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Moralist는 그렇게 착하지 않다

도대체 ‘진짜 못지않은 가짜’란 무엇일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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그러므로 영어에서 morality는 합리성(rationality)과 관련이 있다. 누군가 합리적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moralist라는 의미다.

 

영국국기

영국 국기 [출처: 위키피디아]

 

영어가 영국적인 것(Englishness)을 구성하는 철학과 문화를 체현한다는 것은 그리 놀라운 사실이 아니다. 영어는 영국에서 출발했기 때문이다. 영국적인 것이 무엇인지를 놓고 티격태격해온 것이 영국 문화의 역사이기도 하다. 도대체 무엇이 영국적인 것일까. 런던을 상징하는 빅벤과 빨간 이층버스가 영국적인 것일까. 아니면 멋지게 차려 입고 크리켓 경기나 폴로 경기를 관람하는 귀족적인 스타일이 영국적인 것일까. 단아하게 꾸며놓은 영국식 정원 아니면 오후 3시경 둘러앉아 영국식으로 블렌딩한 밀크티를 마시면서 지금 읽고 있는 책에 대해 이야기하는 티타임의 한가로움이 영국적인 것일까.


대체로 우리가 영국적인 것이라고 믿고 있는 이런 문화는 18세기 영국 귀족문화를 관광상품으로 개발한 것이기도 하다. 관광상품이기 때문에 가짜라는 말이 아니다. 상품이라는 것은 사물의 전형성에 근거한다. 화폐가치라는 보편적인 기준으로 통일시켜놓은 것이 상품이고 상품형식이다. 여기에서 중요한 것은 상품형식이다. 이른바 짝퉁이라는 가짜 상품들을 보라. 이런 짝퉁이 흉내 내는 것은 명품 자체가 아니라 명품이라는 형식이다. 일전에 말레이시아에 갔을 때, 재미삼아 짝퉁으로 유명한 시장을 방문한 적이 있었다. 정말 없는 게 없었다. 물건을 팔던 상인이 내 시계를 가리키면서 “그것도 있다”고 자랑스럽게 말하기도 했다. 그냥 가려고 하자, 옷깃을 붙잡고 짝퉁 명품시계를 하나 보여주면서 “이 시계는 가짜지만 진짜 못지않은 가짜다”라고 말했다.


도대체 ‘진짜 못지않은 가짜’란 무엇일까. 여기에서 진짜와 가짜라는 경계는 흐려진다. 진짜를 모방해서 가짜를 진짜 못지않게 만들면 그것은 가짜인가 진짜인가. 예전에 명품가방 제작공장에서 일하다가 그만 두고 나온 뒤 몇십 년 동안 가짜 명품을 만들다가 검거된 짝퉁 제조업자의 사연이 언론을 타기도 했다. 이럴 경우, 이 제조업자가 만든 제품은 진짜일까 가짜일까. 진짜와 가짜를 가르는 기준은 제조과정에서 명품회사의 인가를 거쳤는지 거치지 않았는지에 있다. 상품 자체에 그 차이가 존재하는 것이 아니라, 외부적인 요인이 그 상품의 진위를 판정하게 되는 것이다.


형식은 어떤 규범(the normative)을 만들어낸다. 규범이라는 것은 행동의 기준을 의미한다. 명품을 소비하는 행위는 상품 자체에 대한 매력에 끌려서 라기보다 이런 규범을 훌륭하게 이행할 수 있는 자신을 뽐내기 위함에 가깝다. 자신의 행동이 특정 기준에 맞다는 사실을 증명하는 것이 명품 소비의 본질이다. 즉 명품 소비자들에게 필요한 것은 질 높은 상품이 아닌 그 상품의 정체성을 드러낼 형식이다. 그 형식을 상징화하고 있는 게 바로 명품을 말해주는 상표일 것이다. 그렇다면 이런 행동에 대한 판단은 어떻게 이루어지는 것일까. 예를 들어서, 분수에 맞지 않는 명품 소비를 비판할 때 그 근거는 어디에 있는 걸까. 규범이 행동의 기준이라면, 이 기준을 결정하는 것은 무엇일까.


