건축과 도시 이야기를 빙자한 신변잡기 에세이
『서울 건축 만담』 차현호, 최준석
프롤로그까지 다 썼으니 이제 차형이랑 치맥이나 한판 해야겠다. 그는 또 닭만 열심히 뜯으며 맥주는 목이나 축이는 용도로 마시겠지만.
차형과 내가 지금껏 마신 치킨과 맥주(이하 ‘치맥’ )의 양은 얼마나 될까. 치맥이라면 보통 치킨을 안주 삼아 맥주를 즐기는 술자리를 의미하겠지만 흔치 않아도 간혹 치킨을 즐기며 맥주를 목이나 축이는 안주로 삼는 이들도 있다. 차형은 그런 사람이다. IMF 여파로 취직하기가 하늘의 별 따기였던 시절, 아니 면접 자리 구하기도 별 따기만큼 어려웠던 그 시절, 포트폴리오를 들고 찾아갔던 모 설계사무소의 지하실에서 우리는 처음 만났다. 그리고 곧 그 사무소를 같이 다니게 되었다.
순박함과 어벙함의 경계를 보여주는 그의 얼굴은 다소 경직되어 있었으나 일단 사람은 좋아보였다. 어릴 때부터 왠지 그런 인상을 좋아한 나는 그에게 “맥주나 합시다” 하고 말을 걸었고 그는 “치킨이랑 먹읍시다”라고 응수했다. 아마 1999년 1월쯤?
책을 좋아한다는 공통점은 있지만 건축적으로는 취향이 별로 맞지 않아, 어차피 만나면 건축 얘기는 뒷전이고 시시껄렁한 농담이나 주고받으며(해도 그만 안 해도 그만인 별 재미있지도 않은 얘기를 뭐하러 하는지) 치맥을 함께한 지 어느덧 15년이 넘었다. 이제는 그의 얼굴이 잘생긴 닭처럼 보이기 시작했을 정도다(그도 내가 잘 빠진 맥주로 보일지는 모르겠지만).
2010년 내가 먼저 첫 책을 내고 이듬해인가 차형도 책을 냈다. 사실 그의 책은 나의 회유와 설득에 의한 것(물론 그는 인정하지 않겠지만)이었는데 평소 희한한 책을 즐겨 읽는 그의 적성을 어떻게든 살려주고 싶은 나의 순수한 노력의 결과였다. 자전거 하나로 일본을 관통한 그에게 손수 아사히 생맥주를 권하며 글 쓰기를 강변하던 내 모습이 아직도 생생하다. 차형은 “응” 하고 모르겠다는 표정을 지을지도 모르지만.
그렇게 우리는 둘 다 ‘저자’가 되었다. 하지만 다른 훌륭한 건축가들처럼 여기저기서 프로젝트가 밀려들어오거나(당신이 제 집을 설계해주셨으면 합니다만……) 원고 청탁(선생님의 글을 좀……)과 강연 요청(한 말씀 들려주시……)이 쇄도하는 일은 일어나지 않았다. 일말의 기대조차 안 했다면 거짓말이지만 없으면 없는 대로 심심하게 하루하루를 보내던 어느 날, 모 기업에서 격주로 발간하는 사보에 우리의 원고를 싣고 싶다는 제의가 들어왔다. 차형은 평소 그답지 않게 뛸 듯이 기뻐하며 흥분을 감추지 못했고 오랫동안 해보고 싶었다며 기획 하나를 내 앞에 수줍게 내놓았다. 일명 ‘주거니 받거니 릴레이 칼럼’이라나?
별 재주가 없으니 건축설계 일을 계속해왔고 그러다 보니 한 사람은 작은 설계 사무실을 운영하는 아저씨가, 또 한 사람은 큰 사무실을 얌전히 다니는 아저씨가 되었다. 이 두 아저씨의 이야기가 무슨 재미가 있을까 의문이 들었지만, 차형은 영화 주간지 『씨네21』에 서 꽤 인기를 끌었던 소설가 김연수와 김중혁의 릴레이 칼럼을 들먹이며(죄송합니다, 김연수?김중혁 작가님) 우리도 그렇게 쓸 수 있다고 결의에 찬 주장을 펼치며 치킨을 뜯었다. 그리고 나는 그의 옆에서 묵묵히 맥주만 마셨다.
