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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을 보내는 마지막 입맞춤

Pearl Jam <Last Kis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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점점 쌀쌀해지는 날씨를 봐서라도 이제 맥주님을 보낼 시점이 된 것 같다. 내년 초여름, 뭔가 몸이 덥기 시작할 때 우리 다시 만나는 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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라면 끓여놓고 두 끼 연속 한 젓가락도 못 먹었다. 지독한 감기 때문일지도 모르겠고, 라면 먹으면서 멍청하게도 뉴스를 켰기 때문일지도 모르겠다. 아니면 감기에 그렇게 좋다는 소주를 너무 많이 마셔서일지도.

 

이 감기는 중국 칭다오에서 걸렸다. 대륙의 실수로 품질이 좋았다. 맥주 마시기엔 좀 추운 계절이 도래하고 있는데 나는 그게 너무 아쉬워 칭다오로 날랐다. 그러나 칭다오맥주를 벌컥벌컥 마신 뒤 그만 조심성과 총명함을 잃고, 창을 열어둔 채 잠을 자버린 것이다. 본토 미세먼지를 잔뜩 머금은 차가운 새벽 공기가 내 목과 코에 무슨 짓을 했는지는 모르겠지만 피도 눈물도 없이 나쁜 짓이라는 건 잘 알 수 있었다.

 

 

 

감기 조심하시라는 얘기로 드린 말이다. 그나저나 이 칼럼이 오늘로 서른 개 째다. 그동안 한 번도 못 웃겼으면서 계속 웃기려 했던 걸 드디어 반성한다. 자주 듣는 영어교육 라디오 프로그램이 있는데 진행자 한 분이 ‘아재 개그’만 치면서 너무 안 웃기기에 뭐하는 분이십니까 찾아봤더니 모르겠고 나이가 마흔 다섯이었다. 그 나이엔 웃기기란 십대 여학생이 떡볶이를 싫어할 확률만큼도 안 될 것이다. 안타까웠다. 나도 라면이 지겨워진 걸 보면 덜컥 겁이 난다. 어른이 되어가는지도 모르겠다. 이제 나도 웃기려하지 않아야겠다.

 

그건 그렇고 칭다오는 항공권이 편도 3만원이었다. 공항이용료 어쩌고 보태서 왕복 10만원. 겨우 그 돈으로 사람을 비행기에 태워주다니 세상은 아직 아름다운 곳임을 알 수 있었다. 그러나 중국은 비자가 필요하다는 걸 깜빡하고 있었다. 결국 급행으로 받으니 11만 원이 깨졌다. 세상살이란 역시 만만하지 않음을 알 수 있었다. 덕분에 산동 요리를 마구 섭렵하려 했던 자금이 궁핍하게 되었다. 2인 이상이면 값싼 별지비자를 신청할 수 있던데 늘 혼자라는 게 서럽기 시작하자 안 가고 싶을 만큼 처지기도 했다.

 

외롭고 서러울 땐 음악을 듣는 거라고 배웠다. 국정 교과서엔 그런 진실이 실리지 않겠지만 아무튼 짐을 싸며 음악도 준비했다. 현지에서 마시는 칭다오 맥주에 대한 예찬이 많아 기대가 빵빵했다. 맛있는 맥주 앞에서 잘생긴 남자가 울면 되겠나. 고로 음악을 서럽지 않을 만큼 많이 선곡했다. 맥주거리 술집에 앉아 이어폰을 꽂고 음악을 즐기며, 중국의 작은 유럽이라는 칭다오의 풍경에 시선을 던져놓고 시름을 잊고 싶었다. 그런데 선곡하는 동안 음악을 너무 많이 들어버려 정작 칭다오에서는 모든 곡이 지루하고 식상하게 느껴졌다. 아아 음악이 지루할 리가 없는데 이상했다. 라면이 지겨워진 것과 같은 맥락 일까봐 매우 쫄렸다. 

 

칭다오의 가을은 청명할 때보다 미세먼지로 뿌옇게 덮여 있을 때가 많았다. 사람들은 어딘지 모르게 불편한 표정을 짓고 있었다. 개떡 같은 농담을 듣고 정색할 때의 표정과 비슷했다. 당연히 여유도 없었다. 시내버스 기사가 달리다 말고 화를 내며 차를 세우더니 몽둥이를 들고 운전석에서 뛰어내렸다. 나는 때마침 장에서 오는 좋지 않은 신호를 참으면서 숙소로 돌아가는 길이라 눈물이 났다. 아무데나 내려서 들어간 카페는 화장실을 청소하고 있었다. 청소 동작이 만만디여서 눈물이 계속 났다. 늘 이런 식이야, 라고 생각하지 않으면 ‘늘 이런 식’이 되지 않는 거라고 마인드컨트롤 하려했지만 그것도 지겨웠다. 어휴 하루 이틀이라야지. 음악이든 여행이든 화장실이든 갑자기 다 지겨웠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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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나 운명의 신은 나에게 너무 심했다고 판단했는지 노천에 테이블을 깐 가게를 하나 점지해 주었다. 맥주를 주문해 꿀꺽꿀꺽 삼키자 지겨웠던 게 하나도 안 지겨워졌다. 칭다오 맥주란 그런 영험한 물질이었다. 그런데 갑자기 단속반이 뜨더니 노천에 깔린 테이블을 싹 걷으라고 가게 주인들을 윽박질렀다. (운명의 신 이 새끼가?) 폼 잡고 맥주 좀 즐겨보려 했는데 또 그런 식이라니. 세상살이란 역시 고달픈 것이다.