흥미롭게도 영어를 모국어로 사용하는 이들은 그 결정 요인이 바로 도덕성(morality)이라고 오래 전부터 확신했다. Morality라는 말은 13세기 라틴어 moralitatem에서 연유한 것이다. 원래는 인성이나 예절을 의미했다. 16세기 중반까지 moral은 착하거나 나쁜 성격 자체를 지칭했다. 말하자면 사회에서 개인이 처신하는 행동 자체를 통틀어 moral이라고 불렀던 것이다. ‘도덕적인 사람은 착한 사람’이라는 의미는 16세기 후반에 와서야 처음으로 영어에 등장한다. ‘선(goodness)’의 의미가 morality에 추가된 것이다. 지금 우리가 알고 있는 ‘도덕적인 사람은 착한 사람’이라는 뜻은 이때 만들어졌다고 볼 수 있다. 그렇지만 여기서 ‘착한 사람’은 우리가 막연하게 생각하는 ‘마음씨 좋은 사람’이 아니다. 

 

이택광


 Moralist라는 말이 ‘착한 사람’을 뜻하지 않는다는 것을 봐도 짐작할 수 있다. Moralist는 도덕을 가르치는 사람이다. 어원적 의미에 근거하면, 사회에서 적절한 행동을 할 수 있도록 예절을 가르치는 사람이 moralist다. 샬롯 브론테의 『제인 에어』에 등장하는 완고한 교사에 더 가까운 사람이다. 드물게 ‘도덕적인 사람’을 뜻하기도 하지만, 이때 도덕적이라는 말도 상황에 적절하도록 처신한다는 의미이지 우리가 알고 있는 그 ‘착한 사람’이라는 뜻이 아니다.

그런데 도대체 왜 도덕적인 것은 선이라는 말과 연결되는 것일까. 영어는 정말 수수께끼 같다. 영어 좀 한다는 분들이 영한사전으로 공부하면 영어에 대한 감각을 키울 수 없다고 너스레 떠는 것이 딱히 엄살은 아닌 것이다. 영어를 이해하려면 영어에 담겨 있는 생각의 발상을 이해할 필요가 있다. 앞서 이야기했지만 영어에서 가장 중요한 것은 ‘자유로운 개인’이다. 영어는 개인을 ‘자유로운 행위자(free agency)’로 본다. 자유로운 개인이 없으면 도덕도 없다는 것이 영어의 사고방식이다.


이런 사고방식에 따르면, 도덕은 자유로운 개인의 행동에 대한 판단 기준일 뿐이지 그 개인의 속성을 말해주지 않는다. 어떤 개인이 특정 행동을 했을 때, 그것을 판단해주는 기준이 morality다. 그래도 여전히 문제가 있다. 그렇다는 걸 인정하더라도 morality는 도대체 어디에서 온 물건인지 의문이 가시지 않는다. 이 문제를 길게 논의한 영국 철학자들의 책을 보면, morality는 신이 부여하고 보장하는 것이라고 말들은 하고 있지만 말만 그렇게 하지 존 로크 같은 철학자들이 딱히 신을 신뢰하는 것 같지는 않다. 오히려 존 로크는 심리학적인 차원에서 morality를 개인의 내면에 자리 잡은 ‘도덕적 동기’로 보고 있다. 이런 주장이 성립하려면 자유로운 개인은 자연스럽게 도덕적인 의무를 따른다는 전제가 증명되어야 한다. 자유주의는 이 전제를 증명하는 철학이라고 해도 과언이 아니다.


중세에 유행했던 morality play라는 연극 형식을 보면, 등장인물이 각각 God, Death, Everyman, Good-Deeds, Angel, Knowledge, Beauty, Discretion, Strength처럼 명명되어 있다. 우리가 잘 알고 있는 존 번연의 『천로역정』도 이런 morality play의 형식을 차용한 것이다. 이런 기법을 allegory라고 부른다. 개인이 가질 수 있는 virtue를 각각 주인공으로 삼아서, 여러 개인의 행동으로 인해 초래되는 다양한 사건사고의 교훈에 대해 생각해보게 하는 것이 목적이다. 이때 virture는 ‘미덕’이라고 옮기기도 하지만, 사실은 능력 또는 역량을 의미한다. 개인을 규정하는 어떤 속성 따위가 virtue를 통해 만들어진다.


