장항선의 끝자락 여행 장항,군산,익산
<At the End of Western Railroad> 장항선의 끝자락
장항, 군산, 익산에서는 벽지를 뜯어내듯 눈에 보이는 풍경의 껍질을 한 겹 벗겨내고 그 내부에 응축된 시간의 지층을 함께 보아야 한다. 그래야 짧은 여행에, 길고도 먼 깊이가 생긴다.
군산과 장항 인근 바다에서 조업 중인 실뱀장어잡이 배. 이곳에서 어획된 실뱀장어는 대부분 양식장으로 팔려간다.
한반도 발치에서부터 꽃이 차례로 북진을 하면,
사람들의 마음은 내남없이 남쪽으로 향한다.
남쪽 땅에 핀 매화와 산수유, 벚꽃 등속이 내보이는 빛깔과 향기가
온 나라 전체에 아지랑이 같은 자장을 만들기 때문이다.
1922년 천안과 온양온천 간 개통으로 시작한 장항선은
근현대를 지나는 긴 시간 동안
장항의 금강하구까지 남쪽을 향해 내달렸다.
서둘러 꽃을 맞으려는 가슴들이,
그 숱한 열차의 봄 행로에 몸을 실었을 것이다.
장항에서 군산을 바라기하다
장항선을 달리는 열차 중에는 ‘금빛열차’도 있다. 열차를 타고 금강하구에 이르러 강물 위에 반짝이는 윤슬을 보는 순간, 실제로 마음의 명도가 올라간다. 선조들은 저렇게 일순간 빛나고 사라지는 형체에도, 아니 형체가 없는 것에 도 어찌 이름을 줄 생각을 했을까. 강가에 다다르면 이런 한가로운 사유도 끼어든다. ‘스러지다’에서 기인한 듯한 이름의 끝 글자처럼, 윤슬은 수없이 반짝이면서 스러져간다.
장항. 시인 곽재구가 자신의 책 『포구기행』에서 “헤어지기 싫은 연인들의 항구”라고 쓴 포구가 이곳에 있다. 강을 사이에 두고 충청남도 장항과 전라북도 군산 두 도시가 도계를 이루면서 마주 보는 사이를 여객선이 오갔다. 편도 15분의 뱃길. 해서 시인은 “두 도시에 떨어져 사는 연인들이 뱃길을 바래다주며 헤어지기 싫어서 다시 돌아오는 배를 함께 타고, 막상 한쪽의 도착지에 이르면 또다시 헤어지기 싫어 맞은편 항구로 함께 가고???.” 하는 풍경을 상상했다. 하지만 시인이 장항을 다녀간 몇 해 후 군산과 장항 사이에 다리가 놓였다. 다리가 놓이고도 2년여 동안 배 지난 자리 물살의 여운처럼 여객선이 오갔으나, 이제는 다니지 않는다.
그래도 지금 장항포구 경남식당 건물이 바다를 면하고 있는 쪽의 외벽에는 “유람선, 도선 매표소”라는 글자가 뚜렷이 남아 옛 시절을 증명하고 있다. 바다와 그 건너 군산 시가지, 월명공원을 품은 월명산의 구불구불한 능선까지가 창밖으로 한눈에 내다보이는 경남식당 안. 초로의 주인 아주머니 기억 속에서도 옛 장항포구 시절의 모습은 뚜렷하다. “장항은 늘 군산을 바라보며 살았어요. 고등학교와 대학교가 다 군산에 있으니, 좀 사는 집은 모두 자식을 군산으로 학교를 보냈지요. 직장도 군산에 있고, 서울을 가려고 해도 군산으로 나가야 하고???. 그러니 배가 다닐 때는 선착장에 몇백 명이 서서 배를 기다리곤 했어요. 나 어릴 적부터, 아주 오래오래 그랬지.”
