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위스 그랜드 투어
GRAND TOUR of Switzerland
병풍처럼 에워싼 산자락, 너른 초원, 반짝이는 호수, 넘실대는 포도밭 … 차창 밖 풍경이 수시로 바뀌는 동안 스위스라는 거대한 캔버스가 채워진다. 길 위를 달리는 것. 그 자체가 이 자동차 여행의 목적이다.
카스텔로 디 메소코(Castello di Mesocco)에서 내려다본 풍경.
슈플뤼겐에서 벨린초나(Bellinzona)로 향하는 길은 알프스 계곡을 가로지른다.
“이 차는 완전 새 거예요. 최신형인 데다 25킬로미터밖에 안 달렸거든요.” 취리히공항 내에 있는 유럽카(Europcar) 직원이 자동차 키를 넘겨주며 의기양양하게 말한다. 그 말을 듣는 내 심정은 그와 정반대다. 평소 자가운전자도 아니고, 해외 운전은 처음이며, 만약을 대비한 사고 대비 보증금을 신용카드로 막 결제하고 나온 참이니 당연하지 않은가. 공항을 빠져나온 지 얼마 되지 않아 먹구름이 빗방울을 뿌려대기 시작한다. 도착 직전까지 확인하고 또 확인한 일기예보 그대로지만, 그랜드 투어의 시작으로는 분명 예상을 빗겨간 그림이다.
2달여 전, ‘스위스 그랜드 투어’를 처음 접하고 무릎을 쳤다. 관광 인프라가 얼마나 풍부하면 기차 강국이 하루아침에 자동차 여행을 내세울 수 있는 걸까 싶어서. 대중교통으로 갈 수 없는 스위스의 속살까지 둘러볼 수 있다는 그 루트가 꽤나 매력적이어서. 18세기 유럽에서 엘리트 교육의 일환으로 유행한 여행과 이름이 같은 이 거창한 투어로 말할 것 같으면, 하루에 평균 5시간씩 운전하면 8일 안에 스위스를 1바퀴 완주할 수 있다. 고속도로보다는 국도와 작은 도로를 이용하고, 알프스의 고갯길도 지난다. 아말피 해안도로나 프로방스를 누비는 상상에 스위스를 추가해도 좋겠다고 생각한 게 불과 얼마 전인데, 나는 영화 속 주인공 월터 미티처럼 어느새 운전대 앞이다. 취리히에서 출발해 스위스 영토를 크게 돌아 다시 취리히로 돌아오는 일정. 원래 루트를 따른다면 1,600여 킬로미터를 달려야 하겠지만, 이번에는 그중 로잔에서 바젤까지 이어지는 스위스 서부는 제외한다.
우렁찬 환영 인사
취리히를 벗어나 북쪽으로 달린 지 40분 남짓. 낯선 자동차와 내비게이션, 스위스식 도로 표지판에 적응하기에는 너무 짧은 시간이다. 잔뜩 긴장한 몸을 한 번쯤 풀어주기엔 적절한 타이밍인지라, 첫 목적지인 라인 폭포(Rhienfall)가 유독 반갑다. 취리히 주와 샤프하우젠(Schaffhausen) 주의 경계에 위치한 이곳은 ‘유럽 최대’라는 수식어를 달고 있는 명소다. 높이가 23미터에 불과해 웅장한 느낌은 덜하지만, 너비가 150미터에 이르고 1초당 60만 리터의 유수량을 자랑한다. 폭포 측면에 위치한 전망대 위에 서면 어마어마한 물살에 자욱한 물보라까지 더해져 눈앞은 온통 하얗고, 귓가엔 거센 마찰음만 들릴 뿐이다. 바꿔 말하면, 아찔한 절벽을 타고 우아하게 흘러내리는 폭포는 아니라는 뜻. 그게 바로 라인 폭포의 매력이다. 지칠 줄 모르고 쏟아지는 물줄기를 바라보고 있는 동안 마치 그 안으로 빨려 들어갈 것만 같은 무지막지한 힘이 느껴진다. 거대한 빙하 지대가 일순간 녹기 시작하면 이런 모습일까?
