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가을 타다 봉변, 마릴린 맨슨 〈Sweet Dreams〉

마릴린 맨슨 〈Sweet Dreams〉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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싸이키델릭 록의 혼란스러운 느낌과, 후렴구에서 내지르는 괴성이 마닐라에서 학대받는 내 심정을 대변해 주는 것 같았다. 달콤한 꿈같은 위안이었다. 음악으로 평정심을 되찾자 오랜만에 학대받는 느낌도 나쁘지 않게 생각되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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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 칼럼 처음 시작할 때 스페인 이비자 섬 얘기를 쓰면서 스케일 있는 배경을 선보였다. 그 후로도 유럽과 아시아를 망라하는 다국적 배경의 칼럼을 이어가다 몇 회 만에 레퍼토리가 똑 떨어지고 말았다. 그 뒤론 방구석 꾸민 얘기나, 재미없는 일상적 감상이나 떠들면서 스케일이 미생물 만해졌다. 심지어 이번 원고는 곰팡이 핀 지하방에서 가을 타는 남자가 빌리 홀리데이를 듣는 얘기로 구상했는데 쓰다 식상해서 원고를 구겨 버렸다. (손맛 때문에 굳이 출력해서 구겼다. 미안하다 나무야.)

 

어쨌든 초심으로 돌아가야 할 때라고 느꼈다. 쓴 놈도 재미없는 글을 누가 읽을 것인가. 단 한 명의 독자라도 학대하면 안 되는 것 아닌가. 해서 이번 원고는 필리핀 마닐라 올 로케이숀으로 쓴다. (뚜둥)

 

여행지로 마닐라를 선망한 적은 없었다. 다만 가을 너무 세게 타다 약 값 나가겠다 싶은 어느 아침, 살기 위해 당장 출발할 수 있는 항공권을 질렀을 뿐이었다. 값도 몹시 쌌다. 그렇지만 하필 마닐라라니, 여긴 선선한 가을이 시작됐는데 굳이 덥고 습한 마닐라라니. 인생에 마누라도 없는데 마닐라라니. 달콤한 바닐라 라떼나 마시고 때우는 게 싸게 치지 않을까? 여행비로 기타나 새로 사는 게 현명한 짓 아닐까? (가엾은 내 싸구려 기타가 가공할 습도 때문에 목이 휘어져버렸다.) 그러나 망설이면 못 떠나니까 이미 카드를 긁은 다음이었다. 환불도 안 됐다. 나는 그날 오후에 마닐라로 출발해버렸다. 

 

당일 날 급조해 온 티가 났는지 마닐라는 비협조적이었다. 공항택시부터 바가지를 옴팡 썼고, 급하게 예약한 호텔은 세금 12%, 봉사료 10%의 추가금을 때렸고, 가격 대비 참담한 수준의 침구 상태를 보였다. 싸게 잠을 때울 만한 게스트하우스도 없었고, 알아보려 해도 데이터 통신, 와이파이가 죽어라 먹통이었다. 인터넷카페가 있어서 들어갔지만 검색어를 입력할 수 없을 정도로 느려서 분통만 터졌다. 

 

맛있는 ‘싼미구엘’ 맥주가 싸다는 것 말고는 모든 게 비합리적으로 느껴졌다. 정신 못 차리고 안에서 줄줄 새던 바가지가, 밖에 나가서 바가지를 쓰는 건 당연한 결과였는지도 모르겠다. 지금 여기서 재미있지 않으면 어디 가서도 재미없다는 걸 또 한 번 깨달았다. 

 

그건 그렇고 마닐라에선 우선 유명한 사자성어들이 떠올랐다. 고온다습, 교통지옥, 개똥치안, 등등이었다. 차타면 막히고 걸으면 무서웠다. 위험에 대한 촉이 좋은 편인데, 이름이 예뻐서 숙소를 잡은 ‘말라떼’에선 하루에도 수십 번씩 경고등이 들어왔다. 거긴 여자 끼고 술 마시는 업소 천지인 퇴폐적 유흥가였던 것이다. 게다가 여행 가서 먹을 걸 안 가리는 관대한 입맛도 소용없었다. 로컬 식당에서 밥 먹고 나면 탄식이 밀려왔다. 

 

"필리핀인데 뭔가 싸지 않다. 짜기만 하다."

