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김소연의 내향적 삶을 옹호함
서울의 이국적 가치
『사미르, 낯선 서울을 그리다』
낯선 곳에 가서야 나는 내가 무엇에 대해 익숙해져 있는 사람인지를 알 수 있었다. 어떤 창문에, 어떤 베개에, 어떤 변기와 어떤 세면대에 익숙한지에서부터 시작해서 어떤 음식에, 어떤 냄새에, 어떤 풍경과 어떤 표정에 익숙한지 하나하나 깨닫게 된다.
맨 처음 유럽의 도시들을 향해 여행을 떠날 때 나는 런던과 에든버러를 선택했다. 여행 계획을 세우며, 그곳의 날씨와 물가와 숙소와 식당 같은 것들에 대해 치밀할 정도로 사전조사를 해두었다. 런던에서 어떤 시간을 보낼지 촘촘하게 일정을 짜두며 설렘을 키워갔다. 런던에 도착한 나에게 가장 큰 고충은 높은 물가도 아니었고 의사소통도 아니었고 음울하고 으슬으슬한 날씨도 아니었다. 거리의 상점들이 너무도 일찍 문을 닫아버린다는 사실이었다. 오전, 오후, 밤을 굳이 구별하여 나는 일정을 짰고, 하루종일 알차게 시간을 보내리라 계획했고, 저녁시간부터는 거리의 상점들을 구경하며 쇼핑도 하고 커피도 마시며 거리의 네온사인을 음미할 생각이었다. 서울에서라면 명절날에나 그런 풍경이었을 것이다. 도심의 쇼핑가도 거의 불을 끈 채로 적막했다. 옷깃을 여미며 빠른 걸음으로 집으로 들어가는 사람들이 드문드문 보일 뿐이었다. “이 사람들은 돈 벌 생각이 이리도 없는 거야?”라며 투덜거리며 펍에 가서 생맥주 한 잔과 감자튀김을 눈앞에 두고 앉아 난감해했다.
낯선 곳에 가서야 나는 내가 무엇에 대해 익숙해져 있는 사람인지를 알 수 있었다. 어떤 창문에, 어떤 베개에, 어떤 변기와 어떤 세면대에 익숙한지에서부터 시작해서 어떤 음식에, 어떤 냄새에, 어떤 풍경과 어떤 표정에 익숙한지 하나하나 깨닫게 된다.
사미르는 프랑스의 만화가이고, 서울을 그려서 이 책을 만들었다. 프랑스 사람 사미르는 내가 런던에서 그랬던 것처럼 저녁 여섯 시의 서울을 주목한다. 자신에게 익숙한 프랑스의 어떤 도시에서와 서울의 저녁 여섯 시는 사뭇 다른 것이다. 서울 사람에 대해서도 “한 줌의 태양 광선도, 한 방울의 빗방울도 맞지 않으려 애쓴다”고 사미르는 표현한다.
여행지에서, 한국 여행자를 쉽게 식별할 수 있었던 게 떠올랐다. 강렬한 햇볕 때문에 거의 모든 이들이 썬글래스를 쓰지만, 유독 한국 여행자들은 썬글래스에만 만족하지 않았다. 두껍게 화장을 한 젊은 여자애들은 십중팔구 한국사람이었다. 반팔옷에 팔토시를 차거나 정수리 부분이 뚫린 챙모자를 쓰거나 양산을 챙겨 썼다 하면 모두다 한국사람이었다. 태국 같은 나라에서는 한낮에 쏟아지는 스콜 아래에서 우산을 펼쳐들고 계속 걸어가는 사람들이 거의 한국 여행자들이었다. 대부분의 사람들은 그 비가 조만간 그칠 것을 알아 처마 밑에 옹기종기 모여 잠시 비를 피해 서 있었다. 사미르는 비오는 날에 알록달록한 우산들을 펼쳐든 서울의 풍경이 유독 이국적인 풍경으로 묘사돼 있다. 떡볶이의 맵고도 달콤한 향기로 서울의 향기를 요약하여 말하고, 무뚝뚝하고 차가운 사람들의 표정 속에 짐작보다 더 끈끈한 온정이 담겨져 있다는 것으로 서울의 사람들을 요약하여 말한다. 거리에 대해서라면 글자들로 뒤덮힌 있는 간판들과 간판들에 뒤덮힌 건문들이 곧 서울인 셈이다. 낯선 날씨에 대해서는, 장마철의 습도에 에어컨이 가동되는 장소를 찾아 한숨을 돌렸던 일을 우선으로 꼽는다.
일상은 주변 사람들을
다시 생각하게 만들기도 할 것이다.
다른 눈을 가진 사람들에게는 풍요로움과 새로움,
이국적인 가치가 가득하리라.