“라인 폭포를 여러 번 봤지만 매번 달라요. 햇빛에 따라 물의 빛깔이 늘 바뀌니까요. 여름철에는 초록빛을 띠기도 합니다.” 샤프하우젠 출신인 가이드 세이프(Seif)의 말은 사실일 것이다. 한 순간 폭포 위의 하늘이 개면서 햇살 한 자락이 비춘 순간을 목격하기도 했다. 라인 폭포를 가장 적극적으로 즐기는 방법은 유람선을 타고 폭포 한가운데에 솟아 있는 바위에서 내려 그 꼭대기에 오르는 것. 경치를 따진다면 강가에 자리한 슐뢰슬리 뵈르트(Schl?ssli W?rth)로 가는 방법도 괜찮다. 14세기 요새이던 이곳에선 폭포는 물론, 건너편 절벽 위에 자리한 고성 슐로스 라우펜(Schloss Laufen)까지 한눈에 담을 수 있다. 라인 강을 사이에 두고 슐뢰슬리 뵈르트가 샤프하우젠 주, 슐로스 라우펜은 취리히 주에 속한다.
여기서 약 5킬로미터 떨어진 샤프하우젠은 폭포 덕을 톡톡히 누린 소도시다. 라인 폭포가 라인 강을 따라 발달한 물길을 가로막고 선 까닭에 무역로가 우회하면서 자연히 이곳에서 무역업이 번성한 것. 도심의 보르더가세(Vordergasse)를 따라 늘어선 건물은 화려한 옛 시절의 흔적이다. 노른자위를 차지한 이들은 오직 옆집보다 더 멋진 퇴창, 더 화려한 벽화를 위해 존재하는 듯하다.
옆 도시 장크트갈렌(St. Gallen)의 구시가도 이와 별반 다르지 않다. 보행자 전용 거리인 물터가세(Multergasse)를 걷다 보면 대담한 조각과 그림으로 장식한 아르누보 양식의 건물이 경쟁하듯 이어진다. 20세기 직물 산업으로 전성기를 맞은 장크트갈렌에는 파리를 오가는 직행열차가 있었다. 그러니 당시 지역 거상들이 건물에 한껏 멋을 부린 것쯤은 약과다. 바로크 양식의 전형인 대성당(St. Gallen Cathedral)과 17만 권의 고서를 소장한 수도원 도서관(Abbey Library)에 비하면 스케일도 소박한 수준이고.
책과 섬유, 바로크에서 공공 미술까지. 장크트갈렌이 시대를 불문하고 끊임없이 동시대 미와 예술을 좇은 도시라면, 아펜첼은 그와 대척점에 있는 도시다. 7대째 아펜첼 전통 공예를 이어가고 있는 가죽 공방, 지드부어스트(Sidevurst, 아펜첼 수제 소시지)를 만드는 비법이 할아버지에게서 손자로 전해진 정육점, 톱밥 더미 속에서 치즈 보드를 조각하는 목수의 작업실 등이 모퉁이를 돌 때마다 하나씩 튀어나온다. 1991년 스위스에서 가장 마지막으로 여성의 선거권을 인정했고, 매년 마을 광장에 모든 주민이 모여 거수로 주요 안건을 결정하는 곳. 아펜첼은 시대의 흐름 따위는 안중에도 없는 꼬장꼬장한 보수주의자다. 자고로 그 지역의 역사와 전통을 아는 것이 여행의 첫 순서라고 한다면, 이번 그랜드 투어의 시작은 합격점을 받을 수 있을 듯하다.
어마어마한 유수량으로 보는 이를 압도하는 라인 폭포.
장크트갈렌 대성당의 내부.
에메랄드색과 금박이 어우러진 스투코(stucco) 장식, 어두운 천장화가 인상적이다.
