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극 <겨울 선인장> 당신은 어떤 그림자를 따라가고 있나요?
연극 <겨울 선인장>
스스로의 그림자로부터 자유롭지 못한 당신, 어른이 되지 못해 어른인 척 살아가는 당신의 삶을 <겨울 선인장>이 들춰 보인다.
모두가 스스로의 그림자를 따라 걷는다
연극 <겨울 선인장>에는 닮음과 다름이 묘하게 공존한다. 동성애자인 네 명의 주인공이 겪는 사랑의 상처, 자존감과 정체성에 대한 고민은 이성애자들에게는 낯선 이야기다. 그러나 자신을 멋대로 재단하려는 세상 속에서 온전한 나로 살기위해 고군분투하는 그들의 모습은 공감을 자아낸다. 희망에 기대어 오늘을 살아내는 현실까지도. “성소수자에 대한 이야기가 아닌 사람 이야기를 하고 싶었다”는 김지원 연출가의 말에 고개를 끄덕일 수밖에 없는 이유다.
<겨울 선인장>은 재일교포 극작가이자 연출가인 정의신의 작품으로, 고교 야구부에서 인연을 맺은 네 명의 게이들이 ‘어른이 되지 못한 채 어른으로 살아가는’ 시간들을 조명한다. 10년 전, 그들은 류지의 역전 만루 홈런으로 고교 야구 결승전에 진출했다. 그러나 류지가 갑작스러운 사고로 세상을 떠나면서 승리는 영광이 아닌 상처의 기억으로 남았다. 가즈야, 후지오, 하나짱, 베양은 아직 류지를 떠나보내지 못했다. 그들은 류지를 추모하기 위해 매년 야구부 모임을 갖는다. 빛이 바랬을지언정 결코 사라지지 않는 류지의 그림자가 인물들의 현재에도 드리워져 있는 것이다.
그들이 떨쳐버리지 못하는 것은 과거의 기억만이 아니다. 연애 5년차에 접어든 가즈야와 후지오의 관계는 늘 제자리걸음을 하고 있다. 장남으로서 부모님의 기대를 저버릴 수 없는 가즈야는 후지오에게 미래를 약속해 주지 못한다. 시간이 갈수록 후지오가 지쳐가고 있다는 걸 알지만, 게이들의 연애에서는 어쩔 수 없는 일이라고 스스로를 합리화한다. 동성애자들의 거리인 2번가에서 여장을 하고 술집에서 일하는 하나짱도, 대인공포증과 콤플렉스로 관계 맺기에 어려움을 겪는 숫총각 베양도, 항상 같은 자리를 맴도는 것 같은 일상을 살아간다.
지난날의 상처로부터 그리고 지난날의 나로부터 벗어나려 하지만 마음처럼 쉽지 않은 것이 그들뿐일까. <겨울 선인장>은 흘러간 시간에 발목 잡힌 채 지금을 살아가는 ‘지극히 평범한’ 삶을 돌아보게 한다. ‘지난 10여 년 동안 죽은 친구의 그림자를 따라다녔다고 생각했는데 생각해보니 내 그림자를 따라다니고 있었다’는 하나짱의 고백처럼, 우리는 모두 스스로의 그림자에 이끌린 듯 살아가고 있다.
조금은 다른 듯, 조금도 다르지 않은 이야기
가족들에게조차 동성연애자임을 감추어야 하고, 결혼을 하고 아이를 낳아야 어른이 된다는 세상의 기준에 부합하려는 가즈야의 이야기도 특별한 것이 아니다. 타인이 기대하는 모습에 맞춰 나를 깎고 잘라내면서, 그렇게 “어른이 되어야 하는데 그러지 못하니까 자꾸 어른인 척 하고” 살아가는 순간은 누구나 겪어내는 것이기 때문이다.
후지오 역시 예외가 아니다. 그는 가즈야와의 관계 안에서 끊임없이 상처받는 인물이다. 가즈야가 원할 때 자신을 찾아오는 것도, 원하는 바를 이룬 후에 자신을 떠나가는 것도, 자연스러운 일처럼 받아들여야 한다. 기다림은 언제나 후지오의 몫이다. 그러나 그는 가즈야를 떠나갈 수 없다. 사랑하기 때문에 상처받고, 사랑하기 때문에 슬픔 속에 자신을 버려두는 것이다. 결국 후지오에게 남은 선택은 하나뿐이다. 덜 기대하고 덜 상처받는 일. 그건 기울어진 관계에서 어김없이 만나게 되는 선택지다. 가즈야와 후지오가 게이이기 때문에 마주한 현실은 아닌 것이다.
<겨울 선인장>은 가벼운 농담과 무거운 토로 사이를 오가며 이야기를 이끌어 간다. 덕분에 관객은 지나치게 무거운 분위기 속에 버려지지 않는다. 하지만 중간 중간 일깨워주는 현실의 무게와 삶의 고단함은 강렬한 질문을 남긴다. 그렇다면 우리는 무엇에 기대어 살아가야 할까. 만약 그것이 희망이라면 어디에서 희망을 발견할 수 있을 것인가.
“용기와 희망과 얼마 안 되는 돈만 있으면 살아갈 수 있다” 후지오는 영화 <라임라이트>의 대사를 되새기며 사랑을 말한다. 용기와 희망과 얼마 안 되는 돈과 사랑. 그것이 후지오로 하여금 생을 지속하게 만드는 힘인 것이다. 그의 말에 응답하듯 하나짱은 “약간의 섹스도 포함시켜줘”라고 새침하게 덧붙인다. 후지오의 사랑처럼, 하나짱의 섹스처럼, 당신으로 하여금 세상을 살아내도록 하는 것은 무엇인가. <겨울 선인장>은 관객을 향해 묻는다.
류지가 떠난 후 10년, 네 명의 친구들은 여전히 지나간 시간과 자아로부터 자유롭지 못했다. 그러나 시간이 흐를수록 “우리 이제 그만 잊어버려도 되겠지”라고 읊조리기 시작한다. 그림자로부터 벗어나려는 몸짓을 시작한 것이다. 조금은 다른 듯 보이지만 사실은 조금도 다르지 않은 그들의 이야기를 지켜보며 베양의 말을 떠올린다. “이 사람들을 계속 지켜보고 싶어. 한 구석에서, 그냥 멀리서라도 좋으니까”
[추천 기사]
- 뮤지컬 <드림걸즈> 눈부시게 빛나는 그녀들
- 뮤지컬 <그남자 그여자>, 서로 다른 언어로 사랑을 말하다
- 진짜 나를 찾아가는 여정, 힐링뮤지컬 <바보 빅터>
- 뮤지컬 <사의 찬미>, 윤심덕의 죽음을 노래하다
- 뮤지컬 <빈센트 반 고흐> 평범한 인간 고흐의 속마음을 말하다
그저 우리 사는 이야기면 족합니다.
<감독: 찰리 채플린> <배우: 찰리 채플린. 클레어 블룸>2,900원(0% + 1%)