이런 morality play에서도 확인할 수 있듯이, morality는 개인의 virtue를 판단해주는 기준이다. 그런데 이 기준은 존재하긴 존재하되 개인의 내면에 존재한다. 물론 morality가 외부를 통해 주어진다고 주장한 토마스 홉스 같은 영국 철학자도 있다. 그러나 홉스도 자기 보전을 위한 합리적 판단이 도덕적 의무를 이끌어낸다고 봤다는 점에서 개인 내면에 존재하는 ‘도덕적 동기’를 부정하지 않았다고 할 수 있다.

 

이런 관점에서 morality는 영어에서 대단히 중요한 말이다. 앞서 자유주의와 영어의 관계에서 살펴봤듯이, morality라는 말이 없다면 전형적인 영어의 사고방식이 성립하기 곤란하기 때문이다. Morality라는 범주가 없다면 분쟁을 ‘대화’로 풀어야한다고 주장하는 자유주의는 설 자리를 잃었을 것이고, 영어도 그만큼 설득의 기술을 발전시키지 못했을 것이다. ‘대화’를 하려면 먼저 상대방을 믿어야한다. 이 믿음의 근거를 주는 것이 바로 morality다. 이런 의미에서 서로 다른 개인의 이해관계를 조정하기 위한 중요한 장치로 morality라는 말을 생각해볼 수 있다.


그러므로 영어에서 morality는 합리성(rationality)과 관련이 있다. 누군가 합리적이라고 말한다면, 그것은 moralist라는 의미다. 규칙을 준수하고 페어플레이를 펼친다면 그는 좋은(good) 사람이다. 물론 앞서 지적했지만, 이 좋다는 개념은 한국에서 착하다는 개념과 다소 차이가 있다. 한국에서 착하다는 말은 ‘언행이나 마음씨가 곱고 바르며 상냥하다’는 뜻으로 영어로 치자면 morality의 어원적인 의미에 더 가깝다.

 

하지만 영어에서 좋다는 것은 상호혜택을 준다는 것이다. 도덕적인 사람은 자기의 이익을 추구함으로써 서로에게 혜택을 주는 사람이라는 전제가 깔려 있다. 따라서 rational이라는 말은 개인들끼리 ‘대화’로 이해관계를 조정해 공동의 목적에 부합하는 결론을 도출하는 과정을 지칭한다. Rational은 이성이라는 의미를 가진  reason에서 나온 말이다. Reason은 완력을 사용하지 않고 말로 문제를 해결할 수 있는 지적 능력이다. “이성의 시대”라고 불리는 계몽주의의 근대는 이 능력을 morality의 중심에 놓으려는 지난한 역사의 결과물이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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글 | 이택광

미술, 영화, 대중문화 관련 글을 쓰고 있는 작가. 경희대학교 글로벌커뮤니케이션학부 영미문화전공 교수로 재직하면서 문화평론가로 활동하고 있다. 경북에서 태어나 부산에서 자란 그는 어릴 적에 자신을 안드로메다에서 온 외계인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그래서 지구환경에 한동안 적응하지 못했으며 우주여행을 떠나는 그림을 그려서 꽤 큰상을 받기도 했다고 추억한다. 그는 자신의 모토를 "그림의 잉여를 드러내는 글쓰기" 라고 밝히며 글쓰기는 그림 그리기의 대리물이라고 생각하기에 그림에 대한 글을 계속 쓸 생각이라고 포부를 이야기한다. 이러한 글쓰기에 대한 생각을 바탕으로 1999년, 영화주간지 <씨네 21>에 글을 발표하며서 본격적인 문화비평을 시작한 이후, 다양한 저서를 통해 독자들과 만나고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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