APPENZELL - MAIENFELD
설산을 지나 하이디 마을로
지금은 비가 내리지만, 어제는 눈이 내렸단다. 스위스 알프스 전지대(Swiss Prealps)의 5월 날씨는 완만한 구릉을 따라 초록빛 목초지가 펼쳐진 풍경만큼 평화롭지 않은 것 같다. 그 때문에 잔뜩 기대한 에벤알프(Ebenalp, 아펜첼 알프스의 산봉우리 중 하나) 하이킹과 절벽 위 산장 베르가스트하우스 에셔에서의 점심 식사가 물 건너 갔다. 그리고 슈바그알프스트라세(Schwagalpstrasse)까지 그 여파가 이어지고 있다. 아펜첼을 출발해 마이엔펠트로 가는 도중에 센티스(S?ntis) 산을 바라보며 달릴 수 있는데, 그 고갯길이 바로 슈바그알프스트라세다. 멋진 도로를 운전하는 것이야말로 자동차 여행의 묘미. 그러니까 이 길은 이번 여정의 첫 번째 하이라이트다. 고도가 높아지면서 야생화 덮인 들판은 눈 쌓인 산등성이로 바뀌고, 마치 만년설을 뒤집어 쓴 것 같은 산봉우리가 가까워진다. 시계는 흐릿하고, 설산 주위로 안개까지 더해져 겨울 분위기가 제대로 난다. 스위스 동북부 알프슈타인(Alpstein)의 산자락 중 가장 높은 산을 정면에 마주한 채 계절을 거슬러 오르는 이 기묘한 드라이빙을 어떻게 표현해야 할지. 확실한 것은 어쨌거나 ‘그 길을 거쳐왔다’는 점에선 운이 좋았다는 사실이다. 물론, 마이엔펠트에 도착할 때만 해도 그것을 알 리 없었다. 라인 계곡에 자리 잡은 이 조용한 동네도 1880년 이전에는 ‘하이디 마을(Heidiland)’로 불리게 될 줄 꿈에도 몰랐으리라.
요하나 슈피리(Johanna Spyri)가 창조한 하이디 이야기는 소설로 먼저 성공을 거뒀다. 하지만 소설 속 배경을 관광 명소로 만든 것은 일본 애니메이션의 공이 크다. 프린세스 에드워드 섬이 <빨강머리 앤>(1979)으로 유명해지기 전에 마이엔펠트의 <알프스의 소녀 하이디>(1974)가 있던 셈이다. 하이디 호텔에 짐을 풀고, 하이디 트레일을 지나 하이디 박물관과 하이디 집을 둘러본 뒤 하이디 레스토랑에서 저녁 식사를 한다. 개인적으로 소설 속 가상 세계를 재현해놓은 것을 썩 좋아하는 편은 아닌데, 하이디로 점철된 이 동화 속 마을이 크게 불편하지 않은 것은 전적으로 자연 때문이다. 산자락 사이에 폭 안긴 듯한 아늑한 지형, 염소와 젖소가 한가로이 어우러진 푸른 언덕, 관광지답지 않은 차분한 분위기. 머릿속으로 그리던 알프스 소녀의 고향과 크게 다르지 않다. 설사 레스토랑 통유리창 너머, 하늘이 잿빛일지라도. 작년 7월호 스위스 파노라마 기사에서 소개했듯 ‘날씨마저 화창한 여름날에는 눈이 부실 만큼 깨끗한 풍경’을 선보일 것이다, 분명.
화려한 천장화 아래 장엄한 기운을 뿜어내는 수도원 도서관.
아펜첼러(Appenzeller) 치즈를 보여주는 치즈 전문점 주인.
장크트갈렌 섬유산업의 역사를 엿볼 수 있는 섬유 박물관(Textilemuseum).
마이엔펠트에 있는 하이디의 집.
마이엔펠트를 벗어나 티치노 주를 향해 달리다 보면 슈플뤼겐처럼 아담한 산골마을을 여럿 지난다.
티치노의 라 돌체 비타
마음에 드는 풍경이 있으면 멈추고, 떠나고 싶을 때 다시 길을 나서는 것. 직접 차를 운전해서 이동한다는 것은 여행이 더 자유롭다는 의미다. 스위스에서 운전대를 잡은지 3일째. 비로소 자동차 여행의 즐거움을 맛볼 여유가 생긴다. 주요 일정은 점심 전에 벨린초나에 도착하는 것이 전부. 어느 길을 달리며 무엇을 하든, 일단 가기만 하면 된다. 갑자기 콧노래라도 흥얼거리고 싶은 기분이다. 날씨쯤이야 아무렴 어떻고, 도로 위에서 좀 헤매면 또 어떠랴. 길은 끝없이 이어질 테고, 차가 멈추지 않는 한 결국은 목적지에 닿겠지. 그렇게 한껏 흥에 취해 엑셀을 밟으니 우연이 주는 즐거움까지 저절로 따라온다. 언덕 위 오래된 교회에 반해 들어갔더니 유명 하이킹 코스의 시작점이자 겨울철 스키 타운으로 변신하는 슈플뤼겐이었고, 절벽 끝자락에 위태롭게 서 있는 고성에 올랐다가 가슴이 탁 트이는 경치를 선물 받았다. 12세기 귀족 가문이 거주하던 카스텔로 디 메소코에선 오늘 밤 하드코어 록 페스티벌이 열린다는데, 고급 정보를 혼자만 아는 양 신이 나는 건 어쩔 수 없다. 누구에게든 자랑하고 싶어 근질근질한 입은 30킬로미터를 더 달려 아나 베촐라(Anna Bezzola)를 만난 뒤에 푸는 수밖에.