그렇게 얼떨결에 사보 릴레이 칼럼을 시작했다. 하지만 몇 달 동안 저렴한 콩트 같은 멘트로 지면을 채우는 우리들의 글 때문에 기업의 위신과 체면에 심각한 위협을 느낀 건지, 담당 편집자는 우리와 일방적으로 연락을 끊고 잠수를 타버리기에 이르렀다. ‘그러게 내가 뭐랬어, 안 먹힌다니까.’ 하지만 한편으론 그렇다고 뭐 잠수까지 타나 싶어 살짝 기분이 나빠진 것도 사실인지라 우리는 일단 잘린 이유라도 들어야겠다는 생각에 백방으로 편집자를 수소문했다. 하지만 결국 코빼기도 볼 수 없었다. 이미 맘이 상할 대로 상한 우리는 평소처럼 치킨과 맥주를 마시며 화를 달랬다. 그러다 문득 요상한 결심을 하기에 이른다. 그까짓 연재 안 시켜주면 어때, 우리끼리 하지 뭐!
그렇게 마음대로 써온 몇 편의 릴레이 칼럼이 보기 드물게 마음 넓고 사람 좋은 아트북스 편집장을 만났다. 그런 대인을 못 만났다면 지금 이 글을 과연 쓸 수 있었을까. 역시 인연을 잘 만나야 책도 쓰고 사람 구실도 할 수 있음을 느낀다. 치맥으로 시작한 두 남자의 인연이 한 사람은 치킨을 뜯고 한 사람은 맥주를 마시면서 심심하지만 나름 쫄깃하고 시원하게 십 수 년을 이어왔듯 이 책에 풀어놓은 난장 같은 글들이 부디 읽는 독자들에게 진심을 전달할 수 있기를 바란다. 따지고 보면 인생은 참 살만한 것이다. 시시한 농담이나 나누던 아저씨 둘이 책의 공동 저자가 되다니, 누구 말처럼 인생은 무조건 오래 살고 볼 일이다.
쓰고 나서 주변의 독서광들에게 원고를 미리 읽혀 보니 이 책의 정체성이 뭐냐는 공통된 질문이 날아들었다. 차형에게도 물어보니 역시 잘 모르겠다는 얼굴로 “건축과 도시 이야기를 빙자한 신변잡기 에세이……쯤”이라고 한다. 내가 보기엔 신변잡기 에세이를 빙자한 건축과 도시 이야기가 아닌가 싶지만. 결국 그게 그건가 ‘우리의 도시와 건축, 공간 그리고 여러 장소들이 평범한 익명의 일상들과 끊임없이 관계를 맺으며 시간을 축적하고 있다는 진실 하나.’ 책의 주제가 뭐냐고 유력지의 기자가 진지하게 물어본다면, 아마 이렇게 대답하지 않을까. “그런 진실들이 소박한 일상의 이야기로 들릴 때 우리의 도시와 건축은 비로소 삶의 일부가 되겠지요”라는 그럴듯한 첨언과 함께.
생업으로 건축설계 일을 하며 틈틈이 책을 쓰는 게 힘에 부치지 않는 건 아니었지만 일에 매몰되어 그동안 잊고 있던 일상의 미덕들을 다시금 발견할 수 있었던 점은 무척 고마운 일이다. 차형도 그런 일상의 미덕들이 매번 일을 힘차게 해나갈 힘이 되어주었음을 잘 알고 있을 것이다. 그와 내가 일주일에 한 번, 바쁠 땐 한 달에 한 번 정도 나누었던 대화 속에 그 힘이 남아 있기를.
프롤로그까지 다 썼으니 이제 차형이랑 치맥이나 한판 해야겠다. 그는 또 닭만 열심히 뜯으며 맥주는 목이나 축이는 용도로 마시겠지만.
서울 건축 만담차현호,최준석 공저 | 아트북스
『서울 건축 만담』은 쫄깃하고 시원한 치맥처럼 십 수 년의 인연을 이어온 두 건축가가 퇴근 후 사람 사는 냄새가 눅진하게 배인 치킨 집에서 맥주 한잔에 그날 걷고 보고 재구성한 서울의 일상을 풀어놓은 건축 에세이다. 그들의 표현을 빌리자면 ‘신변잡기 에세이를 빙자한 건축과 도시 이야기’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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