칼럼 > 연재종료 > 전건우의 대중소설로 사색하기
세상에는 두 가지 유형의 이야기꾼이 있지
알베르 카뮈는 일찍이 이렇게 말했다.
“진실은 빛과 같이 눈을 어둡게 한다. 반대로 거짓은 아름다운 저녁노을처럼 모든 것을 멋지게 보이게 한다.”
카뮈가 왕성하게 활동했던 70여 년 전보다 진실과 거짓의 경계가 훨씬 더 모호해진 지금이야말로 그의 말이 더욱 크게 와 닿는다. 어쩌면 사람들은 진실이 주는 고통보다도 거짓이 선사하는 아름답고 멋진 환상을 더 좋아하는지도 모른다. 아마도 그렇기에 소설가와 정치인이라는 직업이 카뮈의 시대 이전부터 지금까지 쭉 남아 있는 건지도, 또 모른다.
고백하자면, 대부분의 소설가들은 지독한 거짓말쟁이들이다. 영업 비밀이랄 건 없지만 거짓말을 잘 할수록 더 근사한 이야기를 써내려 갈 확률이 높아진다. 요즘이야 ‘구라’라고 하면 독설 전문 MC의 이름을 먼저 떠올릴지 모르겠지만 십여 년 전만해도 ‘구라’는 타고난 이야기꾼들에게 보내는 일종의 성스러운 칭호나 다름없었다. 여전히 신묘한 구라의 세계를 펼쳐내는 황석영도, ‘젊은 구라’로 급부상 중인 이기호도 기가 막힌 이야기꾼들이다. 외계에서 뚝딱 떨어진 것만 같은 박민규나 최근에 『풍의 역사』라는 제목으로 아예 허풍의 한국사를 그려낸 최민석도 다 이야기꾼들이요 구라쟁이들이다. 그야말로 구라 계의 ‘킹왕짱’이라 할 수 있는 스티븐 킹은 호러 소설의 제왕이라는 칭호보다는 거짓말의 제왕, 혹은 구라의 제왕이 더 어울린다. 그에게 이런 말을 해 준다면 아마 굉장히 좋아할 것이다.
그럴 듯한 거짓말로 먹고 사는 부류가 소설가 하나라면 이 세상은 참 즐거울 텐데 아쉽게도 그렇지 않다. 거짓말, 구라, 그리고 허풍이라면 소설가 못지않은 사람들이 있으니 바로 정치인들이다. 일전에 한 번 정치인들이 잔뜩 모인 모임에 간 적이 있었다. 결혼 전이었으니 꽤 옛날의 일이다. 번쩍이는 금배지를 달고 있던 그들은 모두가 의원 아니면 회장이었다. 처음 내 예상은 아주 지겨우리라는 것이었다. 점잔빼는 사람들의 모임만큼 재미없는 것도 없으니. 그러나 웬걸, 정치인들이 나누는 사적인 이야기는 미칠 정도로 흥미로웠다! 기본적으로 구라와 허풍을 바닥에 깔고 이야기를 펼쳐나가는데 대게 말솜씨가 아주 뛰어났고 눈 하나 깜박 않고 거짓말을 하는 그 굳건한 자세는 사뭇 존경스럽기까지 했다. 군대에서 말년 병장이 펼쳐놓는 구라 가득한 이야기를 들으며 순진하게 감탄하는 이등병의 마음과 같았다면, 남자들은 어느 정도 공감할 수 있을까? 아무튼 나는 그날 아주 순수한 마음으로 감탄했다. 이 세상에 소설가 말고 이토록 거짓말과 이야기를 잘 하는 사람들이 있을 줄 미처 몰랐던 것이다.
소설가들은 이야기꾼으로서의 재능을 타고 난다. 내가 보기에는 정치인들도 마찬가지이다. 구라와 허풍과 거짓말을 멋들어지게 포장해서 아주 그럴싸한 진실처럼 보이게 만드는 건 재능 없이는 불가능한 일. 소설가가 조금만 더 뻔뻔하다면 정치인이 될 것이고, 정치인이 조금만 더 게으르다면 소설가가 될 지도 모를 일이다. 다만 이 둘에게는 결정적인 차이 하나가 있다. 그건 바로 누구를 위해 이야기를 하는 가 이다.
소설가들은 남이 즐거워하는 걸 보고 싶어 끊임없이 이야기를 만들어 낸다. 청자들이 웃고 울고 겁에 질려 벌벌 떠는 꼴을 보는 것만으로도 행복한 것이다. 반면 정치인들은(그렇지 않은 사람도 있으리라 희망하지만) 자신의 즐거움을 위해 이야기를 한다. 듣는 이에 대한 배려 따위는 없다. 따라서 대게의 경우 정치인들의 이야기에는 악질적이고 기분 나쁜 거짓말이 들어있기 일쑤다. 다 듣고 나서도 개운하지 않고 고개를 갸웃하게 되며 끝내 분노하게 되는 건 바로 이런 이유 때문이다.
『코』라는 걸출한 작품으로 데뷔한 ‘소네 케이스케’ 역시 타고난 이야기꾼이다. 일본 작가 특유의 기상천외한 상상력은 물론이고 쉽고 간단한 문장을 써서 어려운 이야기를 척척 풀어내는 솜씨까지, 차세대 장르 작가로 부르기에 손색이 없다.
