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윤하정의 공연 세상
평일 낮 시간, 광화문의 한 카페에서 그녀를 만났습니다. 가녀린 몸에 단정하게 빗어 넘긴 머리카락, 단아한 손짓으로 차와 비스킷을 먹는 모습은 70대라는 그녀의 나이를 무색케 합니다. 과연 그녀가 어머니, 그러니까 전쟁과 가난으로 얼룩졌고 그만큼 억척스럽게 살아남아야 했던 한국 근현대사의 어머니를 잘 담아낼 수 있을까 의구심이 드는데요. 하긴, 이런 걱정이 부질없는 이유는 그녀는 지난 1999년부터 그 어머니를 연기해왔고, 때마다 뜨거운 박수갈채를 받았습니다. 그냥 보면 쪽 찐 머리의 시골 어머니보다는 세려된 도시 어머니가 훨씬 어울릴 것 같은 그녀, 손숙 씨가 오늘의 주인공입니다.
“나한테 쪽 찐 머리가 안 어울려요? 이 역할이 내 이미지와 다르다고 하는데, 어떻게 다른지 그게 궁금해요(웃음). 그런데 우리나라 어머니들의 쪽 찐 머리가 얼마나 예쁜데요. 어머니도 여러 가지 스타일이 있는데, 어머니 하면 왠지 후덕할 것 같은 그런 고정관념이 있는 것 같아요. 사실 여자는 나이 들면 다 어머니가 되고 할머니가 되는 거잖아요.”
이윤택 연출의 연극 <어머니>가 1월 31일부터 2월 16일까지 명동예술극장에서 15주년 기념공연을 펼칠 예정입니다. 초연 당시 손숙 씨가 앞으로 20년간 이 작품에 참여하겠다고 밝혀 화제가 됐고, 2000년 러시아 초청공연 때도 호평을 받았는데요. 손숙 씨 입장에서는 해마다 하고 있는 작품이니 따로 큰 연습이 필요 없을 것 같습니다(웃음).
“연습해야죠. 할 때마다 새로운 작품인걸요. 그리고 우리 이윤택 선생이 그냥 내버려 두나. 세트도 다시 만들고, 배우도 다 바꿔놔서 또 연습해야 해요.”
초연 때와는 사회 분위기도 많이 다르고, 요즘 관객들에게 이런 정서가 잘 받아들여질까 싶기도 합니다. 올해 <어머니>에서 가장 기대할 수 있는 모습은 어떤 걸까요?
“오히려 더 잘 받아들여지지 않을까요? 요즘 너무 어렵잖아요. 요새 영화 <국제시장>이 인기죠. <국제시장>이 아버지에 대한 얘기라면 이 작품은 그 전 시대를 살아온 어머니의 얘기예요. 우리나라가 이만큼 살게 된 건 어머니 덕분이라고 생각해요. 전쟁 중에도 가정을 지키고, 엄청난 교육열로 자식들을 키워온. ‘엄마가 어떻게 너희들을 키웠니? 봐라, 이렇게 힘들었어도 살아왔는데 왜 이걸 못 견디느냐!’ 이렇게 말할 수 있을 것 같아요.”
사실 어머니 역할도 다양한 작품에서 하셨는데, 이 작품은 유독 20년은 하겠다고 밝히셨어요. 특별한 이유가 있나요?
“다른 작품보다 편해요. 다른 작품은 캐릭터를 만들어야 하는데, 이 작품은 그냥 나와요. 내가 시골에서 살았고, 롤 모델은 이윤택 선생의 어머니지만, 내가 어릴 때 봐왔던 우리 어머니, 하나 더 올라가면 우리 할머니 인생과 너무 닮아있거든요. 그래서 이 분장을 하고 있으면 굉장히 편해요.”
자녀들에게도 작품에 나오는 어머니 같았나요?
“아니지, 전혀 아니죠(웃음). 엄마 같지 않은 엄마, 일하는 엄마. 우리 애들은 저희들끼리 자랐지 내가 키웠다고 할 수는 없어요. 그런데 교육이라는 게 꼭 엄마가 밥해주고 옷 갈아입혀서 학교 보내는 것만은 아니라고 생각해요. 어떤 정신을 심어 주는 것? 그런 차원에서 우리 아이들은 잘 큰 것 같아요. 우리 아이들도 이 작품을 몇 번 봤는데, 볼 때마다 울어요. 어머니의 역할, 자식이 엄마를 바라보는 건 다 비슷한 것 같아요. 신기한 게 러시아에서 공연했을 때도 모든 관객이 울었어요. 완벽하게 이해할 수도 없었을 텐데 왜 우느냐고 물어봤더니 똑같다는 거예요, 엄마라는 건. 자기네도 전쟁을 겪었고, 그 와중에 자기를 지켜주고 키워준 건 엄마였다는 거죠.”
러시아 얘기가 나와서 말인데, 당시 환경부 장관에 임명됐다 취임 전에 약속된 러시아 공연에 출연하면서 기업 격려금과 관련해 다시 배우로 돌아오게 됐잖아요. 어떻게 보면 사연이 많은 작품인데요.
“사연이 많죠. 전혀 후회하지는 않아요. 내 인생에서 잊을 수 없는 작품이고, 그래서 더 애착이 가죠. 이윤택 선생한테도 이 작품은 당신 어머니와 우리 어머니가 도와주는 것 같다고 말했어요. 15년을 하면서 관객 걱정을 해본 적이 없어요. 늘 정말 많이 와주셨고, 좋은 반응을 주셨거든요.”