“티치노(Ticino)의 느긋하면서도 친밀한 분위기가 마음에 들어요. 이곳에선 삶이 단순하죠. 그중에서도 벨린초나가 제일 좋아요.” 밀라노 출신으로, 이탈리아보다 벨린초나에서 더 긴 세월을 보낸 베촐라는 티치노 예찬론자다. 14세기까지 이탈리아의 영향력 아래 있던 이 지역은 언어부터 음식, 기후, 주민 성향과 정서까지 국경을 맞댄 남쪽 나라를 빼다 박았다. 카스텔그란데(Castelgrande)를 포함해 벨린초나를 상징하는 3개의 고성 역시 이탈리아 통치 당시의 유적. 어디서나 쉽게 이탈리아 음식을 맛볼 수 있고, 호텔 프런트에서 듣는 영어에는 이탈리아 억양이 짙게 묻어 있다. 이곳 사람 대부분이 베촐라와 다르지 않다. 스위스 안의 작은 이탈리아가 견고하게 유지될 수 있는 것은 지역 고유의 색채를 지키고자 하는 공동의 목표가 있기 때문이다.
몬테 타마로(Monte Tamaro) 정상에 올라 마리오 보타(Mario Botta, 티치노 출신의 건축가)가 지은 산타마리아 델리 안젤리 교회(Chiesa Santa Maria degli Angeli) 지붕에 서면 벨린초나의 가치를 쉽게 알 수 있다. 알프스 산자락 사이의 평지를 꿰차고 밀라노로 이어지는 길목을 지키고 섰으니, 일종의 톨게이트 역할을 한 것이다. 과거 통행세로 어마어마한 부를 쌓은 벨린초나의 경제적 가치는 예전만 못하지만, 티치노의 아름다운 자연과 온화한 품성은 여전하다.
고국 독일에서 집필 금지를 당한 헤르만 헤세가 몬타뇰라(Montagnola)에서 안식을 찾은 것도 당연해 보인다. 벨린초나에서 차로 1시간 정도 떨어진 몬타뇰라에서 헤세는 43년을 살았다. 그가 살던 공간을 개조한 자그마한 박물관과 그가 자주 거닐던 산책로가 이곳에 있는데, 사실 지극히 간소하고 소박한 헤세의 삶을 들여다보는 일은 마을 공동묘지 한 구석에 놓인 그의 묘비 하나로도 충분하다. 원래 모양을 살린 듯한 비스듬한 사각의 돌에 이름과 날짜가 전부. 누군가 그 위에 올려둔 하얀 조약돌과 곁에 핀 복숭아빛 장미가 유일한 장식이다. 따지고 보면, 이 땅에 한 인간의 흔적을 남기는 데 이보다 더 화려할 필요가 있을까 싶다.
제대로 된 이탈리아식 정찬을 맛보기 위해 모르코테(Morcote)로 간다. 루가노(Lugano) 호숫가의 마을 중 하나로, 산비탈에 옹기종기 모여 있는 벽돌색 지붕과 호수가 어우러져 그림 같은 풍광을 선사하는 곳이다. 호수 너머로는 이탈리아 땅이 보인다. 좁고 가파른 골목을 올라 전망 포인트에 서니 조지 클루니가 부럽지 않다. 그의 별장이 있다는 인근의 코모 호수(Lake Como)보다 이곳이 못한 게 뭔가! 두툼한 파르메산 치즈를 얹은 리소토와 입안에서 사르르 녹는 도미 요리, 끝내주는 티라미수까지 있는데. 코모 호수에 머무는 것보다 예산도 훨씬 덜 들 테고 말이다.