최근에 출간된 단편집 『열대야』에도 소네 케이스케의 장점이 고스란히 묻어난다. 『열대야』 『결국에……』 『마지막 변명』 등의 세 작품은 섣불리 결말을 짐작했다가는 자칫 두통수를 맞을 수도 있는 참신한 설정과 전개로 단번에 독자의 눈을 사로잡는다.
그런데 한 가지 재미있는 사실은 『열대야』의 전반에 흐르는 분위기가 다른 작가들의 작품과는 사뭇 다르다는 것이다. 소네 케이스케와 비슷한 이야기를 하는 작가들은 꽤 많다. 매 번 빛나는 단편을 선보이는 ‘오츠 이치’나 섬뜩한 이야기에 특화된 ‘히리야마 유메아키’ 그리고 이들의 선배 격이라 할 수 있는 ‘아토다 다카시’도 소네 케이스케 과(科)의 작가들이다. 장편보다는 상대적으로 단편이 더 뛰어나고 기발한 상상력을 바탕으로 독자들의 입에서 ‘억’ 소리 나게 만드는 재주까지.
하지만 앞서 열거한 세 명의 작가가 어디까지나 소설가로서의 이야기를 들려주는 반면에 소네 케이스케의 이야기는 정치인들의 그것과 어딘지 비슷하게 느껴진다. 그러니까 이런 것이다. 소설가들은 기본적으로 “자, 이제부터 재미있는 이야기 하나 해 줄까?”라고 이야기를 시작하는 반면, 정치인들은 “이제부터 기분 나쁜 이야기 하나 해 줄까?”라고 의뭉스러운 미소를 띠며 입을 연다. 물론 그 기분 나쁜 이야기가 못 견디게 재미있다는 사실은 부정할 수 없다. 그래서 매 번 속는 것이다. 속도 또 까먹고, 속고 또 까먹고…….
표제작인 『열대야』는 야쿠자에게 인질로 잡힌 두 남녀의 이야기이다. 언뜻 평범한 설정처럼 보이지만 아주 기본적인 트릭을 통해 전혀 다른 이야기로 풀어낸다. ‘결국에……’는 노령자들이 핍박받는 미래를 다룬다. 노령자들은 명예롭게 전장으로 끌려가 나라를 위해 충성해야 하는데 그 속에 정부의 음모가 숨어 있다. 노인이 군인이 된다는 설정은 ‘존 스칼지’의 『노인의 전쟁』 시리즈를 떠올리게 하나 ‘결국에……’ 쪽이 몇 배는 더 잔인하다. 이건 묘사로서의 잔인함이 아니라 정서로서의 잔인함을 말한다. ‘마지막 변명’에는 흔하디흔한 소재인 좀비들이 나온다. 작품 속에서는 소생자라고 불리는데, 개인적으로 좀비 물을 좋아하는 내게는 이 단편이 가장 마음에 들었다. 중간부터 아주 서정적인 이야기로 빠질 듯 분위기를 잡지만 아니나 다를까, 결말에 가서는 특유의 뒤통수치기를 통해 쓴맛을 선사한다.
그렇다. 『열대야』를 관통하는 정서는 ‘쓴맛’이다. 작가가 정밀하게 짜놓은 트릭에 완전히 속아 넘어갔는데도 감탄보다는 탄식이 먼저 나온다. 어딘지 뒷맛이 개운치 않다. 기똥차게 재미있고 읽는 내내 한눈을 팔 수 없을 정도인데도 매 작품의 끝에 가서는 살짝 기분이 나빠진다. 소네 케이스케는 짓궂은 농담과 차가운 진담 사이의 어딘가에서 이야기를 길어 올린다. 심각한 척, 사실인 것처럼 이어나가다가도 끝에 가서는 꼭 “히히 농담이야.”라고 의뭉을 떨어버리니, 게다가 그 결말마저 어둡기 짝이 없으니 씁쓸할 수밖에.
그러고 보니 『코』에서도 비슷한 느낌을 받았었다. 읽고 나서 무릎을 치긴 했지만 어딘가 찜찜했다. 그런데 그걸 까먹고 신작이 나올 때마다 소네 케이스케의 작품을 사는 걸 보니 확실히 정치인 스타일의 이야기에는 중독성 내지는 특유의 매력이 있는 가 보다.
우리는 본능적으로 이야기 속에서 희망을 찾으려고 한다. 그리고 보통의 이야기꾼들이라면 기꺼이 그런 희망적인 이야기를 들려 줄 준비가 되어 있다. 그러나 정치인들의 이야기는 다르다. 그 누구보다 희망을 이야기하는 듯 보이지만 결과는 언제나 절망적이니까. 씁쓸함과 찜찜함, 그리고 묘한 서글픔으로 점철되는 『열대야』 속 이야기가 그런 것처럼. 그래도 내게 둘 중 하나를 선택하라면, 나는 기꺼이 텔레비전 뉴스나 포털 사이트 기사 속의 정치인들 이야기 대신에 이 책 『열대야』를 집어 들 것이다. 어찌 되었건 소설 속 이야기는 허구이지만, 정치인들의 이야기는 지긋지긋한 현실이므로.
열대야소네 케이스케 저/김은모 역 | 북홀릭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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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소네 케이스케> 저/<김은모> 역9,900원(10% + 5%)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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