누가 그러라고 시킨 것도 아닌데, 기관실을 사이에 두고 오르내리기 편한 배의 선미에는 여학생을 태우고, 남학생은 후미에 타서 늘 배의 앞뒤가 남녀로 나뉘었다는 선한 풍경도 한 자락 들려주었다. 지금 경남식당 안쪽에 불룩 튀어나온 반원형 벽체가 원래는 매표 창구였다는 이야기까지 들으면, 눈앞에 보이는 풍경에 두터운 층이 생긴다. 저 벽체 안 작은 창구를 통해 매표원이 표를 팔 때, 이곳에 얼마나 많은 사람이 벅신거리며 창밖으로 배가 건너오기를 기다리던 것인가. 눈 내리고 비바람 치는 날이면 발 디딜 틈이 없었다는 장항포구 도선 매표소.
2016년에는 경남식당, 그러니까 이 옛 도선 매표소 자리에서 바라보이는 바다 위로 6차선의 너른 군장대교가 완공된다니, 다시 한 번 장항의 풍경은 변화를 맞을 것이다. “군산이 더 크니까, 이름도 군산이 앞에 가서 군장대교요.” 식당 여주인의 말 속에서 오래 군산을 바라기하고 산 장항의 면모가 읽힌다.
생활사적 의미가 아니라도, 장항에서 군산을 바라기하는 일은 일상에서 무시로 벌어진다. 금강하구 둑에 서서 금강이 바다와 만나는 고요하고 장엄한 풍경을 바라보기 위해 봄여름 계절 없이 사람들이 몰리는 것이다. 특히 맑은 날 바다를 뜨겁게 물들이며 지는 서해 일몰은 금빛열차를 타고 내려온 하룻밤의 정주처(定住處)에 붉은 정점을 찍는다.
만개한 벚꽃이 군산 은파호수공원의 도로를 뒤덮는다.
과거의 음영에 빛이 내린 군산
금강 하구언에서 명멸하던 윤슬은 이름 아침 군산 은파호수공원의 수면 위에서 다시 반짝인다. 1980년대 후반, 내가 군산 출신 친구를 따라 스무 살에 처음 왔을 당시에는 ‘은파유원지’라 불렀다. 오래전 기억 속의 은파유원지는 동그랗고 작았는데. 물가를 따라 이렇게 많은 왕벚나무가 늘비했던가. 그맘때는 자연을 알아볼 수 있는 나이가 아니었는지, 알록달록한 파라솔과 파란 수면 위에 떠 있던 흰 오리 배만 선명하게 기억난다. 오리 배에 나란히 앉아 바지런히 페달을 밟으며 친구가 말했다. 군산은 작다고. 아버지가 선생님이어서, 그것도 ‘윤리 선생 딸’이어서, 늘 조심하며 옹그리고 다녔다고. 대학에 진학하면서 서울에 처음 왔는데, 서울이 커서 너무너무 좋았다고. 그제야 학기 초 내내 미니스커트를 입고 성큼성큼 큰 걸음으로 걸어 다니던 이유를 알 것 같았다.
오리 배는 지금도 떠 있다. ‘그날의 오리 배’처럼. 오늘날 호수를 구비 도는 호반 길과 나무 덱 길이 조성되어 세련된 산책로와 휴식처로 변했지만, 군산 시민의 마음속에는 학창 시절 소풍지로, 데이트 장소로, 가족의 나들이 장소로 여전히 유원지라는 옛 시절의 이름 같은 유정함이 자리한다. 은파호수공원은 짧은 일정으로 군산에 든 여행객의 행선지에는 빠져 있게 마련인데, 군산에서 보내는 하루의 시작점으로 퍽 맞춤한 곳이다.
오랫동안 서해 남쪽 끄트머리에 과거의 그림자를 짙게 드리운 채 대도시나 현대사의 번다함에서 외돌아 앉아 있던 작은 도시 군산. 그런 군산에 최근 여행객의 발길이 잦아졌다. 바로 과거의 음영이 ‘근대 문화유산’이라는 새 이름을 얻어 여행자를 매료시키는 것이다.