카스텔그란데에서 내려다본 벨린초나.
몬테 타마로에 위치한 산타마리아 델리 안젤리 교회 꼭대기에 서면 티치노의 지형이 한눈에 담긴다.
몬타뇰라에 있는 헤르만 헤세 박물관.
발아래 빙하, 눈앞에 마터호른
“오후 1시까지만 해도 빙하 위로 햇살이 말이죠!” 알레치관광청에서 나온 사이먼 바일러(Simon Weiler)는 이 얘기만 벌째 몇 번째다. 살짝 약이 오르지만, 미안한 표정을 한 번 더 지어 보이는 것 말고는 별 도리가 없다. 약속 시간을 훌쩍 넘긴 오후 3시에 도착한 건 내 쪽이니까. 원래 계획은 고타르 패스(Gotthard Pass)를 이용해 티치노에서 빠져 나오는 것이었다. 알프스를 통과하는 이 구간은 자동차 경주 트랙을 연상시키는 고난도 커브 길이 구불구불 이어지는데, 운전하기엔 까다롭지만 드라이빙의 재미를 찾는다면 결코 그냥 지나칠 수 없는 길이다. 이번 여행의 두 번째 하이라이트. 다만, 2,000미터 고도를 지나는 도로라 5월에도 눈이 내리면 진입을 통제해야 하고, 하필 오늘 아침이 그런 날 중 하나였을 뿐이다. 그래서 이탈리아 국경을 살짝 넘는 코스를 택했다. 지도상에선 벨린초나에서 뫼렐(M?rel)까지 직선 코스처럼 보였다. 실제로는 고타르 패스를 왕복하고도 남을 시간이 걸렸지만.
알레치 빙하(Aletsch Glacier)는 알프스 최대 규모를 자랑하는 빙하 지형이다. 만약 이 얼음이 전부 녹으면, 그 물은 전 세계 인구가 1리터씩 4년 6개월 동안 마실 수 있는 양이란다. 뫼렐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리더알프(Riederalp)에 내리면 발밑으로 산봉우리 사이에 형성 된 웅장하고도 우아한 얼음밭이 펼쳐진다. 바일러는 이곳 바위 사이를 날다람쥐처럼 뛰어다닌다. 일대의 산골 마을 중 하나인 베트머알프(Bettmeralp)에 사는 그에게 알레치 빙하는 일터이자 놀이터다. 운동선수 못지않은 탄탄한 허벅지도 수시로 즐긴다는 산악자전거 덕분일 것이다. 빙하 트레킹, 알파인 숲 하이킹, 스키, 골프 등등. 그가 늘어놓는 각종 액티비티보다 알레치 빙하의 매력을 설명한 그의 단 두 마디가 더 마음을 움직인다. “고요하고 마음이 편안해지는 곳”.
해발 3,089미터에 위치한 고르너그라트(Gornergart)에서 마터호른을 마주한 순간, 딱 떠오르는 것도 바로 그 정적이다. 체어마트에서 일본인 단체 관광객과 같은 기차를 타는 바람에 기념사진도 같이 찍어야 할 듯한 분위기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위풍당당한 알프스 준봉의 자태는 감동적이다. 파란색 도화지 같은 하늘을 배경으로 뾰족하게 솟은 봉우리가 이보다 더 선명할 수 있을까, 싶을 정도로 도드라진다. 북적거리는 전망대 앞에서 잠시 비죽 나왔던 입이 어느새 넋을 잃고 헤벌쭉 벌어진다. “구름 한 점 없이 깨끗한 마터호른을 보면 행운이 따른다고 해요.” 체어마트관광청에서 일하는 도미니크 모델리(Dominique Mauderli)의 말에 하마터면 박수까지 칠 뻔한다. 마터호른이 아니어도 체어마트는 매력적인 여행지다. 거주 인구가 6,000명이 채 되지 않는 작은 마을이지만, 다양한 하이킹 코스와 슬로프가 있고, 스키 여행자를 위한 맞춤형 숙소부터 레스토랑과 바 등의 부대시설까지 완벽하게 갖췄다. 특히 올해는 방문 적기다. 영국인 에드워드 윔퍼(Edward Whymper)의 등반대가 최초로 마터호른에 오른 지 150주년. 1년 내내 다양한 이벤트가 열릴 예정이라, 마터호른이고 뭐고 마을 밖을 벗어나기 싫을지도 모른다.