 

4박 5일 여행 동안 십만 원으로 버티려고 했는데 좀 깔끔한 데서 먹으면 한 끼에 만 원 이상이 나왔다. 음식의 질도 형편없었고, 딱히 고급 식당이 아닌데도 비쌌다. 태국이나 베트남의 황홀한 음식들이 그리웠다. 그 와중에 비까번쩍한 빌딩 숲인 마닐라의 강남, ‘마카티’의 은행에서 돈 찾아서 나오는데 양 팔을 잡고 돈을 내 놓으라는 십대들을 만났다. 구걸이 아니라 강도에 가까웠다. 백 미터나 안 떨어지길래, 샷건을 들고 있는 은행 시큐리티 가드 쪽으로 뛰어가자 그제야 팔을 놓아주었다. 그 구역을 벗어나기 위해 택시를 잡아타자 또 바가지를 씌웠다. 마닐라 이거 안 되겠네. 한숨이 계속 나왔다. 그래도 포기하지 않고 ‘인트라무로스’ 라는 스페인 식민지 시절의 관광지에 가보았으나 자기들 사는 구역을 현지인들과 구분해 놓은 높고 교만한 담벼락만 보여 흥, 칫, 뿡 하는 소리만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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다음 날 하루종일 땀투성이로 발품을 팔아 게스트하우스를 하나 구했으나 그곳은 슬레이트 지붕이었다. 폭포 같은 스콜이 내리자 난타 공연하는 북 속에 자는 기분이었다. 하늘도 울고 나도 조금 울었다. 정신 사나워 나가서 술 마시려니 길이 침수되어 갇혔고, 그게 끝나자 머플러를 개조한 미친 오토바이가 새벽 내내 붕붕거리고 다녔다. 그 다음은 새벽 네 시였고 닭이 울기 시작했다. 그 닭은 목청이 쇠파이프로 되어있는지 아침 열 시까지 3초 간격의 헤비메탈 샤우팅을 해댔다. 한 잠도 자지 못했다. 

 

남은 일정을 취소해 빨리 돌아오고 싶었으나 뭐 인터넷이 돼야 항공권을 바꾸거나 새로 끊을 텐데 계속 먹통이었다. 스타벅스에 가도 인터넷이 안 됐으니 말 다했지. 현지인들은 다들 스마트폰을 잘 쓰고 있는 것 같아 데이터 유심을 새로 사서 끼워도 되질 않았다. 또 한 번 사자 성어들이 튀어나왔다. 진퇴양난, 사면초가, 어쩌라고, 어떡하나.

 

그렇다고 막 절망하면 쪽팔리니까 그럴 수는 없었다. 남의 나라에서 비합리에 스트레스 받느니 음악으로 출구를 찾는 게 답이었다. 필리핀은 타고난 음악적 감수성이 파퀴아오의 원투 스트레이트 같은 나라 아닌가. 그래서 인천공항에서 비행기를 기다리며 근사한 라이브 클럽들을 구글맵에 저장해 두지 않았겠는가. 하지만 정작 마닐라에선 구글맵이 작동되질 않았다. 택시를 타고 찾아가려 해도 정체와 택시비와 불안감 때문에 관두고 싶었다. 말라떼에 있는 커다란 라이브 클럽엘 갔으나 밴드 공연은 안 하고 부킹에 초점이 맞춰진 느낌이라 실망하고 그냥 나왔다.

 

그렇다면 이어폰으로 음악을 듣는 수밖에 없었다. 나는 마닐라 베이에서 바다 냄새를 맡으며 조용히 싼미구엘과 음악을 즐기기로 했다. 시끄러운 데가 너무 많아 30여분을 고르고 골라 일식 노천 레스토랑에 앉았다. 튀김 하나 시키고 귀에 이어폰을 꽂았는데 잠시 후 광장에서 스피커가 꽝꽝 울렸다. 저렇게 크게 틀어도 안 잡아가나 싶은 볼륨이었다. 그러자 옆 가게에서도 질 수 없다는 듯 옥외 스피커로 음악을 틀어재꼈다. 거기도 딱 나이트클럽 볼륨이었다. 음악 참 좋아하지만 그런 건 귀가 찢어질 것 같은 소음에 불과했다. 고막에 정신병이 생길 것 같았다. 튀김은 거지같은 기름에 튀겨 맛도 없고 두 입 만에 체해버렸다. 만 팔천 원이 나왔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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난감했다. 어디 실내에 들어가면 에어컨이 무식하게 춥고, 나오면 미친 듯이 덥고, 마닐라에 더 있을 수도 없겠고, 당장 돌아갈 수도 없고, 숙소에선 잘 수도 없고, 안 자면 버틸 수가 없고, 돈은 없는데 돈은 많이 나가고, 이 위기를 어떻게 견디고 집에 돌아가나 암담했다. 그래도 역시 내 친구는 음악 밖에 없었다. 숙소의 축축한 침대에서 폰에 저장된 음악을 듣다 마릴린 맨슨의 <Sweet Dreams>이 흐르자 찌릿한 감명에 감전되었다.