 

개인적인 생각이지만 어딘가를 유럽 같네 하려면 커다란 성당과 유럽풍 건축양식이 몇 개 있는 게 아니라 낮에 시민들이 노천에서 커피나 맥주를 때리면서 여유 있는 표정을 지을 수 있는 장소가 많은 걸로 가늠하면 좋겠다. 칭다오를 지배했던 독일 놈들이 남겨놓은 유럽식 빨간 지붕들은 나폴리를 이탈리아의 통영이라고 부른다는 말처럼 내겐 무의미하게 느껴졌다.

 

어쨌거나 독일이 맥주 공장을 남긴 점 하나로 퉁 쳤다. 생산한 지 하루도 안 된 칭다오 맥주는 과연 아름다운 맛이었다. 우리나라 편의점에서 파는 칭다오 캔 맥주 보다 20배 쯤 맛있었다. 다만 칭다오 사람들은 맥주를 차갑게 마시는 걸 안 좋아하나 보던데 좀 시원하면 좋겠다고 생각할 틈도 없이 목구멍 안쪽으로 사라졌다. 마치 마법 같았다. 특히 정제되지 않은 칭다오 위엔장(原漿)맥주는 마시는 순간 원초적인 아름다움이 위장 속에서 살아 움직이며 구수하게 보글거렸다. 마성의 보컬이 부르는 컨트리 송 같았다. 그것은 ‘난 왜 이렇게 되는 일이 없지’ 생각하는 못생긴 의식을 부드럽게 어루만져주는 마력이 있었다. 그에 깨달음을 얻고 나는 다시 음악을 귓구멍에 꽂았다. 음악이 지겨워지면 인생이 지겨워지고, 맥주가 지겨워지고, 웃기지도 못하는 아저씨가 되는 것이다. 그렇게 개떡같이 살 수는 없잖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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휴대폰에 나도 모르게 선곡한 음악이 하나 있었는데 그게 오늘의 주제곡 <마지막 입맞춤(Last Kiss)>이었다. 오랜만에 듣는 추억의 음악은 생맥주만큼 깊이 있고 신선했다. 문제는 그 곡을 기점으로 맥주를 과도하게 때린 점이었다. 헤어진 연인들이 떠오르고, 마지막으로 키스한 게 언제였는지 기억나지 않자 결국 쓸쓸해졌기 때문이었다.

 

나는 저녁도 거른 채 침대에 뻗었다. 배고파서 깨보니 새벽이었고 목이 몹시 부어 있었다. 편의점에서 물과 컵라면을 사왔으나 새벽 공기가 냉랭했고, 편의점 알바의 잠 깬 표정은 그보다 더 냉랭했고, 컵라면은 스촨식 넓적면이어서 빨리 익지 않았다. 그 사이에 항마력을 잃은 나는 결국 오지게 감기에 걸려버렸다. 재미없지만 부디 감기 조심하시라고 한 번 더 드린 얘기다.

 

감기 걸려서 좋은 점은 맥주를 전혀 마시고 싶지 않은 점이다. 점점 쌀쌀해지는 날씨를 봐서라도 이제 맥주님을 보낼 시점이 된 것 같다. 내년 초여름, 뭔가 몸이 덥기 시작할 때 우리 다시 만나는 거다. 그러려고 굳이 칭다오까지 가서 작별인사를 한 셈이 되었다. 사람이 헤어질 땐 얼굴 보고 하는 게 참 좋더라. 나는 그렇게 올해의 맥주와 작별 인사를 하고 칭다오에서 돌아왔다. 진짜 가을이 끝난 기분이 되었다. 소주를 따게 되었다. (물론 감기 때문이다)

 

<라스트 키스>는 사고로 연인을 잃은 남자의 가엾은 스토리다. 원곡은 J.Frank Wilson and The Cavaliers 라는 분들이 불렀는데 펄 잼(Pearl Jam)의 에디 베더가 염소같이 부른 커버곡이 더 많이 생각난다. 들으면 슬퍼지지만 가을을 보내는 기분도 다르지 않다.

 

Hold me darling just little while 잠시만 안아줘 자기야

 

그럼 모두 감기 조심하시고 소주 조심하시고 짜이찌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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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박상 (소설가)

소설가. 장편소설 『15번 진짜 안 와』, 『말이 되냐』,『예테보리 쌍쌍바』와 소설집 『이원식 씨의 타격폼』을 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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