한 뒤에도 계속 걸어 다녔다. 세운상가에 가면 대구와는 비교도 하지 못할 정도로 엄청나게 큰 빽판 가게가 즐비했다. 게다가 그 많은 공구상이라니! 그 경로에 익숙해지자 동대문을 지나 황학시장까지 진출했는데, 그곳엔 빽판 가게며 헌책방이며 고물상이 가득해서 종일 구경해도 다 못 볼 정도였다. 그다음엔 서대문 쪽으로 방향을 돌렸다. 아현동으로 가는 길에는 우리말로 된 이름의, 수상쩍은 술집과 밤이면 쇼윈도에 불을 밝히는 웨딩드레스 가게가 기묘한 조화를 이루고 있었다. 조금 더 걸어가면 이대 앞이었는데, 거기서부터 신촌까지 학생 구역이었다. 신촌 주변을 거의 다 파악할 즈음 이대 후문의 작은 카페까지 섭렵하게 됐는데, 거기서 금화터널을 통과하면 독립문이 나오고 다시 사직터널을 지나면 광화문이 나왔다. 그렇게 내 머릿속에서 길은 온전한 형태를 갖추게 됐다.
이후 해외의 도시를 방문했을 때도 나는 마찬가지의 방법으로 도시를 여행했다. 자금성이나 대영박물관, 혹은 브란덴부르크 문 같은 곳이 내게는 관광지가 아니라 기준점 같은 곳이었다. 그곳을 구경하고 재빨리 다른 관광지로 이동하는 게 아니라 그 지점을 기준 삼아 하염없이 걷는 게 나의 여행법인 것이다. 서울의 뒷골목에서 빽판 가게나 헌책방을 발견하며 기뻐했듯이 외국의 도시에서도 가이드북에 나오지 않는 소소한 상점과 집을 보는 게 내겐 큰 즐거움이었다.
그러다가 다리가 아프면 가까운 공원을 찾아가 벤치에 앉아서 쉰다. 어느 도시든 공원이 있고, 공원 시설의 일부인 양 비둘기와 노인들이 있다. 나 역시 원래부터 거기 있었던 사람처럼 가만히 앉아서 주위를 둘러본다. 중앙에 만든 지 오래된 분수가 물을 뿜는 곳도 있고, 한쪽에 아이와 젊은 엄마로 북적이는 놀이터가 자리하는 곳도 있다. 어떤 곳이든 나무가 있다. 그리고 내가 떠나온 곳과 다름없이 그 나뭇잎으로 하오의 햇살이 비춘다. 바로 그 순간이 ‘여기는 어디이며 나는 누구인가?’라는 의문이 드는 때다. 대개 여행의 목적은 그런 의문을 정면으로 바라보는 데 있으니까, 비로소 나는 목적지에 다다른 셈이다. 여행이 끝나고 원래 머물던 곳으로 돌아오면 사람들은 여행은 잘했느냐고 묻고, 그런데 살은 왜 그렇게 빠졌느냐고 묻는다. 글쎄, 나는 여행 갔다가 살이 쪄서 돌아오는 사람이 더 이상하긴 하지만 “먹는 게 시원찮아서”라고 대답해준다. 그러면 대개 만족하니까. 그들은 만족하고 나는 살이 빠졌으니 더 바랄 게 없다.
김연수는 하루도 빠짐없이 글을 쓰며 쉬지 않고 소설과 에세이를 발표하는 부지런한 소설가다. 그가 <론리플래닛 매거진 코리아>를 통해 꼭꼭 숨겨두었던 특별한 여행의 추억을 풀어놓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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