알프스 최대 규모인 알레치 빙하는 길이 약 23km, 총 면적 120km2에 이른다.
3100 쿨름호텔 고르너그라트(3100 Kulmhotel Gornergrat)의 유리창에 비친 마터호른.
ZERMATT -LAVAUX
포도나무 사이로
멀리 보이는 시옹성이 프랑스어권에 속한 스위스 서부 레만 호수 지역에 들어섰음을 알린다. 12세기 이래 호수 동쪽 끄트머리를 지켜온 이 요새는 영국 낭만파 시인 바이런이 성의 역사를 소재로 쓴 시 덕분에 널리 알려지기 시작했다. 이후 본격적으로 복원 작업을 진행하면서 연간 방문객이 35만 명에 이르는 스위스의 대표 명소가 됐다. 감옥과 납골당, 연회장 등 미로처럼 이루어진 내부도 흥미롭지만, 성 바로 옆 호숫가의 아담한 모래밭에서 바라본 외관은 입장료 없이도 누릴 수 있는 최고의 사치다.
여기서부터 몽트뢰(Montreux)와 브베(Vevey)가 차례로 이어진다. 몽트뢰는 매년 여름 재즈 페스티벌이 열리는 세계적인 음악 도시고, 찰리 채플린이 사랑한 브베는 아기자기하면서도 세련된 분위기를 간직한 휴양지다. 드문드문 눈에 띄던 포도밭은 라보에 이르러 모든 풍경을 장악한다. 브베에서 로잔 사이, 30킬로미터에 이르는 호숫가 경사면을 따라 총면적 800만 제곱미터에 이르는 계단식 포도밭이 빼곡히 들어서 있다. 1,000년이 넘는 세월 동안 맨몸으로 걸어 오르기도 쉽지 않은 비탈에서 땅을 갈고 돌을 쌓은 수고는 2007년 유네스코도 인정했다.
본래 이 일대는 포도나무 사이를 누비는 하이킹으로 유명하다. 고도가 높아질수록 차도는 좁아지고 험해진다. 그래도 이 지역 전문가가 포도밭을 한눈에 내려다볼 수 있는 드라이빙 코스로 추천했다기에, 아무런 의심 없이 내비게이션에 입력한다. 루트 드 라 세르뇰(Route de la Cergniaule)과 루트 드 플랑 드 샤텔. 몽트뢰 위쪽의 작은 마을을 오가는 구간인데, 돌아보면 그 길이 스위스 자동차 여행 최대의 고비였다. 끝없이 이어지는 오르막길은 어찌나 좁고 커브가 심한지. 아찔한 경사면 아래를 내려다보지 않으려고 목에 한껏 힘을 주었고, 맞은편 차량이 나타날 때마다 자리를 비키느라 식은땀 좀 흘렸다. 어쩌면 그래서 에페스(Epesse)에서 마신 와인이 더 달콤했는지도 모르겠다. 채플린이 좋아한 와이너리 파트리크 퐁잘라(Patrick Fonjallaz)가 있는 마을. 레스토랑의 야외 테라스에 앉으니 포도밭과 호수가 어우러진 라보의 풍경이 비로소 평화롭게 느껴진다. 붉은빛이 돌기 시작한 하늘은 몇 시간째 어두워질 줄을 모른다. 하늘과 호수 그리고 낮 동안 태양열을 흡수한 돌계단까지, 라보를 3개의 태양이 있는 포도밭이라 부르는 까닭을 이해할 수 있을 것 같다.
발레(Valais) 주 잘게슈(Salgesch)의 와인밭을 가로지르는 도로.
체어마트를 벗어나 레만 호수 방면으로 가는 길에 만날 수 있다.
레만 호숫가에 자리한 사랑스러운 휴양지 브베.
샤슬라(Chasselas) 품종으로 만드는 라보의 화이트 와인.
자전거를 타고 비에 젖은 구시가의 돌길을 달리는 버니스(Bernese, 베른 사람).
붉은 지붕이 늘어선 베른의 구시가를 감싸 흐르는 아레 강.