그런데 보통 군산을 찾는 여행자에게는 도식화된 특정 행로가 있다. 이성당에서 ‘모닝(아침에 먹는 세트 메뉴의 실제 이름이다)’을 먹고, 근대역사박물관으로 이동해 히로쓰 가옥과 군산세관 등 군산의 근대 건축물을 보고, 군산 최초의 중국 음식점이라는 빈해원에 가서 점심을 먹는 것. 그러고는 일본식 사찰인 동국사에 들러 대웅전 앞에서 사진을 찍고 더 이상 열차가 지나지 않는 철도마을의 철로를 따라 걷는 것으로 군산 여행의 마침표를 찍는다. 그사이 영화 촬영지이던 초원사진관이 끼어들기도 한다. 실제로 군산에서 만난 대부분의 젊은 또래 여행자는 인터넷에 번져 있는 이 도식을 충실히 따르는 중이었다.
‘100년 된 빵집’이라는 별칭으로 불리는 이성당은 건물을 굽이돌아서까지 여행객이 줄을 선 모습이 아예 풍경의 일부다. 시간을 맞추지 못하면 단팥빵과 함께 쌍벽을 이루는 야채빵을 맛볼 수 없다. 운 좋게도 내부에 자리를 잡고 앉아 어린 여자아이와 함께 빵을 먹고 있는 노부인은 여행객 차림이 아니었다. “어릴 때 뭔가 잘못을 저질러 아버지가 회초리를 들고 나면, 나중에 꼭 이곳에서 생과자를 사주시곤 했어요. 여고 시절에는 빵과 우유를 가운데 놓고 남학생이랑 만나던 미팅 장소였지요. 이제는 손녀랑 이곳에 옵니다.” 그녀의 말처럼 ‘100년 된 빵집’이란 이런 것이다. 단순히 얇은 빵 껍질 속의 단팥이 100년 동안 변함없는 맛과 두께를 유지해와서만이 아니다. 숱한 사람의 ‘시절’이 함께 새겨진 이성당 시간의 연표가 현재도 지속 중이라는 데 그 가치가 있다.
그런 점에서 빈해원의 60년도 뒤지지 않는다. 군산에서 가장 오래되었다는 중국 음식점이다. 어릴 때 먹던 것과 똑같은 맛의 자장면을 같은 장소에서, 이젠 부모가 되어 어린 자식에게 먹이는 소박한 감동은 이곳에서도 이어진다. 지을 당시 모습 그대로 간유리를 통해 내부가 훤히 들여다보이는 작은 방들이 중앙 홀을 따라 길게 이어지 고, 2층에는 100여 명이 한꺼번에 들어갈 수 있는 큰 방이 손님을 맞는다. 그 규모에서 옛 시절의 영화가 읽힌다. 문을 닫을 뻔한 질곡의 시간도 있었다는데, 현재는 여행복 차림의 손님으로 문전성시를 이룬다. “인근에 있던 시청과 관공서들이 이전하면서 몹시 어려움을 겪던 때도 있었어요. 그때를 못 견디고 문을 닫았으면, 지금 같은 날은 못 만났겠지요.” 전자계산기 대신 윗대부터 사용하던 주판을 물림해 쓰는 노주인장의 말이다.
빈해원의 주판처럼 지금까지도 남아 있는 근대를 군산근대역사박물관에서 다시 만난다. 이곳은 전국 최대의 농민 항쟁이던 옥구농민항쟁 특별 전시관을 비롯해 해양물류역사관, 일제강점기 군산의 역사와 사람의 생활상을 볼 수 있는 근대생활관 등으로 구성되었다. 1930년대 존재하던 건물 11채를 재현해놓은 근대생활관은 관람객이 흥미롭게 오래 머무르는 곳이다. 그 시절 유행가인 ‘오빠는 풍각쟁이’가 흘러 떠다니는 거리에는 직접 타볼 수 있는 인력거가 정차해 있고, 일본인 부호에게 밀려난 빈민이 산등성이에 짓고 살던 움막 형태의 토막집도 있다. “일제 강점기 일본인들이 자신의 탐욕을 채우기 위해 우리 민족의 고혈을 짜내어 이 금고를 채워갔다”라는 설명이 붙은 금고의 손잡이는 지금도 반질하다. 언뜻 보면 다른 지역의 근대생활관과 차이가 없어 보이는 잡화점에조차 옹기들 사이에 기모노 복식의 일본풍 인형이 나란하여, 이곳이 군산이라는 사실을 상기시킨다.