익숙함을 이유로 본인은
가치를 쉽게 발견하지 못한다.
우리의 눈은 너무나 빨리 환경에 적응하고,
여느 평범함으로 가치를 깊게 덮어 버린다.
매혹적이었던 환경은 아주 쉽게 일상적인 관습의 배경이 된다.
우리는 모든 보물을 잊고 지내는 것에 반해
여행자와 망명자는 ‘일상이라는
껍데기 속에 감춰져 있는 것’의
아름다움과 가치를 일깨워 준다.
그렇게 서울은 이방인에게 영혼을 가진 도시가 된다.
서울은 살아 있고, 자신을 표현하며,
일상의 삶 위에 녹아 있다.
프랑스 사람 사미르가 서울을 구석구석 돌아다니며 사람들을 인터뷰하고 그려서 이 책을 만드는 것은, 이방인의 눈에 서울은 그만큼 낯설었고 그만큼 흥미로워서였겠지만 그게 다는 아니었다. 사미르는 서울에 사는 사람들과 서울의 무표정한 일상에 한 권의 선물을 건네고 있는 것이다. 일상성이 가치있는 것으로 다시 일깨워지는 선물이자, 아름다움과 가치를 먼 데에서만 찾으려는 우리들 삶에 대한 선물이기도 하다. 사미르가 “난생 처음 접하는 ‘장마’라고 하는 괴물 같은 존재”를 서울에서 겪으며 이런 문장을 적었다. 비록 괴물 같은 날씨였지만, 그림을 그리는 사미르에게는 그 괴물스러움도 하나의 선물이 되어 있었다.
비는 시각적 풍요를 현실에서만 보여 주는 것이 아니다.
예술가의 종이 위에서도 새로운 세계를 이끌어 내는 효과를 불러온다.
이미지에 부가적인 층을 여러 겹 만들어 깊이감을 준다.
마찬가지로 선의 처리에도 다양성을 부여한다.
원래의 선을 보완하여 활력 있고
과감한 선과 가볍고
공상적인 선의 공존을 가능하게 한다.
비의 등장은 도시 경치의 다양함을 가져온다.
우리의 발아레에 여러 형상을 그려 내고 그림자와 빛을 반사시킨다.
바닥이 차츰 젖어 감에 따라
또 하나의 세계가 점진적으로 만들어진다.
사실 서울은 장마뿐만이 아니라 모든 게 다 괴물 같다. 성동구의 한 한교에서 강변북로를 따라 홍대앞쪽으로 이동을 하면서 한강을 바라볼 때였다. 저녁 여섯 시 즈음이었을 것이다. 황금빛으로 강 건너의 건물들을 비추며 지는, 붉은 해를 바라보고 있는데, 서울은 이 시간만큼은 아주아주 거대한 보석과도 같다는 생각을 하게 됐다. 서울은 거대하다. 그리고 시시각각 참으로 다르다. 계절마다, 동네마다 다 다른 향기가 난다. 너무 커서 요약도 안 되고, 너무 격렬해서 감당도 잘 할 수가 없을 정도다. 그만큼 바글바글하게 많은 얘기들이 숨겨져 있다. 이 책을 덮고 나니, 서울을 여행자처럼 오래오래 여행을 해보고 싶어졌다. 사실 우리는 서울에서 살면서 거의 모두가 이방인이지 않았던가.
사미르, 낯선 서울을 그리다사미르 다마니 저 | 서랍의날씨
인구 1,000여만 명이 사는 거대한 도시, 서울. 서울에 사는 사람은 물론이고 지방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서울은 이미 대한민국에서 가장 친숙하고 익숙한 장소이다. TV, 영화, 심지어 소설이나 노래 가사에도 서울이 인용되고 소비된다. 강남은 가수 싸이 덕에 전 세계로 알려졌을 정도다. 익숙해질 대로 익숙해진 서울을 낯선 시선으로 바라본다면 필시 외국인일 것이다. 외국인이 바라보는 서울의 모습은 어떠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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시인. 트위터 @catjuice_ 시집 <극에 달하다>, <빛들의 피곤이 밤을 끌어당긴다>, <눈물이라는 뼈>, <수학자의 아침>과 산문집 <마음사전>, <시옷의 세계> 등을 출간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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프랑스인 만화가, 서울을 그리다! “서울은 살아 있고, 자신을 표현하며, 일상의 삶 위에 녹아 있다.” 인구 1,000여만 명이 사는 거대한 도시, 서울. 서울에 사는 사람은 물론이고 지방에 사는 사람들에게도 서울은 이미 대한민국에서 가장 친숙하고 익숙한 장소이다. TV, 영화, 심지어 소설이나 노래 가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