LAVAUX - STOOS
스위스의 중심
아레(Aare) 강, 사암 건물, 분수, 천문 시계, 연방의사당. 베른(Bern)을 설명할 수 있는 키워드는 여럿이지만, 그중에서 가장 기이한 것은 곰이다. 더 정확히 말하면 구시가로 들어서는 길목에 자리한 곰 공원. 베른은 자신의 상징인 동물을 위해 기꺼이 도시 공간의 일부를 공유하고 있다. 동물원 우리 같은 개념이 아니라, 수영장까지 갖춘 오직 곰을 위한 터전이다. 과연 당사자는 강변 저택에 만족해하는지 몹시 궁금한데, 아쉽게도 현재 곰 가족은 공사를 피해 쥐라(Jura) 지역에서 휴가 중이다. 현대적인 곰 공원에서 니데크교를 건너면 우리가 익히 알고 있는 예스러운 베른이 나온다. 중세 시대 베른을 포함한 스위스의 도시 대부분이 큰 화재를 겪었다. 잘 만든 모형처럼 통일감을 지닌 구시가는 1400년대 도시 전체가 타버린 뒤 같은 건축자재를 사용해 재건한 결과다. 가지런히 열을 이뤄 길게 늘어선 사암 건물이 보기에만 좋은 것은 아니다. 1층이 아케이드 구조로 되어 있어 우산 없이도 시티 투어가 가능하고, 과거 마차 높이에 맞춰 만든 지하 창고는 오늘날 소규모 바나 극장으로 사용하기에 제격이다. 베른은 여러모로 한 나라를 대표하기에 적합한 품위를 갖춘 도시 같다. 고딕 양식의 베른 대성당이나 시계탑 치트글로게(Zytglogge), 스위스 건축자재로만 지었다는 연방의사당처럼 서로 다른 시기에 지은 건축물이 전혀 어색하지 않게 공존할 수 있는 건 보통 세련된 솜씨가 아니다. 한마디로 고도(古道)의 품격이랄까?
베른엔 미안하지만, 스위스의 관광 수도를 뽑는다면 아마도 그 왕관은 루체른(Luzern)에 넘겨줘야 할 가능성이 크다. 심지어 고르너그라트를 함께 오른 모델리도 가장 좋아하는 도시로 체어마트가 아니라 루체른을 꼽았더랬다. 그의 의견에 딱히 반박하고 싶은 마음은 없다. 단, 그 이유로 카펠교나 빈사의 사자상 대신 루체른 주변에 있는 보석 같은 여행지를 든다는 조건으로 말이다. 먼저 베른에서 루체른으로 가는 길에 들른 엔틀레부흐(Entlebuch)부터 시작하자. 이곳은 유네스코 생물 보존 지역으로, 스위스 최대의 습지다. 겉보기엔 숲과 계곡, 들판이 어우러진 평범한 전원 같지만, 그 안에 발을 내딛는 순간 차이점을 발견할 수 있다. 물을 머금은 대지는 우레탄을 깐 것처럼 폭신폭신하고, 수분을 가득 머금은 공기는 싱그럽기 그지없다. 스위스에 습지가 있다는 사실은 상상도 못했기에 더더욱 놀랍다.
진짜 숨은 보석은 슈토스다. 루체른에서 차로 약 40분 떨어진 산골 마을. 프론알프스토크(Fron-alpstock) 정상에 오르려면 이곳에서 산악 열차와 곤돌라를 갈아타야 한다. 해발 1,922미터인 이 산은 높이만 본다면 4,000미터 고봉이 즐비한 스위스에서 별것 아닌 존재일 수도 있다. 산세도 인근의 필라투스(Pilatus)나 리기(Ligi), 티틀리스(Titlis)에 견줄 정도는 못 된다. 하지만 전망만큼은 그 어디에도 밀리지 않는다. 루체른 호수는 물론, 필라투스, 리기, 티틀리스까지 말 그대로 파노라마다. 청록색 호수와 반도처럼 불쑥 튀어나온 지형의 경계가 하도 또렷해서 가짜처럼 보일 정도다. 정면에는 처음 스위스 연방이 탄생했다는 뤼틀리들판까지 있으니, 이곳이 바로 스위스의 중심이라 해도 되지 않을런지? 고개를 뒤로 돌리면 영화 <사운드 오브 뮤직>의 마지막 장면에 어울릴 법한 완만한 구릉지대가 펼쳐진다. 그 너머 수십 개의 작은 봉우리로 연결된 능선은 꼭 한 번 도전해보고 싶은 트레킹 코스다. 이렇게 멋진 곳이 왜 아직까지 알려지지 않은 건지 아쉬워 슈토스관광청에서 나온 이반 슈타이너(Ivan Steiner)에게 묻는다. “슈토스에는 기차역이 없어요. 루체른에서 기차를 타고 슈비츠(Schwyz)까지 온 뒤 버스로 갈아타야 하죠. 아마도 교통편 때문에 그런 게 아닐까요?” 그의 말을 들으니 역시 자동차가 해답이겠다.
