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하루키에게 묻다

『도쿄 기담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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어디로 가면 그렇게 완벽한 사람들을 만날 수 있습니까?


내가 그를 질투하는 이유


언젠가 한 번 이 칼럼에서 무라카미 하루키를 다루고 싶었다. 나는 하루키의 작품을 거의 다 읽었다. 한 때 모든 문학청년들의 필독서였던 『상실의 시대』부터 근작인 『여자 없는 남자들』까지 한 권도 빼 놓지 않았다. 하루키가 쓴 에세이도 모조리 읽었다. 내가 이렇게 말하면 사람들은 고개를 끄덕이며 묻는다.


“하루키 팬이시군요?”


그럴 때마다 나는 어찌 대답해야 할지 몰라 얼버무리고 만다.


“아니오. 그리 좋아하진 않습니다만…….”


솔직히 말해 버리면 이상한 사람 취급 받기 일쑤이다. 좋아하지도 않는 작가의 책을 모두 챙겨 읽는 변태.


나는 정말로 하루키의 팬이 아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그의 작품들을 모두 읽은 건 아주 단순한 이유 때문이다.


재미.


하루키의 소설들은 재미있다. 부정할 수 없는 사실이다. 새로운 작품이 출간될 때마다 왜 이리 난리인가 싶다가도 막상 책을 손에 들면 내려놓기가 힘들다. 하루키는 소설만이 가질 수 있는, 활자가 표현할 수 있는 가장 이상적인 형태의 작품을 써 낸다. 게다가 본인은 인정하지 않을지도 모르겠지만 그는 꽤 대중 친화적인 이야기를, 무척 대중 친화적인 작법으로 풀어낸다.


그런 의미에서 나는 하루키의 작품들을 ‘대중 소설’로 분류하고 싶다. 물론 이른바 순문학이라 부르는 ‘등단 문학’과 장르 소설로 대변되는 ‘대중 소설’을 명확히 구분하는 곳은 우리나라뿐이다. 그리고 등단 문학에 비해 대중 소설이 열등하다고 평가 받는 나라도 아마 우리가 유일할 것이다. 그럼에도 분명 몇 년 안에 노벨 문학상을 받게 될 이 불세출의 작가를 (불경스럽게도) 대중 소설의 틀 안에 넣는 이유는 아주 단순하다.


역시, 재미.


하루키는 이야기를 재미있게 하는 법을 안다. 단순히 글을 잘 쓴다고 해서 이야기꾼이 되는 건 아니다. 문학에 대해, 그리고 삶에 대해 깊이 있는 통찰을 한다고 해서 재미를 보장받는 것 역시 아니다. 재미있는 이야기를 쓰려면 그 나름의 재능을 가져야 한다. 하루키는 그런 면에서 천부적이다. 실제로 그는 판타지, SF, 스릴러, 심지어 호러 장르까지 끌어와 근사하고 흥미로운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그리고 그 이야기를 그럴싸하게 포장하는 기막힌 재주까지 지녔다. 실로 경탄스러운 능력이요, 한없이 부러운 재능이다.


솔직하게 말하자면 나는 무라카미 하루키를 질투한다. 한국의 무명 소설가가 자신을 질투하는 일 따위로 하루키는 신경도 안 쓰겠지만 그래도 나는 질투한다. 질투의 이유 또한 단순하다. 그가 돈을 많이 버는 인기 작가이기 때문도 아니고 재미있는 이야기를 뚝딱 써 내기 때문도 아니다. 대신에 나는 하루키의 ‘인간적이지’ 않음을 질투한다.


물론, 욕은 아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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인간적이지 않은 주인공들의 지극히 인간적인 고민들, 『도쿄 기담집』


하루키는 매일 일정한 분량의 원고를 쓰고(그것도 아침에 일찍 일어나서!), 규칙적으로 달리기를 하는 한편, 재즈와 클래식에도 조예가 깊어 그것과 관련된 활동도 왕성하게 하는 가운데 전 세계 방방곡곡 여행을 다닌다. 영어도 잘한다. 미식가 기질이 있어 좋은 음식을 찾는 재주도 뛰어나다. 어느 하나 흠 잡을 구석이 없다. 자신은 뻔뻔할 정도로 야한 소설을 쓰면서 그 흔한 스캔들에 휩싸인 적도 없다. 그야말로 완벽한 인간 같다. 아니, 대중 소설의 숱한 영웅들 같다. 적 앞에서도 여유로운 농담을 던지는 하드보일드 속 주인공이나 악에 뒤덮인 세계를 구하는 판타지 속 선택받은 왕자라고나 할까. 현실에서는 도무지 존재할 것 같지 않은데 버젓이 살아 움직이며 (더군다나!) 소설까지 쓴다니, 생각할수록 질투가 난다.


질투는 나의 힘이라고 했던가. 질투심이 강해질수록 그의 소설에 대한 관심은 커진다. 그래서 신간이 나올 때마다 읽는데 이게 또 말 못하게 재미있으니 더 질투가 나는 거다.


재미있는 것은 하루키 소설에 등장하는 주인공들이 그와 닮았다는 사실이다. 하루키 소설에는 가난에 허덕이는 등장인물이 없다. 모두들 어떤 방식으로든 제법 괜찮은 돈벌이를 하고 있거나 아니면 이미 돈을 모은 상태이다. 강도 높은 노동에 시달리는 사람도 없다. 언제나 여유와 시간이 넘친다. 따라서 취미 생활을 누리는 데도 거리낌이 없다. 음식에 대해서도 잘 알고 팝송의 전문가들이며 크게 슬퍼하지도, 크게 좌절하지도 않는다. 그리고 (이 사실이 제일 마음에 안 드는데) 죄다 이성에게 인기가 많다!


