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영어는 difference를 싫어해

difference에 대한 영어의 관점을 읽어낼 수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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분란을 일으키던 주범으로 간주되었던 difference가 진지한 이론적 탐구의 대상이 되었다는 점에서 근대가 어떤 변화를 의미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근대에서 difference를 참아내는 tolerance, 한국에서 ‘똘레랑스’라고 알려진 관용의 문제가 중요하게 대두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페르디낭 드 소쉬르라는 스위스 언어학자는 20세기 언어학의 아버지 같은 사람이다. 그의 영향력은 언어학에 그치지 않고 인류학, 철학, 정신분석학에 이르기까지 다방면에 걸쳐 있다. 오늘날 소쉬르를 빼놓고 20세기 사상의 변천을 설명하기는 어려울 것이다. 도대체 그가 무엇을 했길래 이렇게 유명한 것일까. 앞에서 잠깐 설명했지만 그는 언어에 대한 기본적인 관점을 바꿔놓았다. 아마 이런 방면에 조금 관심이 있는 분이라면 ‘랑그’와 ‘빠롤’이라는 용어를 들어본 적이 있을 것이다. 랑그는 언어에 있는 구조적이고 사회적인 것을 의미하는 반면, 빠롤은 개인적이고 실천적인 것을 의미한다.


쉽게 말해 랑그는 평소에 언어를 사용할 때 뜻을 전달하기 위해 채택하는 약속된 기호체계 같은 것이고, 빠롤은 언어를 일상적으로 사용하는 행위다. 빠롤은 랑그를 사용하고 또한 그 과정에서 랑그를 만들어낸다. 달걀이 먼저인지 닭이 먼저인지 알 수 없지만 어쨌든 이 둘은 서로 상호의존적으로 유지 및 발전되는 것이다. 지금 생각하면 별 것 아닌 내용이지만 당시로 본다면 획기적인 발상이었다. 소쉬르가 과학적인 방식으로 언어에 대한 정의를 처음으로 부여했다고 볼 수 있다. 언어를 과학적 탐구의 대상으로 보고 언어에 대한 과학, 다시 말해서 언어학을 정초해야할 필요성에 대해 역설한 사람이 소쉬르였다. 이런 그의 주장이 담긴 강의록 『일반언어학 강의』는 후대에 어마어마한 반향을 불러일으켰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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랑그와 빠롤로 언어의 구성 원리를 정리했다는 사실이 왜 중요한가. 언어가 구조적인 관계를 통해 의미를 획득한다는 사실을 증명할 수 있기 때문이다. 소쉬르 이전까지 언어학자들은 어떤 특정한 단어와 그 의미는 필연적인 관계가 있다고 생각했다. ‘나무’라는 단어는 그것이 의미하는 ‘줄기나 가지가 목질로 된 여러해살이 식물’과 밀접하게 관련이 있다고 믿었다. 그런데 소쉬르는 나무라는 단어가 이런 의미로 쓰이는 것이 단어 자체와 아무런 관련이 없다고 말했다. ‘나무’가 이런 뜻으로 통용되는 것은 우연한 계기를 통해 만들어졌다는 것이다. 이런 발견은 겉보기보다 중요하다. 소쉬르에 따르면, 언어의 의미는 절대적인 것이 아니라 관계에 따라 좌지우지될 수 있는 상대적인 것이다.


언어의 의미가 관계의 산물이라는 생각은 마치 마르크스가 상품의 가치를 일컬어 관계의 산물이라고 규정했던 것을 상기시키지만 여하튼 소쉬르의 이론에 따르면, 특정 단어와 특정 단어 사이의 다른 의미는 차이의 산물에 지나지 않는다. Three와 horse가 각각 해당 사물을 가르는 이유는 기호상 차이가 나기 때문이지, 두 단어가 ‘나무’나 ‘말’이라는 의미와 실체적으로 관련 있어서가 아니다.