스투스에서 케이블카를 타고 정상에 오르면 루체른 호수 일대의 파노라마 전망과 꽃이 만발한 벌판이 펼쳐진다.
시작과 끝
다시 취리히로 돌아오기까지 꼬박 일주일을 길 위에서 보냈다. 첫날 문턱조차 넘지 않고 스쳐간 이 도시는 그동안 스위스에서 만난 그 어떤 곳보다 더 (현대적 의미의) 도시답다. 길가의 양 떼에게 말을 걸고, 농가의 지붕 모양이 지역마다 어떻게 다른지를 논하며 다녔더니, 취리히 웨스트에선 갓 상경한 시골 쥐가 된 기분이다. 버려진 공장 지대에서 도시 재생 프로젝트의 대표적인 성공 사례가 된 이 동네는 취리히의 변화를 상징하는 곳이다. 사람들이 숍과 노천 바가 어우러진 프라우 제롤드 카르텐(Frau Gerolds Garten)에서 자유로운 분위기를 만끽하는 동안에도 한쪽에선 끊임없이 새로운 것이 생겨나고 있다.
“이 안에서 무슨 일이 벌어지고 있는지 아무도 잘 몰라요. 계속 공사 중이다가 어느 날 갑자기 ‘짠’ 하고 문을 열죠. 취리히의 취미 활동이랄까요?” 취리히 토박이인 카사노바 우르술라(Casanova Ursula)가 덩치 큰 벽돌 건물을 가리키며 웃는다. 팝업 스토어에서 나이트클럽 그리고 다시 전시관으로. 이곳에선 온갖 실험이 가능하다. 한때 조선소이던 시프바우(Schiffbau)는 취리히의 유서 깊은 극장 샤우스피엘하우스(Schauspielhaus)의 별관이 됐다. 공장의 골조를 그대로 활용한 천장, 선박 장식, 한쪽 벽을 차지한 시크한 바까지 마치 영화 세트장 같다. 탁 트인 로비는 아직 한산하지만, 몇 시간 뒤면 전혀 다른 모습일 것이다. 취리히 웨스트의 절정을 즐기려면 저녁 식사 후에 찾는 것이 현명하다. 이곳은 취리히 나이트라이프의 중심지기도 하니까. 물론, 나에겐 늦은 밤 다시 이곳을 찾을 여력이 없다. 쉼 없이 달린 이번 여행의 결정적 단점이라면 바로 이런 것일 테다. 컨테이너를 쌓아 올린 프라이탁(Freitag) 본사에서 가방을 구경하고, 1898년 문을 연, 세계에서 가장 오래된 채식 전문 레스토랑 힐트(Hilt)에서 마지막 식사를 하는 정도가 나에겐 딱 적당한 마무리 같다. 차를 반납하기 직전 계기판에 찍힌 총주행거리는 1,340킬로미터. 처음 자동차를 넘겨 받으면서 들었던 말을 감안하면, 대략 1,300킬로미터를 달렸다. 남한 영토의 반도 채 되지 않는 작은 나라에서 참으로 대장정이었다.
취리히 웨스트의 컨테이너 건물 옥상에 마련된 바에서 햇살을 즐기는 이들.
표영소는 <론리플래닛 매거진 코리아>의 에디터다. 신규철은 여러 매체와 광고에서 활약하고 있는 사진가로, 아이슬란드 여행에 대한 열망을 알레치 빙하에서 달랬다.
취재 협조 스위스관광청(MySwitzerland.com)
론리플래닛 매거진 코리아 lonely planet (월간) : 7월 [2015]안그라픽스 편집부 | 안그라픽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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