근대생활관을 돌아 나오다 보면 출입구 왼편으로 ‘3층 야외 테라스’라고 쓰인 표식이 있다. 지나치지 말고 올라보자. 실뱀장어잡이 배들이 학익진처럼 양 날개를 펼친 채 떠 있는 군산 바다의 전경을 내려다볼 수 있을 뿐 아니라, 개펄을 휘저으며 먹이를 찾는 혹부리오리를 천리경으로 바로 눈앞인 듯 끌어당겨볼 수도 있다.
‘전국 최대의 근대 문화 도시’가 군산시의 수식어이니, 군산근대역사박물관을 벗어나도 곳곳에 역사는 즐비하다. 1908년에 지은 구 군산세관은 바로 옆 무미한 현대건축 양식의 새 군산세관보다 존재감이 두드러진다. 서울역사, 한국은행 본점 건물과 더불어 국내 현존하는 서양 고전주의 3대 건축물 중 하나로 알려져 있다. 지금은 세관의 역사를 보여주는 전시장으로 쓰이지만, 가운데가 움푹 팬 문지방을 보노라면 ‘문지방이 닳도록’ 극렬했던 수탈의 현장을 실감하게 된다. 지금은 장미갤러리로 탈바꿈한 건물은 1930년대 조선미곡창고주식회사였고, 군산 근대건축관 역시 일제강점기 침탈 자본주의의 상징인 구조선은행 군산지점이었다. 일본식 정원을 포함해 아직까지도 당시의 모습을 간직하고 있는 2층 목조주택 히로쓰 가옥도 일본인 지주의 집이었다. 아름답고 서정적이기조차 한 군산 근대 건축물이 품고 있는 잔인한 역설이다.
군산에서 가장 오래된 중국 음식점 빈해원은 60년 전의 모습 그대로다.
1908년에 지은 옛 군산세관청사. 독일인이 설계하고 벨기에에서 벽돌 자재를 수입했다고 한다.
기차가 오가지 않는 군산 경암동의 철길 마을은 이제 관광객이 찾아오는 명소가 되었다.
군산의 마지막 예기 장금도. 선생의 춤사위는 오래된 봄날의 기억을 풀어놓는다.
월명공원과 마지막 예기 ‘장금도’
은파호수공원처럼 여행자의 흔한 일정표에는 빠져 있지만 군산을 군산이게 하는 장소 하나가 더 있다. 수령이 오래된 벚나무들이 계단식 입구를 에워싸고 있는 월명공원이다. 월명산과 여러 개의 산이 잇대어진 공원으로, 정상에 서면 군산 시가지와 군산항, 바다가 한눈에 내려다보인다. 조성 연대가 1900년대 초. 정주해 사는 이들에게는 삶의 여러 배경지로서 유정한 장소가 아닐 수 없다.
2010년 봄, 민살풀이춤의 명무(名舞)인 장금도 선생을 취재차 만난 곳이 월명공원이었다. 일제강점기에 군산 개복동에서 나서 열두 살 나이에 권번에 들어가 춤을 배운 우리 시대 마지막 예기(藝妓)다. 그에게 월명공원은 ‘벚꽃이 필 때면 파시처럼 들어서는 요릿집으로, 인력거를 타고 넘어가던 꽃길’이었다. 선생을 만나던 때는 마침 공원에 벚꽃이 활짝 핀 때였고, 어룽어룽한 꽃그늘은 팔순을 넘긴 예기가 지나온 세월을 하염없이 풀어내기에 좋은 장소였다. 이 땅의 미곡이 군산항을 통해 일본으로 빠져나가던 무렵, 굶주림 때문에 떠밀리듯 권번(券番)에 들어갔다고 했다.