그러고 보면 배우 활동 외에 환경운동연합이나 아름다운 가게, 각종 영화제와 문화재단 등에서 활동을 많이 하시는 것 같아요.
“모두 인연 때문인데, 인연을 소중하게 생각하고, 내가 할 수 있는 일은 하는 게 맞다고 생각해요. 배우로서 이미지를 깎아먹지 않는 한, 연극배우도 사회에 대한 책임이 있거든요. 방법이야 여러 가지가 있겠지만, 배우 역시 온실 속의 꽃이 아니니까 치열하게 부딪힐 필요가 있어요. 연극배우라는 자각 하에 움직이는 거니까. 그런데 지금은 나이 들고 힘들어서 모두 내려놓으려고 해요(웃음).”
매일 오전 라디오 프로그램 진행에, 연극, 지방 공연, 종종 티비나 영화도 하시잖아요. 어디에서 그런 열정이 나올까요?
“내가 좋아하는 일이라 여기까지 왔겠죠. 오래 전에 명동에서 어린이 옷가게를 한 적이 있어요, 먹고 살려고. 그런데 손님이 오면 반가워야 하는데, 가슴이 철렁 내려앉는 거예요. 아무리 돈을 많이 벌어도 적성에 안 맞는 거죠. 하지만 연극은 출연료를 많이 못 받아도 연습실에 가면 즐겁고, 만들어가는 재미가 있고, 무대에 서는 것도 행복해요. 내가 늘 얘기해요. 엄마가 시켜서 한 일이었으면 가출했을 거라고(웃음).”
올해 공연 스케줄은 대략 잡히셨죠?
“<어머니> 끝나고 3월에는 국립극장에서 <3월의 눈>이 잡혀 있고, <어머니> 지방 공연도 있어요. 작년에도 10여 곳 돌았거든요. 그리고 7월에는 ‘밀양연극제’도 있고, 10월 초에는 국립극단의 <키 큰 세 여자>도 하고. 그리고 지금 TV 드라마를 하나 하고 있어요. 2월부터 방영되는 <블러드>에서는 수녀 역을 맡았어요. 영화도 하나 해야 하고, 결정된 것만 이 정도예요.”
체력 관리는 어떻게 하세요?
“따로 안 해요. 사실 연극은 육체적인 작업이잖아요. 이게 건강비결인 것 같아요. 연습 때도 그렇고, 무대에서도 그렇고 계속 몇 시간씩 움직이잖아요. 그래서 버티는 것 같아요.”
여전히 왕성하게 활동하고 계신데, 배우로서 바람이나 배역에 대한 욕심 같은 거 있으세요?
“없어요. 배역에 대한 욕심도 옛날 같지 않고. 이제는 나이 들었기 때문에 버릴 건 버리고 비울 건 비워야죠. 후배들과 함께 작업하면서 무대에 서는 것 자체가 행복하고 즐거워요. 10년 전까지만 해도 언제 은퇴하겠다, 연극 안 하겠다는 소리를 잘 했는데, 이제 그런 말은 절대 안 해요(웃음). 지금은 단역이라도, 대사 한 마디 없어도 무대 위에 서 있으라면 서 있을 거예요. 행복하고 재밌으니까. 물론 더 나이가 들어서 대사를 못 외우거나 후배들에게 방해가 된다면 그만둬야죠. 이건 혼자 하는 일이 아니니까요. 그러기 전에는 후배들이 같이 하자고 하면 할 거예요. 나 좀 끼어줘(웃음).”
10년쯤 전일까? 문득 연극 <신의 아그네스>에 나란히 출연한 박정자, 손숙 씨를 인터뷰하기 위해 정동극장 분장실에 갔던 기억이 났습니다. 그 뒤로도 두 배우는 화제의 연극에 잇따라 참여했고, 그때마다 인터뷰를 위해 이 극장, 저 극장을 찾아다녔는데, 당시 60대던 두 분이 어느덧 70대가 됐네요. 그리고 배우 생활 50년을 넘겼지만 오래 전에 약속했던 것들, 그러니까 박정자 씨는 <19 그리고 80(현재 <해롤드 앤 모드>로 공연>을 여든까지 할 거라는, 손숙 씨는 <어머니>에 20년간 참여하겠다는 약속을 묵묵히 지키며 각각 그 무대에 서고 있고요. 참 대단하다는 생각이 듭니다. 손숙 씨에게 <어머니>는 15년째 하고 있는 작품이니 주머니에서 푹푹 꺼내 쓰면 되지 않느냐고 우스갯소리를 해봤습니다. 그런 작품은 하나도 없다며 손사래를 치시네요. 분명히 처음 만나는 작품보다야 수월하겠죠. 하지만 새로운 무대, 새로운 배우들, 그리고 새로운 시대와 경험, 관객들이 만나는 만큼 익숙한 공연도 매번 새롭게 태어나는 것이겠죠. 그것이 연극의 재미기도 하고요. 2015년 손숙 씨가 그려내는 ‘어머니’는 어떤 모습일까요? 함께 확인해 보시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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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공연 보느라 영화 볼 시간이 없다.."는 공연 칼럼니스트, 문화전문기자. 저서로는 <지금 당신의 무대는 어디입니까?>,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공연을 보러 떠나는 유럽> ,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축제를 즐기러 떠나는 유럽>, 공연 소개하는 여자 윤하정의 <예술이 좋아 떠나는 유럽> 이 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