 

Travel the world and the seven seas 세상과 칠대양을 여행해봐
Everybody's looking for something. 모두 뭔가를 찾는 중이지
... Some of them want to abuse you. 걔들 중 몇은 널 학대하고 싶어해


바로 요 가사들이 마음에 콕 박히는 것이었다. 싸이키델릭 록의 혼란스러운 느낌과, 후렴구에서 내지르는 괴성이 마닐라에서 학대받는 내 심정을 대변해 주는 것 같았다. 달콤한 꿈같은 위안이었다. 음악으로 평정심을 되찾자 오랜만에 학대받는 느낌도 나쁘지 않게 생각되었다. 너무 편안하게 살아왔다고 반성했다. 세상이 엉망인데 아무 역할도 하지 않고 자신의 안위만 쫓았다는 게 부끄러웠다. 

 

그러고 보니 사실 마닐라는 큰 잘못이 없었다. 내가 바보였다. 잘 준비해서 오면 재미있는 여행지일 지도 모르지만 수십 년간의 부패로 점철된 나라의 수도다. 똥 빠지게 일하는 대다수의 사람과, 콧구멍만 벌렁거려도 막대한 부를 천년만년 거머쥘 개 부자들이 공존하는, 정의와 불의의 긴장이 풀려버린지 오랜 도시인 것이다. 이대로라면 우리나라도 곧 그렇게 될까봐 두려워하면서 엉망으로 살아왔다는 게 겸연쩍었다.

 

아무튼 외모부터 무지 섹시한 마릴린 맨슨 아저씨의 목소리에 위안을 얻고 하루하루 견뎌내자 한국에 돌아갈 날이 되었다. 공항 가면서도 극심한 정체에 시달려 똥줄이 탔고, 택시비 바가지를 썼고, 공항 안에서도 화장실과 흡연실, 에어컨 문제 등등 비합리의 연속이었지만 한국에 돌아간다는 게 겁나 기뻤다. 

 

아니 젠장 여행이란 ‘뭐니 뭐니 해도 우리나라가(집이) 제일 괜찮아.’ 따위를 확인하는 과정이 아니어야 했는데, 새롭고 까다롭고 거지같고 아름답고 신비로운 걸, 신나고 발랄하고 용기 있게 탐험하는 과정이면 좋았는데, 이번엔 어쩔 수 없었다. 한국에 돌아가는 보딩패스를 받는 순간 기쁨이 활짝 펼쳐지며 인상이 밝아지고 피부가 좋아졌다. 생애 처음으로, 여행지에서 돌아가는 게 즐거웠고, 들떴고, 없던 에너지가 꽉꽉 충만해졌고, 맛난 쫄면처럼 쫄깃해졌다. 그것은 마치 어딘가 여행을 가려고 항공기에 탔을 때 상기된 궁둥이의 상태와 너무도 흡사한 게 아닌가.

 

그러므로 마닐라에서 날린 돈이 아깝지 않았다. 망한 여행이더라도 여행에서 쓴 돈은 손해 본 게 아니라는 걸 확인했다. 가을 타던 것도 필리핀의 택시 차창에 매달려 구걸하는 소녀의 맨발에 비하면 사치 같아 집어치웠고, 잊고 있던 마릴린 맨슨의 명곡도 재발견했으니 된 거다. 아아 이제 열심히 살 테다. 다시 가을 안 타게 선 블록도 꼼꼼히 바를 테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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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박상 (소설가)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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