 

이로써 소쉬르는 언어에 대한 고찰을 통해 반세기를 풍미할 철학적 화두 하나를 던지게 되는데, 바로 의미라는 것이 어떤 실체 없이 차이를 통해 규정된다는 개념이다. 의미는 내부에서 발생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적인 요인에 따라 바뀐다는 이 발상의 전환이 오늘날 우리가 목격하고 있는 수많은 철학사상을 만들어낸 씨앗이라고 말해도 과언이 아니다. 앞서 이야기했던 것처럼 정상과 비정상을 가르는 차이가 우연적으로 형성된 기준에 불과하다면, 우리가 철석 같이 진리라고 믿고 있는 것이 사실은 자의적인 믿음에 지나지 않는다는 생각을 해볼 수 있다.


물론 소쉬르가 ‘차이’라는 말을 발견한 것도 아니고 차이와 의미의 문제를 다룬 것도 아니다. 소쉬르는 그 차이의 문제를 언어라는 토대에서 이야기함으로써 언어를 중요한 매개로 다루는 다양한 이론에 무시할 수 없는 영향을 끼쳤다. 차이는 영어로 difference다.  Difference의 어원적 뿌리는 라틴어 differentia다. 처음에 이 단어는 ‘분리하다’라는 의미였지만 14세기경에 ‘논쟁하다’라는 의미가 덧붙여졌다. 서로 분리하고 구별해놓으니 당연히 분쟁이 일어나지 않겠는가. 이 분쟁에서 지루한 말싸움을 계속하는 것이 difference의 본래 의미였던 것이다. 서양에서 difference는 좋은 의미를 가진 말이 아니었다. 서로 힘을 합쳐서 뭘 해보려고 하는데 difference를 자꾸 강조하면서 논쟁을 걸어오는 것이 공동체의 입장에서 보면 탐탁지 않았을 것이다.


유유상종이라는 말이 있듯이 그때도 지금처럼 마음 맞는 사람들이 끼리끼리 작당을 하는 것은 여전했다. 유유상종은 영어속담으로 “Birds of a feather flock together”라고 배웠다. 말 그대로 옮기면, 같은 깃털을 가진 새들끼리 모인다는 건데 이는 자연에서 보기 힘든 광경이다. 그냥 사람의 행태를 새에 비유한 은유적 수사인 셈이다. 이 속담은 1545년에 처음 기록되었고, 공식적으로 윌리엄 터너라는 사람이 최초로 썼다고 알려져 있다. 터너는 “Birds of one kind and colour flock and fly always together”라고 썼다. 이 말이 줄어서 “Birds of a feather flock together”로 바뀌었다. 터너의 취지는 우정에 대한 이야기를 새의 깃털 색깔에 빗대어서 말하고자 한 것이었다. 이 밋밋한 말은 셰익스피어의 <아테네의 티몬>에서 멋있게 다시 태어난다.

 

I am not of that feather to shake off
My friend, when he must need me.

 

“친구, 나는 내 친구가 꼭 필요로 할 때 뿌리치는 깃털이 아니네”라는 의미다. 여기서 feather는 깃털이라는 의미이면서 동시에 같은 종류의 사람, 다시 말해 friend를 은유적으로 표현하고 있다. 친구가 힘들 때 곁에서 도와주지, 같은 색깔의 깃털을 뽑아버리고 다른 깃털로 위장하는 사람이 아니라는 말이다. 우리는 깃털보다 몸통을 중시하는 경향이 있지만, 과거 영어의 세계에 살던 이들에게는 깃털이야말로 진심의 표현이었던 모양이다.


Friend는 오늘날 주로 친구라는 의미로 통용되지만 고대에는 ‘애인’이라는 뜻도 있었다. 그래서 boy friend나 girl friend라는 말이 ‘애인’으로 쓰이게 된 것이다. 셰익스피어의 대사는 “A friend in need is a friend indeed”라는 말과 일맥상통한다. 필요로 할 때 도와주는 친구가 진짜 친구라는 말이다. 진짜 친구가 바로 유유상종인 셈이다. 유유상종은 마음이 통하는 상태, 다시 말해서 서로 사랑하는 사람들의 관계를 의미한다. 꼭 사랑을 남녀끼리만 하라는 법이 어디 있나. 사랑의 종류가 다양하듯이 사랑의 방식도 천차만별인 것이다. 모두 모두 difference다.