그래도 타고난 소질이 있어 열여섯 살에 본 시험에서 수석을 하였고, 어느덧 ‘춤 하면 장금도’라 하여 가장 많이 호명되는 예기가 되었다.
벚꽃이 피면 월명공원 저 너머로 꽃다운 예기를 태운 인력거가 오가던 시절의 이야기 속에서 숱한 춤 스승의 이름이 등장했다 사라졌다. 마주 앉은 자리엔 분분히 꽃잎이 내려앉았다. 그사이에, 다시 권번이 사라지고 국악원이 들어섰다. 어느새 미군이 거리를 활보하고, 예기를 찾던 풍류 대신 여급을 찾는 술집이 늘어가면서 ‘장금도의 춤’은 설 자리를 잃게 되었다. 그러고는 예기로 살았던 날들보다 더 오래, 혹여 기생 태가 날까 ‘쓰봉’만 입고 숨어 살던 세월의 이야기가 이어졌다. 장금도라는 한 여인의 인생사 속에서 그렇게 군산의 근현대사가 환영처럼 함께 흘러갔다. 소설 <탁류>의 배경이기에 군산 하면 누구나 채만식의 탁류를 떠올리지만, 공연 기획자 진옥섭이 ‘순간순간 몌별(袂別)을 준비하는 춤’이라 한 장금도 선생의 춤을 한 번이라도 본 사람에게는, 그러니까 나에게 군산은 곧 ‘장금도의 군산’이다.
돌기둥처럼 서서 마주보고 있는 익산 고도리 석조여래입상 중 1기.
한때 우리나라 최대의 사찰이 있던 익산 미륵사지는 이제 고즈넉한 유적지가 되었다.
익산에서 마주친 ‘천 번의 봄’
군산에서 어딘지 애수에 젖은 근대의 시간 사이를 유영했다면, 장항선 철도의 마지막 종착지 익산에서는 더 먼 시간과 조우하게 된다. 지명 뒤에 수식처럼 따라오는 미륵사지석탑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이곳의 시간은, 양감되지 않은 채 돌기둥처럼 선 고도리 석조여래입상의 모양새같이 천년의 시간을 일직선으로 가파르게 오른다. 고려 시대에 제작한 이 석불이 기이하게 마음을 끄는 이유는 그 오랜 제작 연대 때문도, 4미터가 넘는 높이나 미려한 새김 때문도 아니다. 그것은 남녀로 구분되는 두 기의 석불이 200여 미터 간격을 두고 서로 마주 보고 서 있기 때문이다.
암수가 떨어져 있어도 꽃을 피우고 열매를 맺는 은행 나무처럼, 이들은 서로 이어져 있다. 저물 녘 사선으로 비치는 햇살에 음각된 선들이 뚜렷해지면, 여자로 불리는 석불의 입술이 마주 선 석불에 비해 얇은 것을 확인할 수 있다. 남자로 불리는 석불의 망울 없는 눈매는 보다 크고 뚜렷하다. 그 눈으로, 다문 입술로, 눈이 오나 비가 오나 두 손을 모은 채, 천년 세월을 둘은 마주 보고 서 있다.
두 시선 사이에서 작은 냇물이 흐른다. 1년에 한 번 섣달 그믐날에 시냇물이 얼면 만나 서로 부둥켜안았다가 새벽닭이 울면 헤어진다고 하는 전설은 오히려 사람들의 신파다. 세상에는 이렇게 오랜 마주봄도 있다는 것을 두 기의 고도리 석불은 침묵 속에서 말해준다. 석불의 등 뒤로, 천 번째 봄이 왔다. 대숲에 새순이 솟고, 흰 딸기꽃이 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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