작가의 모습이 십분 투영된 주인공들은 역시나 작가가 만들어낸 아름답거나 이국적인 배경 속에서 유유자적 살아간다. 청춘의 고뇌를 안고 있는 사람이건 일각수와 관계된 커다란 사건에 휘말린 사람이건 난쟁이들이 등장하는 세상에서 사랑하는 사람을 찾아 헤매는 사람이건 할 것 없이 그 라이프스타일만은 아주 여유롭다. 그리하여 하루키의 작품을 읽고 있으면 소설과 현실 사이, 결코 메울 수 없는 어떤 틈을 발견하게 된다.


최근에 재출간 된 하루키의 소설집도쿄 기담집』에도 비슷한 등장인물들이 나온다. 하루키의 다른 버전인 것 같은 사람들 말이다.


이 작품은 ‘기담집’이라는 제목을 달고 있긴 하지만 기담이 들어간 여타 다른 소설들에 비해 그 강도가 세진 않다. 즉 오싹하거나 기괴하거나 섬뜩한 이야기하고는 거리가 멀다는 사실이다. 대신에 ‘하루키스러운’ 요소가 충분히 들어가 있다. 뜬구름 잡는, 그러나 매력적인 설정, 술술 잘 읽히는 문장, 모호한 듯 아련한 결말까지. 무엇보다 먹고사는 근심에서 해방된 주인공들을 보는 재미가 쏠쏠하다.


상어에 물려 죽은 서퍼 아들을 그리워하며 매 년 하나레이 해변을 찾는 엄마, 24층과 26층 사이에서 실종된 남편을 찾는 여자와 그 의뢰를 받은 조사원, 운명의 상대를 찾아 헤매는 소설가, 자신의 이름을 잊어버린 주부 등 도쿄 기담집』 속 인물들은 각기 다른 사연 속에서 살아가고 있지만 삶 자체가 여유롭다는 점은 모두 똑같다. 하루키는 자신의 소설 속 인물들을 두고 “내 소설의 주인공 대부분은 혼란과 고독, 상실을 헤쳐가고 있다.”라고 말했지만 그 안에 생활에 대한 어려움은 들어있지 않다. 그의 소설 속 주인공들은 그저 기계적으로 고민할 뿐이다. 혼란과 고독에 대해, 그리고 상실에 대해.


나는 그런 사실에 이러쿵저러쿵 불평할 생각은 없다. 그러니까 하루키 소설 속 인물들이 현실적이지 않다는 점 말이다. 오히려 그런 점들 때문에 그의 소설이 더 매력적으로 다가오는 것도 사실이다. 나와 다른 세계에 살고 있는 사람들이 나와 비슷한 고민을 하는 모습을 보며 느끼게 되는 안도감, 하루키의 작품에는 분명 그런 지점이 존재한다. 도무지 내 주위에서는 찾아볼 수 없는 인물들이지만, 도쿄 기담집』 속 주인공들도 나와 비슷한 고민을 안고 살아가고 있다. 사랑하는 이의 부재로 고통을 겪기도 하고 옛 사건이 트라우마가 되어 시달리기도 한다. 예컨대 인간적이지 않는 인간들이 지극히 인간적인 고민을 하고 있는 것이다. 그 아이러니한 설정 속에서 묘한 재미가 흘러나온다. 하루키의 다른 작품들처럼.


언젠가 기회가 된다면 꼭 한 번 하루키를 만나고 싶다. 만나서는, 당신이 아니라 당신 소설의 팬이라고 당당히 말한 뒤 이렇게 물을 것이다.


“그런데 그런 완벽한 인간들은 도대체 어디 가면 만날 수 있는 겁니까?”


그러면 하루키는 어깨를 으슥할지 모른다. 외국생활 동안 몸에 밴 서양인의 몸짓 그대로. 그런 뒤 이렇게 덧붙일 수도 있겠지.


“내 소설의 주인공들은 현실과 상상의 경계에서……특별한 소명을 가지고……노르웨이 숲을 지나……달이 두 개인 세상이나……일각수가 내달리는 곳……터프한 열다섯 살 소년이 카프카를…….”


그런 구구절절한 말을 듣느니 <여자 없는 남자들>을 읽는 편이 더 나았다고, 나는 후회할지도 모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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도쿄기담집무라카미 하루키 저/양윤옥 역 | 비채
아파트 24층과 26층 사이에서 홀연히 사라진 남편을 찾는 여자, 인생에서 만날 수 있는 세 명의 의미 있는 여자 가운데 한 명을 만남 남자, 문득 자신의 이름만이 기억나지 않는 여자… 평범한 등장인물들이 여느 날과 같은 일상에서 맞닥뜨린 트릿한 순간 혹은 빛과 온기가 결락된 틈에서 포착해낸 불가사의하면서도 기묘하고, 있을 것 같지 않은 이야기를 담은 소설집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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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전건우

남편, 아빠, 백수, 소설가, 전업작가로 살아간다. 운동만 시작하면 뱃살이 빠지리라는 헛된 믿음을 품고 있다. 요즘 들어 세상은 살 만하다고 느끼고 있다. 소설을 써서 벼락부자가 되리라는 황당한 꿈을 꾼다. 『한국 추리 스릴러 단편선 3』, 『한국 추리 스릴러 단편선 4』에 단편을 실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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