이처럼 유유상종과 진짜 친구가 서로 관련 있다는 사실에서 difference에 대한 영어의 관점을 읽어낼 수 있다. 옛날 옛적 서양에서 difference를 강조하고 상대방에게 시비를 거는 논쟁적 태도는 당연히 환영을 받기 어려웠다. 이런 상황이 근본적으로 바뀐 것은 이른바 근대라는 새로운 세계가 도래한 이후였다. 근대는 영어로 the modern이다. Modern은 원래 just now의 의미를 지녔다. ‘바로 지금’으로 이해하면 되겠다. 과거나 미래가 아니라 바로 지금을 중요하게 생각하는 경향은 근대에 대두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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근대는 무한한 차이의 세계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무엇보다도 대항해시대와 식민지개척으로 인한 공간의 확장이 서양에 충격을 가져다주었다. 물론 서양의 침략이 자행되었던 곳도 다시는 과거처럼 살아갈 수 없게 되었지만 서양 역시 마찬가지였다. 르네 데카르트 같은 철학자는 심각한 고민에 빠졌다. 아프리카에서 잡혀온 노예가 유럽어를 배워서 말하는 것을 본 데카르트는 인간은 모두 생각한다는 명제를 확신할 수 있었다.

 

그래서 진리의 기준점으로 “생각한다, 그러므로 나는 존재한다(cogito, ergo sum)”라는 ‘대발견’을 했던 것이다. “모든 것을 의심해도 결코 의심할 수 없는 것이 바로 ‘생각하는 나’”라는 명제는 이른바 근대사상의 기초 같은 것이었다. 데카르트가 없었다면 오귀스트 로댕이 만든 유명한 조각상 ‘생각하는 사람’도 없었다. 데카르트가 부정할 수 없는 최소 단위로 제시한 ‘나’는 difference가 없는 존재였다. 그 ‘나’가 생각한다는 사실을 의심할 수는 없었기 때문이다.


이런 데카르트의 생각을 부분적으로 뒤집은 철학자가 데이비드 흄이었고, ‘생각하는 나’에 difference가 내재해 있다는 것을 발견한 사람은 지그문트 프로이트였다. 프로이트는 의식과 무의식을 구분해서 존재를 무의식의 집이라고 생각하게 만든 정신분석의 창시자다. 정신분석의 출현으로 비로소 우리는 ‘나’라는 존재를 의심해볼 수 있게 되었다. 프로이트는 무의식의 존재를 증명하기 위해 다른 무엇도 아닌 ‘말’에서 실증적 사례를 찾았다. 무의식의 장소로 언어를 지목한 것이다.

 

마르틴 하이데거 같은 철학자도 존재와 존재자 사이에 실존적 차이가 존재한다는 말을 했다. 분란을 일으키던 주범으로 간주되었던 difference가 진지한 이론적 탐구의 대상이 되었다는 점에서 근대가 어떤 변화를 의미하는지 짐작할 수 있다. 근대에서 difference를 참아내는 tolerance, 한국에서 ‘똘레랑스’라고 알려진 관용의 문제가 중요하게 대두된 것도 이 때문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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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택광

미술, 영화, 대중문화 관련 글을 쓰고 있는 작가. 경희대학교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영미문화전공 교수로 재직하면서 문화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경북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자란 그는 어릴 적에 자신을 안드로메다에서 온 외계인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지구환경에 한동안 적응하지 못했으며 우주여행을 떠나는 그림을 그려서 꽤 큰상을 받기도 했다고 추억한다. 그는 자신의 모토를 "그림의 잉여를 드러내는 글쓰기" 라고 밝히며 글쓰기는 그림 그리기의 대리물이라고 생각하기에 그림에 대한 글을 계속 쓸 생각이라고 포부를 이야기한다. 이러한 글쓰기에 대한 생각을 바탕으로 1999년, 영화주간지 <씨네 21>에 글을 발표하며서 본격적인 문화비평을 시작한 이후, 다양한 저서를 통해 독자들과 만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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